좋은 삶은 오직 좋은 관계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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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6월 11일)
하버드 졸업생과 그들의 후손까지 90년에 걸친 인류 최대의 행복 보고서에서 “좋은 삶은 오직 좋은 관계”라고 말했다.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하는 건 여러 사람과 사랑에 자주 빠지는 게 아니다. 그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가 아닌 저기, 이곳이 아닌 저곳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바로 이 사람과 함께 말이다.
지금은 "돈과 성공만 외치는 'Big Me’의 시대에서 ‘Little Me’의 가치를 추구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리틀 미'를 유지하려면, 자존감을 잃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테크닉이 필요하다. 자기 과잉의 시대에 약간은 고전적인 자기절제와 겸손의 미덕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시시할지라도 '힘'을 빼고, 내 방식대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다시 말하면,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실천을 일상에서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자신의 책, <<두 번째 산>>에서 첫 번째 산의 조직과 두 번째 산의 조직을 구분하였다. "어떤 조직을 만들고, 어떤 조직에 머물러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조직에서 사람들은 일을 하거나 대학교 강의를 듣지만, 이런 활동들이 그 사람에게 어떤 두드러진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데서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고 나면 그냥 떠나 버린다. 그러나 두 번째 산의 조직은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려서 영원한 흔적, 어떤 흔적을 남긴다." 두 번째 산의 조직들은 두터운 인간관계를 강화하며, 온전한 헌신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런 데에서는 사람을 단순히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어 놓는다. 이런 조직에서 필요한 것은 관계와 공동체와 헌신이 중요한 키워드이다. 데이비드가 말하는 '산'은 '도덕적 정신'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말하기 위해 두 개의 산을 비유로 동원했다고 본다.
나는 세상을 살아 갈수록 더 잘 살고, 내면적으로 더 깊어지며 또 더 현명해지고 싶다. 그래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 있다. 두 번째 산의 삶은 헌신(獻身)하는 삶이다. 그래 오늘 아침의 화두는 헌신이다. 헌신이란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헌신이란 진짜 의미는 대가를 기대하지 않은 채로 무언 가에 매진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산의 삶에서 헌신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 어떻게 최대치로 헌신하며 또 어떻게 그토록 강렬하게 몰입해서 살아가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은 다음 네가지 가운데 하나 또는 전부를 위해 단호하게 헌신의 결단을 내리고 또 실천한다.
(1) 소명(vocation), '천직'으로서 직업- 생계나 출세를 위한 일자리(job) 또는 커리어(career)와는 다르다.
(2) 배우자와 가족 - 가족 생활을 잘 꾸려 나가는 것
(3) 철학과 신앙 - 인생 철학과 원칙을 세우고 믿음으로 실천하는 것
(4) 공동체 -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번성을 누리도록 노력하는 것
저자는 앞선 그의 책 <인간의 품격(The Road to Character)>에서 말했던 "이력서 목록(resume virtues)"과 "조문 덕목(eulogy virtue)"이 첫 번째 산과 두 번째 산의 구분과 통한다. 우리는 이력서는 쓰는 데에만 애쓰지만, 조문에 들어갈 내용도 생각해야 한다.
오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력서가 아닌 나의 조문에 들어갈 내용을 생각하며 일상을 명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왜냐하면 조문에 들어갈 내용은 한 존재의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들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깊이 있는 인격을 기르는 방법보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성취하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한다. 지금은 좋은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의 부산물이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려면 훨씬 더 큰 차원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삶의 무게 중심이 첫 번째 산의 초개인주의에서 두 번째 산의 관계적 사고방식으로 이동해야 한다.
굽어 돌아가는 길/박노해
올 곧게 자란 소나무보다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아름답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
휘청 굽이 친 강줄기가 더 정답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 보다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하지 말아라
돌아서지 말아라 삶은 가는 것이다
그래도 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
곧은 길 만이 길이 아니다
빛나는 길 만이 길이 아니다
굳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 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이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마티아스 뇔케의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로 다시 돌아 온다. 오늘은 옷차림의 기술과 태도, 그 기묘한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저자는 독일 소설가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피셔의 말을 인용하여 정리를 했다. "남자의 옷은 뭔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오직, 옷을 입고 있는 그의 태도가 말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가짜가 진짜인 듯 구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으며, 심지어 경멸하고 조롱한다. 스스로 진짜가 되지 못하면 아무리 비싼 옷도 소용이 없다. 진짜 가치는 드러내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내고 뽐낸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거나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사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누리는 상징 중의 하나이다. 부유한 상류층은 비싸고, 사치스럽고, 특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생산적인 일에 탐닉한다. 고급 의상은 비싸고 우아하지만 불편하다. 육체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하류층의 몫을 태연하게 가져가는 부유한 상류층들이 탐욕과 어리석음, 특권에 비이성적으로 중독된 사회를 만든다. 그렇지만 이젠 자랑하는 유행은 지나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스타일이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건은 이제 자랑이 아니라, 의미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각각의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가치는 물건에 붙어 있는 가격표와 상관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단순한 물건을 상당한 수준으로 향유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향유에 방점을 찍는다. 김기석 목사의 다음 글을 소환한다. "분주함이 사회적 신분에 대한 표징으로 인식되는 세상에서 한가로움은 덕이 아니라 게으름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이다. 가속의 시간에 적응하며 사는 이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품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니, 오래 머물지 못한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동안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향유’(frui)와 ‘사용’(uti)을 구분한다. 사용이 대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면 향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향유는 가장 온전한 사랑함이다.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타자들과 허물없이 순수한 사귐은 불가능 해진다. 사용할 것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의 가늠자로 삼을 때 사람은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단지 낭비하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것을 넘어 과포화 상태에 이른 사람들은 남아도는 소유물을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느낀다. 그래 향유하기 위해서는 짐을 버리고 자유로움 느끼려는 거다. 그들에게 중요하는 것은 '물질적인 소유물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누리는 경험이다. 그런 경험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향유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향유는 스스로 선택한 검약과 노력, 결핍을 누리고 즐긴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내러티브'라는 말이 요즈음의 화두이다. 트랜드를 연구하는 김난도 교수의 한 인터뷰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내러티브 자본’도 결국 내일을 빙자한 거품을 걷어내고 지금, 이 순간의 진정성에 집중하겠다는 욕구로 읽힌다"고 기자가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맞아요. 예전엔 스토리텔링이 마케팅이었지만 이젠 서사의 진정성을 파고들어가죠. 가령 영화 <ET>에 M&M 초콜릿이 나왔다면 이제 소비자는 궁금해해요. 그 회사는 우주개발에 투자했나? CEO가 양성 평등을 말하면 이사회에 여성 임원은 몇 명인가? 상품의 스토리나 CEO의 말보다 그 회사가 가진 제품과 경영의 진정성을 캐내죠. 그 진정성이 내러티브로 확인되면, 소비자는 제품을 사고 주식을 사요. 내러티브는 단순 스토리와는 달라요. 세계관의 문제이고 진정성의 문제죠. 개인도 기업도 결국 자기 정체성의 내러티브가 중요한 자본이 되고 있어요.” 나는 여기서 네러티브를 '서사'로 읽는다.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구처럼’ 되기 보다 ‘진정한 나 되기’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네러티브(서사) 자본이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절대갑으로만 살아온 이들의 무개념과 서민들보다는 화려한 자리에만 관심을 보이는 권위적 정신 세계의 단면이 만들어내는 것 때문이다. 한 예를 들면, 집권 초기 영국 여왕 조문 행사의 지각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정상들처럼 서민들과 줄 서서 걸어서라도 가는 길은 귀찮아 가지 않고, 리셉션 같은 화려한 자리에만 들리는 모습 등에서 기본 정신 자세를 알 수 있다. 그런 처세로 이룬 성공일 것이다. 그의 부인 김거니도 마찬가지이다. 논문 표절부터 살아온 삶 거의가 "연극성 인격"이라 할 만큼 "진정한 자신(자기 서사, 아니 자신의 이야기)"라고는 없는 여성이다. 그래 그녀는 실제로 흉내만 낸다.
그러니까 의미가 채워지지 않는 사치스러운 삶은 어는 순간 지루하고 공허해 진다. 이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길로 들어서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사치와 멀어진다. 또 어떤 사람은 환경과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몰두한다. 또 다른 방식은 '더 작은 것에 대한 예찬', 일종의 미니멀리즘이다. 최소한 것들만 의식적으로 선별하고, 그것에 더 중요하고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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