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은 생존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11일)
오늘 아침은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가 했다는 말, "성격은 생존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에 밑줄을 긋고, 사유를 해 본다. "성격이라는 게 대부분 생존에 이점이 있어서 발달된 것입니다. 40-50년을 한 성격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성격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 이전 다른 행동을 보여 달라'고 하는 건 당신의 유전자를 바꾸라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사람의 성격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방향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생존에 가장 적합하게 구성되었습니다."
<<태도의 말>>의 저자 엄지혜는 위의 문장이 "서늘한 구원"이었다 했다. 누군가와의 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할 때마다 종종 이 말을 떠올린다고 한다. 괜찮은 삶의 지혜이다. 그러나 그건 너무 단세포적이다. 상대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게 된 성격을 두고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냥 차이를 존중해 주는 거다.
나는 내 성격을 잘 모르고, 어떤 성격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솔직하고 당찬 가? 아니면 감정을 숨기는가? 배배 꼬여 있는가? 아니면 투명한 성격인가? 상대를 비틀어 보는가? 아니면 상대의 좋은 점을 먼저 보려고 하는 너그러운 성격인가? 성격이 급해, 껄끄러운 상황을 견디지 못해 결론을 빨리 내고 싶어 하는 가? 아니면 성격이 느긋해 시간의 흐름대로 문제를 풀길 원하는가?
이건 인문적 사유가 아니다. 인문 운동가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인간은 두 가지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생존 본능, 또 다른 하나는 종족 보존을 위한 복제 본능이다. 생존을 위한 욕구는 의식주와 같은 몸을 위한 욕구와 심리적 안정을 위한 안전, 사랑, 지위, 소속감 그리고 자부심과 같은 정신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생존할 뿐만 아니라, 삶의 환희를 경험하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에,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전혀 다른 성격의 욕구를 찾아 나선다. 인간은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욕구를 넘어선 영적으로 만족스런 그 무엇을 추구하게 된다. 그 무엇이란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이 되는 것이다. 탁월하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사람들은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현재를 음미한다. "아 지금 참 좋다!" 이 잦은 멈춤과 음미의 총합이 그날 하루 능동적으로 찾아낸 행복의 양이다. 그렇게 매일 하루치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국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를 음미하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그 분야에서 탁월함이 있어야 한다. 그냥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어떤 성취가 중요하지는 않다. 성취 지향적일수록 행복지수는 낮다. 행복을 큰 성취에서 찾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준이 크고 높게 설정되어 있으면, 평범한 일상은 초라함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그 무엇에 매진할 때 행복하다. 인간은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잠재성을 일깨워, 그 잠재성과 어울려 춤을 출 때, 행복하다. 진정한 행복이란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영적인 자신을 만족시킬 때, 경험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욕구를 알고, 그것을 매일 갈고 닦는 수련을 지속하여 탁월함에 이르면, 자연히 남들이 모두 최고선이라고 추구하는 부나 명예보다는,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삶의 고유한 임무에 몰입하게 된다. 그럴 때만이. 잠자고 있던 잠재력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행복하다.
각설하고, 나는 어떤 성격이고 싶은가? 나는 매우 긍정적인 성격이고 싶다. 우리 사회는 강한 것을 갈망한다. 승리, 성공, 권력 등등. 나는 이런 강자들의 반대편에 있는 약한 것들, 가령 고요함, 익명성, 실패에 따라붙는 낙인, 이런 것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로 했다.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새는 제 아무리 보 잘 것 없는 참새라도 시간이 주어진 동안에는 열심히 살고, 때가 되면 아무런 자기 연민 없이 뚝 떨어져 버린다. 미련 없이 대지 위로 말이다."
나이에 비해 젊게 살려면, 다음과 같은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 성격이 긍정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매우 정직하여야 한다.
2) 노욕(老慾)을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어떤 것에 너무 집착하거나 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 노인은 큰 자제력, 아니 절제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3)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 가져야 한다.
4) 책 읽기와 쓰기를 한다. 이것은 뇌활동을 위해 중요하다. 노년기에 가장 무서운 재앙이 치매이다.
5) 계속적인 운동이다. '걷기'가 좋다. 그러면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고, 건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퍼붓는 비 속에서 춤 추는 것을 배우는 거다. 진부한 사람은 자신 속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를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안무를 갖지 못한다. 자신만의 춤을 추지 못한다. 이 이유는 인간의 귀가 다른 삶들의 평가와 인정에 목말라 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자신이 만들어낸 삶에 달려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써 놓은 책이나 관습에서 삶의 기술을 배우지 않는다. 남들의 생각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자유를 아는 사람이다. 남의 것이나 따르는 삶이 계속되는 한 자신만의 고유한 문법을 만들어내는 참신한 삶은 찾아오지 않는다. 진부는 우리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하는 끔찍한 훼방꾼이다. 썩은 고기를 믿지 말고, 버리고, 도끼로 치듯 과거와 단절하여야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는 광산 사업의 파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춤을 춘다. 그 춤은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으로 비친다. 그리고 그 춤속에는 해방이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한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 가가 시작되는 느낌의 해방을 엿볼 수 있다. 억압이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해방이 아니다. 지나치게 믿고 기대하고 희망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남 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다. 기대하는 것은 모든 일에서 없으면 좋은 심리이다.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로 인해, 해방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평소 즐겨 읽는 윤정구 교수의 페이스 북 담벼락에서 내 생각을 읽었다. "해방은 자유에 의해서만 종결된다." 자유에 의해 종결되지 못한 해방은 차이를 만들지 못한 반복일 뿐이다. 차이로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되지 못하면 지루한 삶은 계속된다. 해방은 자신의 존재의 무게를 내려놓는 자유에 에 대한 체험을 만끽하기까지는 종결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한 약속을 실현해서 약속을 지키고 약속에 대한 중압감에서 훌훌 벗어나는 것이 해방을 넘어선 진정한 자유에 대한 체험이다. 윤정구 교수의 담벼락에서 읽었다. 최근에 다시 보기를 하고 있는 <나의 해방일지>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더 해본다. 어쨌든 해방과 자유, 그거 어렵다. "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안다.
푸른 하늘을/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그리고 성격과 사고방식을 바꿔야 자신의 운명이 바뀐다. 특히 자기를 되돌아보지 못하는 성격이 형성되면 이거 고치기 힘들다. 자기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이기도 하다.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역지사지가 된다는 말인가? 언젠가 노트에 적어 둔 거다. 누구의 글인지는 출처를 적어 두지 않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성격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번 고민해 볼 내용이다.
하타요가(Hatha yoga)에서는 몸의 동작을 변화시킴으로써 사고방식이나 기질적 문제도 어느 정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하타요가에서는 몸의 동작을 중시한다. 육체를 변화시켜야 마음이 변화한다고 보는 노선인 것이다. 마음이 변화하면 육체의 변화도 동반되지만, 현실적으로는 마음 변화가 매우 어렵다. 마음 한번 바꾸기가 죽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마음을 바꾸기가 어려우니까 육체를 먼저 바꿔서 그 다음에 마음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도록 하는 노선이 하타요가의 방법인 것이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치료하는 요가 자세로는 두 가지가 있다.
1) '활 자세'이다. 앞으로만 쏠린 카르마(업장)를 해소하면서 뒤쪽을 보강해주는 자세이다. 바닥에 엎드려서 두 다리를 들어 올려 두 손으로 발목을 잡고 몸을 활처럼 휘는 동작이다. 책을 자주 보고, 컴퓨터 화면을 많이 보면 결국 앞만 보는 셈이다. 요가에서는 전뇌(前腦)를 이야기한다. 전뇌만 발달하고 후뇌(後腦)가 각성되지 못하면 뒤를 보지 못한다. 뒤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의 처지이고, 주변에 대한 배려이다. 의식이 앞으로만 쏠려 있으면 상대방 처지를 보지 못하는 함정에 빠진다. 잘못하면 이중인격, 철면피가 되는 수도 있다. 활 자세는 이걸 치료해주는 자세이다. 필자도 책을 자주 본 카르마가 전생부터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후뇌가 약하고, 따라서 이 활 자세를 자주 해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다. 당대 하타요가의 세계적 고단자인 석명(石明·61) 선생에게서 받은 처방이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를 입체적으로 점검해줄 명사(明師)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쟁기 자세이다. 하늘을 보고 누워서 두 다리를 들어 올려 두 다리 끝이 머리 위의 바닥에 닿도록 구부리는 자세이다. 열 받아서 뚜껑 열리려고 할 때 이 자세를 하면 효과가 있다. 상기된 게 내려간다. 뇌경색과 심장마비를 예방해주는 자세이기도 하다. 쟁기 자세는 '내가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 의식 속에 숨어 있는 아상(我相)과 명예욕을 조절하는 데에도 아주 효과적이라고 석명 선생은 말한다. 후뇌를 각성시키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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