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허영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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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31일)
왜 우리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를 하는가? 나를 소모하지 않는 태도의 심리학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서 오늘 <인문 일지>를 시작한다. 얼마 전에 읽은 마티아스 뇔케는 자신의 책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에서, '나를 낮추면 상대는 긴장을 풀고 나를 대할 수 있다. 그래서 겸손하게 행동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실 높은 지위는 상대에게 부담이 된다. 눈높이가 비슷하거나 내가 주눅들지 않을 수 있는 상대라야 마음을 더 쉽게 연다. 말도 더 편하게 할 수 있고, 공감의 폭도 더 넓어진다. 그리고 겸손한 행동은 겸손한 사람이 가장 잘 알아본다. 그리하여 겸손은 또 다른 겸손과 연결된다. 즉 세심하게 낮추어 표현하는 감각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며 더 가까워진다. 허영심이 강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런 이들과는 거리를 주고 멀리하면 된다.
문제는 허영(虛榮)이다. 일반적으로 허영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과 지위, 돈 그리고 학위 따위에 목을 맨다.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깨달음을 수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허영을 버리는 ‘마음 근육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은 자신의 본래 면목(本來面目), 그러니까 ‘원래 맨 얼굴'을 찾는 거다. 그러니까 페르소나(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절 연극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사용하던 가면)를 벗고 '맨 얼굴'을 직시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으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며, 자신의 불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자신의 불성(佛性)’이란 어떤 페르소나(가면)도 착용하지 않은 마음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본래 면목(맨 얼굴)이란 자신의 불성, 아니 자신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것이 위의 가르침에서 직지(直指)나 견(見)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나 자신의 불성을 가리고 있는 두터운 페르소나를 제거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면목, 맨 얼굴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여러 가지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그 역할을 바꾸는 법은 알면서도 그것을 되돌아볼 줄 모른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려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모두 인정할 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건강하고, 완전하며, 가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이란 무엇을 하는 가가 아닌,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아무도 내가 겪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내가 겪은 특별한 역사와 사건들로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진정한 나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특별한 존재이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진실해 지려면, 또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려면 일상적인 일에서 그것을 경험해야만 한다. 즉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해야 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사적(私的)이어야 한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정성스럽게 하고 싶어서 무슨 일을 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렇게 하고 싶은 자신을 만들 때, 그런 헌신은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간결하다.
정신의 다이어트/송정림
우리가 정말 필요한 다이어트는
육신의 다이어트가 아닌지도 몰라요
정신의 다이어트 마음의 다이어트
영혼의 다이어트가 더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탐욕과 집착이라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 뱃살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가지면 그것을 채우지 못해 괴롭고
그래서 남의 것을 뺏으려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고
그런 마음은 얼굴에 나타나서
절로 탐욕스런 인상이 되고 맙니다.
집착도 마찬가지,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것을 떠나지 못하는 집착은
우리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하는 체중입니다.
그런 가 하면 화를 내고 질투하는 마음은
시도 때도 없는 위경련과 두통을 가져옵니다.
또 나 혼자 잘났고 나만이
모든 것을 해내고 있다는 교만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다 떠나게 하지요.
그래서 고독의 병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허영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의 지방질입니다.
그런데 내 정신의 비만 상태를 알아보는
체중계는 어디 없을까요?
다시 오늘의 화두로 돌아온다.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과소평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에 과소평가 받는 행운을 누린 사람은 나중에 인상적인 신뢰를 얻기가 더 수월 해진다. 그리고 자연히 외부로부터 저항도 훨씬 적게 받는다. 과대평가된 사람은 약점이 드러날까 봐 노심초사하겠지만, 과소평가 받은 사람은 두려울 게 별로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과도 관련이 깊다. 스스로를 믿는 사람만이 자신을 낮추는 표현도 할 수 있다. 반대로 내면이 강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고, 자신이 실제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내면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약점과 부족한 점에 대해 인지하고 이를 가감 없이 인정한다.
이게 자존감이다. 세련되게 겸손 하려면 비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건전한 자존감'이 필요하다. 늘 하는 말이지만, 자존감과 자신감은 다르다.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고, '자신감'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 에도 좌절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남의 탓이나 남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존감 있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포용하고 양보하며 겸손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평가 혹은 믿음'이다. 자존감은 다른 이와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지적되는 것들은 이렇다. 실력을 쌓는 것, 작은 성공을 누적시키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외부에서 긍정적 피드백을 요청하는 것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치가 더 높은 수준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에 따르면, "자신과 친해지기"가 필요하다. 자신과 친해지려면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신에게 과도한 것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신뢰할 수 있으며 자존감도 안정된다.
탄탄한 자존감을 갖고 있다면 외부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견해는 가려들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또한 자신의 가치를 믿는다면, 그 마음이 발판이 되어 더 독립적인 여유와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평온함은 우아한 형태의 자긍심이다." (마리 폰 에브너-에센바흐) 내면의 힘은 겸손을 행할 수 있는 탄탄한 기초가 된다. 많은 사람이 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나의 가치에 대해서 잘 몰고 있어도 받아들일 수 있다. 타인의 판단에 의지하거나 좌우되지 않는다. 타인의 인정 없이도 자기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능력이란 건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판단 중지'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이야기는 내일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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