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사회는 부끄러움(恥)을 아는 사회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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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30일)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전혀 신사처럼 굴지 않을 때 어떻게 할까?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본다. 지난 주에 읽은 마티아스 뇔케의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에서 얻는 생각이다.
'시민의 겸손'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전에, 권력자들의 삶은 낭비, 허영 그리고 이기심으로 점철돼 있었고, 궁정은 권태와 음모의 상징이 되었다. 소박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그들을 행한 비난이 팽배해졌다. 그러나 그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의식적으로 귀족들과 거리를 둔 시민들이 등장한다. 이때 소박한 시민들은 화려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이나 외적인 권력이 아니라 내면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선함은 소박한 그릇 안에 있다"는 거였다. 같은 말이지만, 선(善)은 보이지 않는 그릇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늘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깊이 들어가야 하며, 표면 아래를 파헤쳐봐야 한다. 휘황찬란하게 화려한 것은 결코 선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그런 것은 효과, 환상, 기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압도하고 위협할 뿐 본질적인 것은 숨긴다.
소박하고 겸손한 시민들은 그와 같은 술책들을 쓰지 않는다. 소박한 그릇의 진가는 원래 탁월한 사람일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덜 끌려고 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해 의심을 갖고 덜 뻔뻔해 진다. 지금 우리는 부끄러움, 아니 수치심(羞恥心)을 모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부정과 불의를 아랑곳하지 않는 뻔뻔함이 정치적 '좋아요'를 받고, 무례와 혐오를 부추기는 파렴치가 사회적 '하트'를 얻는데,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면서 차분하고 신중히 행동하는 태도는 오히려 조롱당하고 조리돌림의 대상이 된다. 타인의 눈을 의식해 행동을 조심하고 자기를 절제하는 지혜가 드물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당황해서 스스로 묻곤 한다. '수치는 혹여 나만의 감정인가?' 인간으로 인간 답게 살아가기 참 힘든 시절이다.
건강한 사회는 부끄러움(恥)을 아는 사회이다.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에는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교통 법규 위반에 적발된 자신만 재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처럼,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 중의 하나이다. 모두 다 법을 지키지 않는데, 적발된 자신만 재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경우이다.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 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뻔뻔해 졌다. 수줍음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너무 수줍음이 많아 탈이었다. 부끄러움이 많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수줍음은 사라졌다. 시에서 표현한 대로 '위대한' 수줍음이 되었다. 뻔뻔해 지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시치미 떼기의 명수가 되어야 돈도 많이 벌고, 남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 꼭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해, 라는 의문이 자꾸 든다. 잃어버린 수줍음을 어디에 가서 찾아올까? 사람을 사람 답게 하는 것이 염치(廉恥)다. 염치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지도자가 되면 나라는 불행해진다. 무지, 오만, 비굴, 탐욕의 인간 군상들을 매일 TV로 접한다. 참으로 뻔뻔하다. 염치는 헌신짝처럼 차버려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가 보다. 차라리 위선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시치미" 떼야 하는가? "시치미"란 사냥매의 꼬리에 매어 두는 인식표를 말한다. 사냥매가 귀하고 비싸기에 남의 매를 훔쳐 시치미를 떼어버리고는 새 시치미를 붙여 자신의 매라 주장했다 한다. 그래 '시치미를 뗀다'라는 말의 유래가 여기에서 나왔다.
시치미 떼기/최승호
물끄러미 철쭉꽃을 보고 있는데
뚱뚱한 노파가 오더니
철쭉꽃을 뚝, 뚝, 꺾어간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가래침
가래침이 보도블록과 지하철역 계단
심지어 육교 위에도 붙어 있을 때
나는 불행한 보행자가 된다
어떻게 이 분실된 가래침들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어제는 눈앞에서 똥누는 고양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까지 똥누는 걸 보고
이제는 고양이까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졌다 뻔뻔스러움이
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과 더불어
도처에서 번들거린다
그러나 장엄한 모순덩어리 우주를 이루어 놓고
수줍음으로 숨어 있는 이가 있으니
그 분마저 뻔뻔스러워지면
온 우주가 한 덩어리 가래침이다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 경계를 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경계를 정한다는 것은 욕심이 부족하거나, 행동이 약하거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이 정한 경계는 나를 가두지만, 내가 정한 경계는 나를 규정하는 거다. 여기서 말하는 경계는 단순하게 끝이나 한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체성을 세우는 표시이다. 내가 정한 경계 너머에 있는 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내 경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신경을 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경계 너머를 위해 나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는 거다. 경계 너머를 바라보며 그 경계를 넘어서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경계를 세우면, 그 경계로 인해 자유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된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나의 자유는 내 모든 계획을 위해 스스로 정해둔 좁은 공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겸손한 태도는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정하는 것과 같다.
겸손함과 반대적인 측면에서의 경계 짓기와는 구별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높은 계층을 추종하면서 자신보다 아래에 속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철저히 구분 짓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우리는 '속물(snob)'이라고 부른다. '스노브'의 사전적 의미는 '상류층을 동경하는 사람', '잘난 체 하는 사람'으로 흔히 '속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속물근성(snobisme)은 가짜 겸손이다. 시민적 소박함이나 겸손과는 반대이다. 속물은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을 남들에게 보여주고자 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자신이 계속 관리해야 하는 사람과 어울릴 가치가 없는 사람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들은 지극히 출세 지향적이고, 언제나 더 상위 그룹에 속하기를 위하며, 오로지 외적인 인상에만 집중한다.
우리는 지금 염치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더러우면 숨거나 숨기기라도 해야 한다. ‘염치’는 ‘결백하고 정직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다시 말하자면 '염치'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를 차릴 줄 아는 체면과 동전의 양면이다. 면면히 이어온 경험적 지혜가 함의된 속담에서 ‘염치’는 다양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 염치없는 자는 낯짝과 뱃가죽이 소가죽보다 두껍다.
- 봉당을 빌려주면 안방까지 내 달라고 우겨 대고, 안뒷간에 똥 누고 안 아가씨더러 밑을 씻겨 달라고 덤벼든다.
- 고약한 노린내가 나는 놀래미 회라도 마다하지 않고 먹을 형국이다.
조상들은 이처럼 두려움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고 제 욕심만 차리려 덤비는 자를 꺼리어 멀리했다. 이 모두의 근원이 바로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몰염치다. 바야흐로 지금 우리 사회는 ‘염치’가 실종된 '후안무치'의 시대다. 어떤 악행과 실행보다도 번연히 제가 저지른 일 앞에서 뻔뻔스레 구는 철면피들이 더욱 놀랍다. 그렇다. 화가 나기에 앞서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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