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328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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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기간 동안, TV 토론을 보고, 어제 다 못한 이야기를 인문 운동가의 입장에서 오늘 더 이어간다. 나는 대화 속에서 '거대 담론'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작고 사소한 것들의 합이 우리의 인생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좋음’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지 말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힘들다. 누가 좋은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거창한 말보다 그 사람의 작은 행동을 보면 안다.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 운전할 때 양보해 주는 사람,
▪ 문을 열 때 뒷사람이 오는지 확인하는 사람,
▪ 식당에서 일어설 때 의자를 밀어 넣는 사람,
▪ 비 오는 날 상대에게 우산을 더 기울여 주는 사람,
▪ 약속 시간에 5분 먼저 오는 사람,
▪ 헤어질 때 한 번쯤 뒤돌아봐 주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잘하는 사람. 그러나 나에게만 잘해주는 사람이라면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세상에 나에게만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때는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오직 그 사람의 ‘행동'만 보라고 충고한다. 나쁜 행동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질 때 라야 좋은 사람에 대한 안목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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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피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관계는 말로 이루어진다. 또한 말이 곧 그 사람이다. 그러므로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과는 멀리하고 피하는 것이 좋다. 지금은 '선택의 시간'이다. 정치인들도 이에 해당된다.
▪ 힘센 사람에게는 머리를 조아리고, 약자 앞에서는 거들먹거리는 사람 :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건 키워주는 '억강부약(抑强扶弱)'과 반대인 사람이다.
▪ 늘 남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사람 : 마치 자신이 무슨 심판 관이라도 된 양 만나면 노상 남을 평가한다. 그것도 추켜세우는 말이 아니라 깎아내리는 말을 한다. 이런 단점이 있고 저런 허물이 있다고 폭로하고 다닌다. 시기와 질투가 말에 배어 있다. 그런 사람에게 한 말은 비밀도 지켜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유명한 누구를 알고 있다.’, ‘내가 누구와 친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자기 말은 하지 않고 ‘누구’ 말만 하는 사람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누가 이렇게 말하더라.’, ‘누가 어떻게 됐다.’, ‘누구는 어떤 사람이다.’ 등. 남 얘기를 안 할 순 없지만, 남 얘기만 하는 건 문제다. 그리고 그런 말만 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순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경우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 갈라 치기에 능한 사람: 이런 사람도 피해야 할 대상이다. 늘 내 편 네 편 편을 가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피아를 구분한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동지이고, 눈앞에 없는 사람은 적이 된다. 또한 이 사람에게 가서는 저 사람 욕을 하고, 저 사람에게는 이 사람 욕을 해서 두 사람 사이를 갈라 놓는다. “내가 너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누가 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던대?”, “네가 속상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민 고민하다 얘기하는 거야.” 이렇게 이간질하는 사람은 절대 가까이해선 안 된다. 부처님도 입으로 짓는 업(業)에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가운데 양설이 바로 이간질하는 말이다. 양쪽에 다니면서 상대방에게 서로 다른 두 가지 말로 싸움을 붙이는 양설을 조심하라고 했다.
▪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만 입에 달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도 멀리하는 게 좋다. 만나면 늘 징징대고 투덜대는 사람, 자기는 운이 없고, 되는 일도 없고, 나만 힘들다고 아우성 치는 사람, 모든 게 못마땅하고 일이 끝나면 꼭 뒷말하는 사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게 안 될 줄 알았다.’, ‘이건 누구 탓이다.’ 말이 온통 후회와 남 탓뿐이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기가 빨리고 급격히 우울 해진다.
▪ 말을 수시로 바꾸는 사람: 이런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 어제 한 말 다르고 오늘 한 말 다르고, 이 사람에게 한 말 다르고 저 사람에게 한 말 다르다. 생각과 말과 행동도 다르다. 물론 생각과 말은 바뀔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 바뀌었다고 말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말을 바꾸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따지고 달려든다. 그런 사람은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종잡을 수가 없고 예측이 안 된다. 한마디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진정성이 없는 사람도 피해야 할 대상이다.
▪ 염치없는 사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지만, 사람이기에 자신의 이기적 속성을 감추려고 한다. 그래서 있는 것이 체면(體面)이다. 사람은 체면을 차리려고 한다. 그런데 체면이 깎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 그야말로 뻔뻔한 사람이 있다. 항상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런 사람 입에서는 사과나 양보라는 게 나오지 않는다. 반성도 없다. 잘못하고도 잘했다고 우긴다. 아니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르신이 서 계시면 아예 모른 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리를 양보하진 않더라도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도 있고, 양보하지 않는 걸 나무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미안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양심이고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다.
▪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사람: 이런 사람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아무에게나 반말하는, 오만하고 불손한 사람이 있다. 자신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 늘 남을 가르치려 들고, 자기 말만 옳다고 주장한다. 상대를 존중하거나 배려하는 건 언감생심(焉敢生心, 어찌 그런 마을을 품을 수 있거나)이고, 자신의 감정조차 절제하지 못한다. 자주 부아가 치밀고 폭언과 욕설을 남발한다. 감정의 기복이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주위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굳이 이런 사람과 가깝게 지낼 이유가 없다.
▪ 남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 이런 사람도 멀리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나눠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 기회를 독점하려고 하거나, 자기 말의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알아, 알아!” 하면서 남의 말을 끊거나, “너는 왜 그런 말을 해!” 하면서 입을 막는다. “아, 그 말 하니까 생각나는데” 하며 수시로 끼어든다. 모임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놓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말을 시키지 않으면 토라진다. 정작 자기가 말은 가장 많이 하면서 남에게 ‘말이 많다'고 타박 한다. 가급적 이런 사람도 안 만나는 게 좋다. 남의 말을 잘 듣고, 남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침묵하는 것이다. 곳곳에 ‘침묵’, ‘경청'이란 문구를 붙여 놓고 수시로 보며 마음을 다 잡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정직하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의 특징은 말을 자기 마음대로 편집한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실을 과장, 축소 그리고 왜곡하는 건 다반사이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사실과 자기 의견을 섞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귓속말을 자주 하고 밀실에서 끼리끼리 모여 말하는 걸 즐긴다. 말이 공개적이고 투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말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그 자의 문제를 지적하고 맞서 싸우기, 만나긴 하지만 무시하기, 아니면 만나지 않기. 나는 만나지 않기를 택한다 피할 것인가, 타도할 것인가, 함께할 것인가?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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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같지만, 매력적인 말 습관을 위해 자주 사용 할 말들을 열거한다. 향기로운 꽃에 벌이 모이듯이, 향기로운 말을 쓰는 사람에게 좋은 인연이 찾아온다. 향기로운 말은 내 주변 뿐 아니라 내 마음까지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듯이, 고운 말은 예쁜 씨앗을 가득 심는 하루가 시작된다. 좋은 사람을 찾기보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향기로운 꽃 주위에 예쁜 나비가 있듯이 향기로운 사람 주위에는 그런 사람만 있다.
▪ 덕분에: 좋은 기분을 상대의 공으로 돌리며 상대를 빛나게 해주는 말이다.
▪ 그렇구나!: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는 말이다.
▪ 고생했네("폭싹 속았수다". "욕봤네"): 결과와 상관 없이 상대의 노력과 과정을 다독여 주는 말이다.
▪ 그럴 수 있지: 상대의 실수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말이다.
▪ 같이(함께) 해보자: 함께 라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담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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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사진은 나의 채마밭에서 찍은 완두콩의 꽃이다. 그 곳의 야채들은 근면 성실하고 부지런하다. 그래 '근면(勤勉, 부지런함)'이라는 말이 오늘 아침의 화두이다. '근면'을 '부지런히 일하며 힘 씀'이라고 사전은 말한다. 반대 말이 '게으름', '나태'이다. '근면'을 말할 떼, 우리는 흔히 '근면 성실(誠實)하다'라 말한다. '부지런히 힘써 일하며 정성스럽고 참 되다'는 거다. 스캇 펙은, 자신의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게으름을 "24시간 중 몇 시간을 열심히 일하는 지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진짜 게으름은 중력이 짓누르는 관성 때문에 깨어 있음에도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있음"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오늘 사전 선거가 시작되었다. 본 선거가 끝나면 우리는 새롭게 시작하여야 한다. 그래 오늘 아침 이런 생각들을 했다.
윤정구 교수는 근면함을 증거하는 "인간으로 마땅히 가야 할 길"의 여정은 "안락한 자신만의 동굴에 갇혀 살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동굴 이야기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국가>>에 실린 ‘동굴의 비유’에서 나온다. 이 비유는 고백(告白)과 회심(悔心)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원래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깊은 곳에서 동굴 안에 위치한 벽에 투영된 그림자만 보도록 손과 발이 쇠사슬로 묶여 있는 수인(囚人)과 같다. 그들 중 한 혁신가가 ‘결연히’ 자신을 얽매고 있는 편안하면서도 속박하는 사슬을 끊는다. 그리고 자신들이 본 것들 허상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동굴 밖에 있는 태양을 향해 거룩한 여정을 시작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하찮은 순간이 영원한 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묶인 채로 진실이 아닌 허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에 의문을 품고 자신을 속박했던 족쇄를 부순다. '한순간에(suddenly, 불현듯이-불을 켜서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갑자기 어떠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모양, 느닷없이)' 낯선 현실을 만나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것은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시작을 여는 '갑자기/한순간에', '결정적 순간'에 일어난다. 이 순간이 우리의 타성과 게으름을 일깨우며 한 곳에 의미 없이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래야 그림자의 허상이 아닌 빛이 일깨우는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는 거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동굴 맨'이었다. 이 '동굴 맨'은 밖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굴 밖을 나가보지 못하고 동굴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통해서 동굴 벽에 자신의 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보고 자신과 세상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스캇 펙이 말하는 '근면함'이란 플라톤이 상정한 '동굴 맨'의 상태를 벗어나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게으른 삶이란 동굴 밖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밖을 외면하면서 동굴 안에서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고 사는 삶이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근면 성실함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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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신차리지 않고 방심하면, 자신의 과거에 축적된 세계관이란 렌즈로 주위를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가치를 나름대로 측정한다. 자신의 시선을 객관적이며 온전한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의 인식체계의 노예가 되어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특히 우리는 세상을 쉽게 둘로 나눈다. 왜냐하면, 그런 구분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경계에 서 있으면 불안하다. 반면, 어떤 한 진영에 있으면 우리는 편안하다. 그 불안이 우리를 고도로 예민하게 유지해 주고, 그 예민성이 경계가 연속되는 흐름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감지 능력을 우리는 '통찰(insight)'이라고 부른다. 통찰력이란 "탁! 하면 아는 것"인데, 세계의 흐름을 단순히 이성적인 계산 능력으로 만이 아니라, 감성이나 경험, 욕망이나 희망 등의 모든 인격적 동인들을 일순간에 발동시키는 능력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오는 고도의 불안을 감당하며 키워 낸 예민함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경계에서 떠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그 세계를 전부로 착각하고, 우리는 그 프레임에 갇혀 굳어버린다. 이 세계를 참과 거짓, 선과 악으로만 본다. 자신의 관점에서 맞는 것만 참이고 선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고 악이다. 이 관점이 바로 이념이고 신념이고 가치관이다. 세계는 변한다. 한 순간도 멈추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이 변화의 진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변화는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흐름은 경계가 지속적으로 중첩되는 과정으로, 흐르는 것은 부드럽다. 변하는 것은 유연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며, 변화가 멈추고 화석 화되어 있는 일이 죽는 일이다.
산 자의 부드러움을 정지시켜 딱딱하게 굳도록 하는 것이 이념이나 신념 같은 것들이다. 세계가 변화라면, 경계의 중첩이라면, 그 흐름을 그 흐름 그대로 마주하여야 한다. 왜? 그래야 그 변화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생명이다. 생명은 경계의 중첩이 흐르고 또 흐르는 과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오늘 아침에 공유하는 시처럼, 곡선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스치며 사는 거다.
스침에 대하여/송수권
직선으로 가는 삶은 박치기지만
곡선으로 가는 삶은 스침이다
스침은 인연, 인연은 곡선에서 온다
그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기쁨이 있다
스침은 느리게 오거나
더디게 오는 것
나비 한 마리 방금 꽃 한 송이를 스쳐가듯
오늘 나는 누구를 스쳐 가는가
저 빌딩의 회전문을 들고 나는 것
그것을 어찌 스침이라 할 수 있으랴
스침은 인연, 인연은 곡선에서 온다
그 곡선 속에 희망이 있고 추억이 있고
온전한 삶이 있다
그러니
스쳐라
아주 가볍게
천천히.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