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에 대한 문제를 사유한다. (2)

328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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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마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100세 시댸), '꼰대'에서 '꽃대'라는 이름으로 '나이 듦'에 대한 문제를 사유해 보기로 했는데, 그걸 오늘 이어간다. 노인 '문제'가 아니라, 노년 '존재'로 관점을 바꾸어, 다시 말하면 노인을 '존재'의 관점으로 보는 인식 전환을 해보려 한다. 이에 따라 '노년의 존재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담론을 만들어 보려 한다.
▪ 먹고 사는 문제로서의 양식(糧食) 모습
▪ 품위 있는 삶과 사회를 위한 양식(良識) 모습
▪ 일종의 문화 스타일(style)을 의미하는 문화적 문법으로 서의 양식(樣式) 모습
지난 주에 이어, 오늘은 '청춘으로부터의 해방"를 화두로 한다. 나이가 들면서, 청춘을 모방하지 말자는 거다. 그건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으로 늙어가려면, '청춘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청춘을 흉내 내다 노년을 맞이하게 되면 참담해진다. 봄은 아직 여름을 모른다. 봄과 여름을 지나온 나만 아는 그 시간을 부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 본다.
사람이 잘 산다, 건강하다, 양생(養生)을 한다는 건 내 몸과 시공간의 리듬을 맞추는 거다. 봄에는 봄에 맞는 양생을, 겨울에는 겨울에 맞는 양생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청춘은 청춘에 맞게, 중년은 중년에 맞게, 노년은 노년에 맞게 리듬을 밟아야 되는 데, 이 리듬이 어긋나는 데서, 병과 괴로움이 시작되는 거다. 청년들은 결혼도 임신도 못하고 이 사회에 편입되지 못해서 괴롭고, 노인들은 그 많은 시간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그 사이에 낀 중년들도 행복하지 못하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들었다. 젊음의 에너지를 계속 산업에 투여해서 화폐로 바꿨던 거다. 그러는 사이, 국가가 압축 성장을 하고,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그 청춘들이 노년이 된 다음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다. 아직도 '봄-여름'의 열기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가을-겨울'을 알지 못하는 노인 존재들이 방황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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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청춘이 멋지다'고 하는 이유는 많은 가능성을 실험하고 모색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시행 착오를 할 수 있다는 거다. 현대인들은 실패를 '트라우마'라고만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고미숙은 <<서유기>>를 예를 들어 말한다. 인간이 자유를 누리려면 81난을 겪어야 한다는 거다. 손오공과 저팔계가 108요괴를 만나고 81난을 겪는데= 게 미션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도 그래야 정신을 차린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탐진치,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에 완전히 노예가 되는 거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그 실패들이 나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덜어준다는 거다. 그래서 실패가 자랑스러운 거다. '나는 이런 걸 경험했어' 하는 나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즉 나만의 서사(내러티브, narrative)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취직도 잘 되고, 연애도 술술 풀리고 중년에 중산층에 무사히 편입한 분들은 다 우울증을 앓는다. 자신이 겪은 실수와 고생을 자랑스러워 해야 된다. 그건 시간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가급적 청춘을 모방하지 말아야 한다. 성형을 하면서까지 청춘을 따라가려고만 하니 성숙한 중년 문화, 노년 문화가 안 생기는 거다.
오래 전에 <<피로사회>>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한병철 교수가 <<서사의 위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오늘 아침 그 책을 다시 책꽂이에서 꺼냈다. 그는 사라지는 뉴스라는 스토리를 좇느라 방향도, 의미도 잃은 채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삶을 '서사의 위기'라 진단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스토리 중독에서 벗어나 내면의 서사를 회복하고 자신만의 온전한 삶을 회복이라는 거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사람은 이야기이다. (…)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대 서사의위기가 있다."(한병철) ‘내’가 아닌 ‘다른 누구처럼’ 되기 보다 ‘진정한 나 되기’가 단순한 정보의 스토리텔링이 아닌 '나만의 서사'가 필요하다. 노년이 되어도 '네러티브(서사) 자본'이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절대갑으로만 살아온 이들의 무개념과 서민들보다는 화려한 자리에만 관심을 보이는 권위적 정신 세계의 단면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은 "진정한 자신(자기 서사, 아니 자신의 이야기)"이라고는 없고, 남을 흉내만 내고 사치에 목매단다. 그러다가 의미가 채워지지 않는 사치스러운 삶은 어느 순간 지루하고 공허해지는 데, 그 대안은 다음과 같은 다른 삶의 방식에 관심을 돌리는 거다.
▪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길로 들어서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사치와 멀어진다.
▪ 또 어떤 사람은 환경과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몰두한다.
▪ 또 다른 방식은 '더 작은 것에 대한 예찬', 일종의 미니멀리즘이다. 최소한 것들만 의식적으로 선별하고, 그것에 더 중요하고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법륜 스님은 잘 늙음이 청춘보다 좋을 수 있는 이유를 단풍에 빗대어 말했다. "꽃은 떨어지면 지저분하게 변색되지만 단풍은 길을 융단같이 덮습니다. 책갈피에 넣어 쓸 수도 있고요." 단풍을 노년에 비유하면 생각이 더 풍성해진다. 가령 나이가 들수록 잔소리가 많아지는 건 경험이라는 빅데이터가 쌓여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잘될 것이고, 저렇게 하면 망할 것이라는 그 나름의 데이터 말이다. 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하는 좋은 말은 잔소리일 뿐이다. 이걸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끝까지 경청하는 것이 어렵고, 중간에 말을 자르거나 자주 노여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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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평소의 내 생각이다. 깨달음, 지혜를 얻으려면, '탐진치(貪瞋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탐진치'는 우리를 삼키는 세 가지 독이다. 탐진치는 '탐욕(貪欲)', '진에(瞋恚)', '우치(愚痴)'를 줄인 말이다. 요즈음 쓰는 말로 하면,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다.
▪ 탐욕은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을 말하며, 본능적 욕구의 경계에서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것이다. 가장 강한 독이다. 왜냐면 뒤탈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진에는 노여움, 또는 성냄, 분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부딪쳐 미워하고, 화내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뜻에 맞지 않거나 자신보다 우월한 상대에게 나타내는 증오심과 노여움, 시기심, 질투심이기도 하다.
▪ 우치는 탐욕과 진에에 가려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무식 無識)'이다.
이 '삼독(三毒)'이 살아가는데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것을 '아집'과 '무지', 두 가지로도 말할 수 있다. 아집, 나에 대한 집착과 그 집착이 일으키는 번뇌를 알지 못하는 무지를 말한다. 공부로 지혜를 키워야, 이 삼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탐진치'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계정혜 戒定慧'이다. 진, 노여움, 즉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대인관계를 줄이고, 상대의 장점을 인정하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수행이 '계(戒)/정(定)/혜(慧)'이다. 계율을 지켜 실천하는 계, 마음을 집중하고 통일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정, 미혹을 끊고 진리를 주시하는 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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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계속 연장하겠다는 욕망이 지배하면 성숙하지 않고, 오히려 '100세 인생'이 두렵다. 동안이 되고 얼굴이 예뻐지면 더 좋을 거 같지만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이 점점 커지기만 한다. 겉으로는 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외모에 집착하고 자기 성숙을 거부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생체 리듬에 맞게 자립을 하고 이제 폐경기-가을을 맞이해야 한다. 이제 가을을 맞아 열매를 맺어야 하는 시기에 들어섰는데 꽃피는 그 시절의 꽃들을 흉내 내려고 하면 부자연스럽다. 죽음을 통과하려면 내가 집착하는 게 없어야 한다.
인간의 운명은 자연에서 절대로 못 벗어난다. 자연의 '메트릭스' 안에서 사는데, 우리는 자연과 다르게 살 수 없다. 예컨대, 자연의 원리에 따라 폐경은 축복인 거다. 이제 더 이상 출산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고 인생의 한 마디가 지나간 거다. 더 이상 여성으로서 남성의 짝짓기 대상이 아니어도 되는 거다. 남성의 눈에 들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는 시기이다. 이게 바로 노년이 외모와 성적 욕구로부터 얻는 자유이다. 다시 생체리듬을 회복해야 한다. 구래서 나일가 들면, 자연스럽게 중년의 가을 준비해야 한다. 리듬을 회복하면 우리 몸이 자연스럽게 거기에 맞게 살게 해준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약을 먹고 하면 나이가 들었는데도 계속 성욕의 주체가 되어 있게 된다. 사람은 성욕으로 몸이 달아올라야 계속 소비를 한다. 자본주의의 고도의 전략이다.
자본주의 문명은 인간에게 모든 시간을 노동하지 않으면 성욕에 쓰리고 요구한다. 이렇게 되면 성적인 부분으로만 나를 증명해야 하는데 남성이 여기에 훨씬 더 약하다. 왜냐하면 남자의 폐경기는 여자보다 늦게 60대에 온다. 폐경기는 여성이 더 빨리 온다. 그래 나이가 들수록 여성의 삶이 더 윤택해지고 자유로워지는 이유이다. 성욕을 쓰려면 돈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남성들은 돈이 있어야 여자를 만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욕망만을 강요하면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갈 뿐이다. 그래 노년에게 필요한 것이 인간 본연의 생체 리듬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노후 대책이지 돈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몇 십억 벌어 놨는데 치매에 걸리면 그거 뜯어 먹겠다고 가족들이 나타나서 아귀다툼을 한다. 결국 내가 평생 일해서 모은 돈이 자식들에게 폭탄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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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고, 나이가 드는 수렴 시간 때부터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정신적 풍요로움으로 살아가는, 마음을 비우는 훈련이 공부이고 수행이다. 이렇게 공부하고 수행하며 100세를 살아야 거기서 오는 삶의 충만함을 깨달을 수 있고 이것이 바로 그 나이의 지혜가 되는 거다. 그리고 늘고 병드는 게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병이 좀 있어야 몸을 조절하고 조심한다. 즉 쓸데없는 욕심을 안 부리게 된다. 그게 지혜이다. 지혜는 뭘 많이 가지는 게 아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젊은이와 소통하지 못한다. 그저 윽박지른다. "나는 이렇게 성공했는데 너희는 왜 못해?"라면서 말이다. 자기 의도와 어긋나는 것을 잘 용서하지 못한다.
우리가 늙고 약해지며, 병들며 겪는 81난이 우리들의 '탐진치', '3독'을 조절해준다. '조절'하면 조심하는 거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건 무게가 아니라, 균형이다. 일상의 균형이 무너지면 중심을 잃고, 사는 게 힘들어진다. 다음의 세 가지 '조(調)'가 몸의 균형을 만들어 준다. 조신(操身), 조식(操息), 조심(操心)이 아니라,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이다. 몸을 고르는 것이고, 숨을 고르고, 마음을 고르는 것이다. 특히 조심(調心)은 마음을 모으는 것으로, 마음이 모이는 곳에 기(氣)가 모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기가 흐트러진다. 그리고 조식, 호흡을 놓치지 않으려는 정성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정성스러움과 욕심은 다르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항공사에도 탑재물을 관리하는 '로드마스터'라는 직업이 있다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 역시 균형과 배치이다. 화물마다 무게와 부피가 달라서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중심을 찾는 것이 이 일의 핵심이다. 비행기가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갑작스러운 기류 변화와 흔들림 속에서 잘 견딜 수 있는 핵심은 균형과 무게 중심이기 때문이다. '3독'을 해독하려면, '3조(調)'를 수행해야 한다. 조심(操心)하는 것보다 조절(調節)하는 거다.
가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다르 형식으로 다른 생명의 리듬에 참여할 수 있다. 내가 살아가면서 했던 행동과 말과 생각 등 이 정보들은 우주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것들과 섞여서 변이될 뿐이다. 그냥 생각만 한 것도 다 남아 있다. 정보 자체는 해체된다. 우리 몸이 해체되니까. 하지만 본질은 이 우주 안에서 계속 운행을 한다. 그게 동아시아 철학에서 말하는 죽음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서 쉬는 시간이다. 죽음의 걱정으로 부터도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면 몸의 해방이 시작된다. 이 해방 끝에 오는 새로운 시간 이야기는 다음 주로 넘긴다. 끝으로 우화처럼 읽히는 박노해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삶의 나이/박노해
어느 가을 아침 아잔 소리 울릴 때
악세히르 마을로 들어가는 묘지 앞에
한 나그네가 서 있었다
묘비에는 3.5.8...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에 돌림병이나 큰 재난이 있어
어린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구나 싶어
나그네는 급히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때 마을 모스크에서 기도를 마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 않는다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오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 있고 사랑을 하고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이렇게 묘비에 새겨 준다오
여기 묘비의 숫자가 참 삶의 나이라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