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관계와 활동으로 다른 곳에 접속을 하며 영토를 확장해 가며 차이를 생성해 나가는 것이다.

328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24일)
1
어제는 프랑스에서 유학한 옛 동료들과 <프랑스어교육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정기총회와 황산벌에서 있었다. 그래 <인문 일지> 주일 아침에 쓴다. 다들 은퇴했지만, 각별한 모임이었다. 특히 우리를 초대한 한상헌 교수님의 정성과 그분의 일상이 담겨진 정돈된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황산벌은 논산시 연산면 산양리 일대이다. 영험한 계룡산 줄기가 연이어 둘러싸고 있다 하여 연산(連山)이라 부른다.
황산벌 전투를 좀 그려본다. 김유신은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 사비성(현재 부여)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지금 추정하는 것으로는 남천정(지금의 이천)까지 무열왕을 수행한 김유신은 다시 남하하여 삼년산성(지금의 보은)을 경유하여 지금의 옥천-대전-두마 지역을 거쳐 백제의 심장부로 들어갔을 것으로 본다. 백제의 최후 방어 요충지라 할 수 있었던 탄현은 대략 지금의 대전과 옥천의 경계에 있는 마도령(馬道嶺)으로 본다. 다행히 별다른 충돌 없이 탄현을 지난 신라군은 황산벌에 도착하였다. 이 황산벌이 어제 모임을 하였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와 신암리 일대의 너른 들판이라고 본다.
황산벌은 동쪽으로 천호산이 자리 잡고 있고, 서쪽으로는 계룡산의 험준한 산세가 길게 뻗어 있어 좁은 협곡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사비성(현재 부여)까지 너른 벌판이 이어지기 때문에 탄현을 넘은 신라군을 소수의 군대로 맞아 싸우기에 그나마 적절한 요충지라 할 수 있다, 황산벌에서 계백은 비록 군사는 적지만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군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눠 거듭 네 번을 싸웠으나, 백제군의 결사적 항전에 오히려 매번 패퇴하고 전세가 불리 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유신 동생으로서 부사령관을 맡고 있던 흠순 장군이 아들 반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이에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뒤이어 좌 장군 품일의 아들 관창이 역시 여러 차례 적진에 돌입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였다.
탄현을 지키지 못한 의자왕은 계백(階伯) 장군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했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 장군은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 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영화 <황산벌>에서 남편의 칼에 죽음을 맞기 전, 계백 장군의 부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 나도 내 이름에 나의 목숨을 걸 수 있을까?
2
나는 와인 문화에 대해 짧은 글을 발표하였다. 그 자리에서 와인 마시기는 '물불 가리지 않기'라는 이야기를 했다. 술이란 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여러 주장이 있다. "술술 잘 넘어간다고 해서 술이다", "술시(戌時, 19시-21시)에 마시면 맛있다" 등이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술’이란 말에서 우리 훌륭한 ‘네이밍(naming, 이름 짓기) 기술을 지닌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술은 원래 ‘물모양을 가진 불의 성격의 물체’를 뜻하는 ‘수불’에서 시작 되어, “수불”, “수불”하다가 간단하게 ‘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술은 물과 불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술은 물과 불의 경계를 가르지 않는다. 술은 그래 우리를 경계에 서게 하는 거다. 물 같은 것과 불 같은 것의 경계에서 물불을 못 가르는 거다. 물불 가리지 않는 거다. 그 경계에 있지 못하고 물에 있거나 불에 있거나 하면, '물불 가리는 거'다. ‘물과 불’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거나 맞서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불’은 비유적으로 어려움이나 위험을 이르기도 한다.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위험이나 곤란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 하다”라는 뜻이다. '어떤 어려움이 위험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고 강행 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사실 불 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협심하여 어떤 일을 거침없이 밀어붙일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빠뜨릴 수도 있다. 또한 물 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서로 배려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상대에 의지하는 데 익숙한 나머지 촌각을 다투는 결정 앞에서 머뭇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물과 불이 함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잠자고 있던 열정을 달구기 위해,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은 불을, 불은 물을 부단히 만나야 하지 않을까? 이 만남은 세상에 나와 다른 성질을 지닌 사람이 존재함을 깨닫는 과정이자 그와 어떻게 하면 어울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열과 증발과 소화(消火)를 오가는 동안 물이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불이 재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 또한 물불 가리지 않았기에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풍경이 될 것이다.
나는 오은 시인이 자신의 글에서 말했던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 했던 다음과 같은 풀이에 동의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술 마시기'는
- 당장은 맞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을 경험 해 보기이고,
-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닌 그 상황에 걸맞은 것을 찾아 보기이며,
- 회피의 자리에 직면을, ‘어쩔 수 없이’의 자리에 ‘기꺼이’를 배치하기라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물은 물끼리 어울리고 불은 불과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우물이나 불길에 자신을 가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편한 상태에 길드는 일은 관성에 젖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물이 깊다고, 불길이 뜨겁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다. 다른 우물에는 무엇이 있는지, 불길 밖의 온도는 어떤 지 헤아리지 않으면 자신이 몸담은 세계가 전부인 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물불 안 가리고' 경계에 서는 것이 '술을 만나는' 일이라 본다. 그러나 물속에 불이 있으니 절제는 당연한 일이다. 아니면, 불에 다 탈 수도 있으니 말이다.
3
여기서 다양성이 나온다. 다양성의 무질서해 보여, 불편하지만 그 속에는 잠재적인 커다란 힘, 즉 "괴력"이 있다. 서로 다른 것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독재 정권 하에서 고도의 압축 성장을 이룩하며 효율성과 획일성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다 보니 ‘다름’이 곧 ‘틀림’으로 간주되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홍세화가 한국에 소개한 프랑스 '똘레랑스' 개념은 사람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인들이 신봉하는 가치는 ‘톨레랑스’ 보다는 다양성, 프랑스 말로 ‘디베르시테(diversite)’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뗄 라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똘레랑스’는 어디까지나 ‘디베르시테(다양성)’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톨레랑스’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 같다. 다양한 배경과 사상과 아이디어를 수용하기 위해서는(디베시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톨레랑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 사회를 위해서는 '똘레랑스'가 전제 되어야 한다. 아니면 획일성의 노예가 된다. 생각을 하기 보다 다른 이들의 생각에 휩쓸린다. 그러나 ‘톨레랑스’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특정 사안들, 가령 나치 추종과 인종차별, 헙범 파괴, 폭력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앵톨레랑스(intolerance)’, 즉 '불관용'을 단호하게 견지한다. 즉 상위의 목표인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에는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논리가 촘촘해, 잘 이해를 해야 한다. '불관용(엥똘레랑스)도 단호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불관용 해야 할 것들이 여럿 있다. 그런 차원에서 지난 밤 서부지법 폭동은 우리 사회의 헌정질서와 법치주의에 대한 파괴 행위이다. 이런 극우 반국가세력이 더이상 오판하지 않도록 본보기로 철저하게 불관용 정신으로 처벌하여야 한다.
이런 생각 속에서, 어제 프랑스에서 인문 지리를 공부하신 선생님의 발표, <지리적 배경이 받쳐주는 다양성의 괴력>에서 "점이지대(漸移地帶)"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점이지대"는 두 개 이상의 지역이나 특성이 서로 겹치거나 섞여서 나타나는 지역을 의미합니다. 즉, 한 지역이 다른 지역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특성을 갖거나, 서로 다른 특성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곳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한 지역이 도시와 농촌의 특성이 혼합된 곳, 또는 서로 다른 문화권이 만나는 곳 등이 점이지대에 해당할 수 있다. 이 특성에는 문화, 인종, 언어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니까 점이지대는 주변 지역의 특성이 서로 맞물려 새로운 문화가 발달할 수 있다. 이 특성이 수십년간 전통적으로 발달하게 되면 주변과 전혀 다른 특성이 만들어져 특성이 구별되는 경우도 생긴다.

4
그리고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끝과 시작>이라는 시를 읽었다. "내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에 화해를 청합니다."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언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그녀는 자신의 미완성 유작이 될 마지막 원고에 <<충분하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 유언을 소환하며, 그 시가 읽히는 동안 나는 내 감정에 쌓였던 여러 가지 일들과 화해를 했다. 시인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모름'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독재자들, 광신자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정치가들의 공통점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 지식은 세상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한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모르고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구원할 정신이라고 시인은 본다. 겸손이야말로 쉼보르스카의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 어쨌든 시인 쉼보르스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선택의 가능성/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중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 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 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5
흥미로운 두 개의 발표가 더 있었다. 엘렌 식수라는 작가와 한국에서 순교하신 장-앙투안 푸르띠에 신부(1830-1866)의 서한집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의 과제이다. 매주 토일에는 <인문 일지>에서 "호모 헌드레드 시대(100세 시댸), '꼰대'에서 '꽃대'라는 이름으로 '나이 듦'에 대한 문제를 사유해 보기로 했는데, 내일 <인문 일지>로 넘겨야겠다.
산다는 것은 관계와 활동으로 다른 곳에 접속을 하며 영토를 확장해 가며 차이를 생성해 나가는 것이라는 평소의 철학이 실천된 하루였다. 다음이 내 지론이다. 생명은 근원적으로 '활동'과 '네트워크'를 좋아한다. 즉 '활동'과 "관계'가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소유와 성공, 곧 돈과 물질에 관련된 것만 매달리면 꼭 막히게 되고, 끝에서는 허무할 뿐이다. 살맛이 나려면, 어떤 활동을 하고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다. 계속 어딘가로, 누군 가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길 위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할 때 그걸 연결해 주는 건 지성밖에 없다. 사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교환관계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지성을 통해 누군가와 친해지면 그 공간이 바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 온다. 그 일상 속에서 소유보다는 사람, 즉 존재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서로의 생각이 접속을 한다. 이런 접속을 통해 가치가 생성된다.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지, 유에서 유가 나오는 것은 유통기한이 아주 짧다. 돈 놓고 돈 먹는 것은 굉장히 유용하고 효율적이지만, 그건 순식간에 다 거덜나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는 무에서 유가 나와야 가치가 되는 거다. 원래 보이지 않는 지혜에서 물질이 나온다. 예를 들면 디지털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정보가 온갖 더 한다. 이 무형의 자산 없이는 물질만 갖고 돌려 막기를 할 수 없다. 정신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을 때는 설령 망해도 그 다음에 이 실패에서 뭔가 배우고 도약할 수 있는 베이스를 갖게 된다. 그런 사람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우리는 일상에서 활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접속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폐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들과 접속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감각의 차이만 만들어 낸다. 차이의 생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고 의미가 된다. 반대로 감각만이 늘어나는 게 중독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