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내 리듬으로 살아가리라.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5. 17. 17:25

327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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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읽다가 만난 문장이다. "여경(餘慶)" "여앙(餘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선(善)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선하지 못함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재앙이 있으니, 신하가 그 인군을 죽이고 자식이 그 아버지를 죽임이 하루아침 하루저녁의 연고가 아니다. 그 유래한 바가 '차츰차츰함'이니, 분별할 것을 일찍 분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역에 이르길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라고 하니 대개 순함을 말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積善之家는 必有餘慶하고 積不善之家는 必有餘殃하나니 臣弑其君하며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라. 其所由來者 漸矣니 由辨之不早辨也니 易曰 履霜堅冰至라하니 蓋言順也라."

‘여경(餘慶)’과 ‘여앙(餘殃)’을 남는 경사, 남는 재앙이라고 하여 ‘경사가 남아 넘쳐 난다'라고 하거나 ‘재앙이 남아 넘쳐난다.’ 등으로 읽는다. 그러나 ‘여경(餘慶)’이란 단순히 경사가 남아돌아 넘친다는 소리가 아니라 ‘내 당대의 경사 뿐만이 아니라 자식 대에까지 경사가 미친다’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경사가 후대에까지 이른다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잘 살 일이다.

<중지 곤> 괘의 초효의 효사가 "履霜(이상)하면 堅冰(견빙)이 至(지)하나니라" 이다.  곤(坤)은 땅의 형세라 하였다. 지구가 공전하면서 나타나는 계절변화, 즉 춘하추동 사시에 있어 음기(陰氣)가 응결되는 자연현상이 서리(霜)이다. 맨 아래에서 음기인 서리가 엉기니, 그 서리를 밟아 가면 굳은 얼음이 된다. 

이 말은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머뭇거리며, 주저하며 살아가라는 거다. 왜 인간 안에는 성(聖)과 속(俗)이 공존한다. 군자와 속인이 정해진 신분이 아니라, 내 안에 두 객체가 모두 함께 담겨 있다. 그런 군자인 듯 행동하다가 때로 소인의 행실이 나오기도 하고 소인처럼 행동하다 가도 때로 군자다운 행실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때로 선인으로, 때로 악인으로 살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니 인간은 슬픈 존재이다. 그 슬픔을 아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예수는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말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걷는 이의 발걸음은 흔들림은 있을지언정 방향을 잃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의 '팔복'을 길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에 든든한 지주를 세우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눈이 열린 이들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는다. 그 길로 삼은 나는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채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해 벗삼아 살아 간다. 얼 바람 맞은 사람처럼 겅중거리며 사는 이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2
다음 팔복 중, 슬퍼하는 자의 복은 두 번 째이다. 늘 기억해야 할 8 가지이다.

▪ 제1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는 거다. 그리고 지연의 흐름에 맡기면서 무위(無爲)적 삶을 사는 거다. 마음이 가난 하려는 것은 존재 자세의 문제이다. 초조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그 일 자체로 돌아가 즐기며 몰입하고 전념하는 하는 거다.
▪ 제2복: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프면 슬퍼하라. 아픔이나 고통을 피하지 마라. 어려움을 피하지 마라. 일살에서 일어나 생로병사에 두려워 마라.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다.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 한다. 슬픔의 끝에는 반드시 위로가 있고, 힘을 얻는다. 그래 사람들은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 제3복: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 하라. 성격, 태도가 부드러운 거다. 그 말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는 거다. 내려놓음에서 나온다. 그건 나를 비우고 도에 맡기는 거다.
▪ 제 4복인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의 문제는 '의(義)'로, '정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맹자 식으로 말하면,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그 반대로 의로운 사람은 그 자체로 흡족하다. 그 반대가 찝찝함이다. 양심이 다 말해준다. 
▪ 제 5복인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의 문제는 '인(仁)', 즉 자비, 아니 사랑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 제 6복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의 문제는 '예(禮), 예절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 제 7복인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의 문제는 지(智), 지혜의 이야기, 
▪ 마지막으로 제 8복인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의 문제는 신(信), 믿음의 이야기라 볼 수 있다.

3
일상에서 주저함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과 불선 말이다. 김기석 목사가 자신의 칼럼, <자기도취에서 벗어나기>에서 한 다음 말을 잘 새길 생각이다. "가끔 내게 존경심을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그 마음을 고맙게 받지만 돌아서는 순간 나 자신에게 말한다. “너 알지. 네 실상을.” 존경받을 만한 것이 내게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해도 우리 속에는 언제든 발화될 수 있는 악의 가능성이 있다. 거칠고 메마른 사막에 비가 내리자 모래 속에 숨어 때를 기다리던 씨앗들이 일제히 발아해 꽃이 피어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지금 우리가 다소 선한 것처럼 보인다면 악이 발화할 계기가 미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에 늘 조심스럽다." 나를 뒤돌아 본다. 내 리듬으로 살아가리라.

그러나 나를 지키는 싸움은 쉽지 않다. 왜?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잘 싸우는 방법은 '싸움의 타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와 갈등을 빚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존재 전체'와 싸운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특정한 생각과 싸우는 것이다. 사람을 싫어할 때도 사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싫어할 순 없다.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장을 싫어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갈등에 대처하기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실제로 적은 내 안에 있다. '나는 결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나르시시즘에서 나온다. 나는 그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없다." "I'm nothing." 사실 나는 싸울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처럼, 원하는 것이 별로 없고, 적으니, 두렵지 않고, 자유롭다. 그래 나는 류시화 시인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그런 사람/류시화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는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이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을 찾아서
지상의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고요 잃지 않는 사람
마른 입술은
물이 보내는 소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 

4
우리들의 삶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 분잡에 휩쓸리다 보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스러지고 살아남기 위한 맹목적 앙버팀만 남는다. 숨은 가빠지고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서슴없는 언행과 뻔뻔한 태도가 당당함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전장으로 변한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법, 종교의 영역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가 있다면 ‘머뭇거림’이 아닐까? '머뭇거림'은 다음을 내포한다.
•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는 겸허함, 
•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

모든 틈은 깨진 상처인 동시에 빛이 스며드는 통로인 것처럼, 머뭇거림은 우유부단(優柔不斷) 함처럼 보이지만 나와 타자가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머뭇거림이 사람을 자기 초월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세상의 어떤 이론도 지혜도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에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만 근사치일 뿐이다. ‘알 수 없음’이야말로 생명의 실상이다. 여기서 경외가 시작된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결국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허세 부리려는 욕구에서 해방된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평화가 시작된다.

5
이런 이야기들을 말하면 사람들은 비웃는다. 재미없다고, 그리고 글이 길다고. 원래 노자도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말할 수 없다." <<도덕경>> 제41장에 나오는 말이다. 

上士聞道(상사문도) 勤而行之(근이행지): 훌륭한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동에 옮기고
中士聞道(중사문도) 若存若亡(약존약망): 중간치기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며 의심하고, 
下士聞道(하사문도) 大笑之(대소지): 하류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不笑 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 : 하류 사람들이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각자 자신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그 구속을 풀어야 '도'를 알고, 자유로울 수 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하면 믿지 못하는 것은 장소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비에게 겨울철의 눈보라를 말하면 믿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구속 때문이다. 극히 편향된 지식인에게 도를 말하면 비웃는 것은 가르침의 구속 때문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는 것은 귀의 구속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은 눈의 구속 때문이다. 닫고 싶은 것만 담으려 하는 것은 마음의 구속 때문이다.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에, 진리는 역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상적 상식인으로서 이렇게 한 가지 사물이 정반대되는 두 특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식적인 이분법의 단선적인 사고 방식에 지배 받고 사는 우리로 서는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소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크게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했다. 정확한 통찰이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이 아니라는 뜻이고, 역설적이 아닌 것은 궁극 진리가 아닌 것이다. 궁극 진리는 언제나 일상적 의식을 근거로 한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 지기들은 일언지하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그럴까 안 그럴까 반신반의하는 "방법적 회의"(데카르트)를 하며 의심한다. 여기서 또 한 단계에 더 올라서서 사물을 변증법적, 역설적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리 자체에 아무런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열심히 따르고 실천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오늘 사진의 나무는 새순이 나비 같다. 이게 커서 단풍나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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