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늘 균형을 찾는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10일)
오늘은 오랜만에 다시 <<도덕경>> 읽기를 한다. 제25장을 읽을 차례이다. 원문과 번역은 블로그에서 공유한다. 이 장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이란 말을 좋아한다. 이미 여러 번 <인문 일기>에서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풀이한다. 인간은 땅을 따라야 한다. 땅이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지법천(地法天)이다. 땅은 하늘을 따라야 한다. 땅에 하늘이 없으면 못산다. 그 다음은 천법도(天法道)이다. 하늘은 도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도는 자연을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따르는 것이 도이다. 사회 속에서 이렇게 살기 쉽지 않지만, 나 스스로의 생각과 원칙을 따라 사는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여기서 자연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억지로 지어낸 행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것", 즉 무위성(無爲性)을 자연이라 한 것이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면 된다. 마음을 가리면 꼬인다."(채은경) 아침에 페북에서 만난 '도법자연'을 설명하는 멋진 문장이다.
자연은 늘 균형을 찾는다. 자연이 도의 모습이다. 여기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그러니까 도는 "스스로 그러함"이다. <<도덕경>> 1장에서 도에 관한 총론을 언급한 이 후 노자는 다양한 변주를 통해 도의 속성과 원리를 언급한 바 있다. 이 장에서는 도의 실체와 속성, 원리를 보다 더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올 김용옥은 이 장이 <<도덕경>> 전체 텍스트를 통하여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장으로서 노자라는 사상가의 전체 논리체계를 가장 체계적으로 압축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배열이 아주 치밀하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제25장은 노자의 우주발생론, 세계관, 인생론의 대강을 압축시킨 장이다. 우선 한 구절 씩 정밀 독해를 해 본다.
1)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유물혼성, 선천지생. 적혜요혜, 독립불개, 주행이불태가이위천하모 오부지기명.)
도올 김용옥의 해석을 옮겨 본다. "혼돈되어 이루어진 것이 있었으니/하늘과 땅보다 앞서 생겼다./적막하도다! 쓸쓸하도다!/홀로 서있지만 함부로 변하지 않는다./가지 아니하는 데가 없으면서 위태롭지 아니하니/거히 천하의 어미로 삼을 만하네. 나는 그 이름을 알 길 없어." 이를 좀 풀어 보면, 도는 실체가 있으며 다양한 성분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각 성분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뒤엉켜 있어 각각의 실체를 개별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빅뱅 직전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하나의 점으로 농축되어 있던 상태와 같다고 하겠다. 시간적으로 도는 천지보다 먼저 있었으며 지극히 적막하고 고요한 상태라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 절대적으로 독립된 실체라 늘 혼자이지만 그를 위협하는 별도의 사물들이 없기 때문에 항구적으로 안전한 지위를 갖는다. 그로부터 만물이 탄생했기 때문에 만물의 어머니이지만 딱히 정해진 이름은 없다.
• "有物混成, 先天地生(유물 혼성, 선천지생)"
이 구절에서 "유물"은 문자 그대로 "~것이 있다"는 뜻으로 본다. 도올은 "물(物)"이라는 것은 물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천지대자연의 모든 '이벤트(event)'를 의미하기 때문에 "것"이라 번역했다고 했다. 그런데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혼성(混成)"된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혼성"은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여러 가지가 섞이어 그 형체를 분간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본다. 그런데 혼성의 '혼'은 '혼돈(混沌)'의 의미로도 쓰인다. 장자의 "혼돈"은 우주 발생론과 깊은 연관을 갖는 개념이라 했다. 장자에게서 혼돈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은 바로 "기(氣)"이다. 모든 것이 분별되어 질서를 부여 받기 이전의 상태를 혼돈으로 규정하고, 거기서부터 만물이 발생되어 나오고, 그런 다음 어떤 요인에 의해 질서를 가지게 된다는 식의 우주 발생론 모델이다.
<<장자>> "내편" 마지막 장의 "혼돈칠규(混沌七竅)"가 기억난다. "남쪽 바다의 임금을 '숙"이라고 하고, 북쪽 바다의 임금을 '홀'이라 하였고, 그 중앙의 임금을 '혼돈'이라 하였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 때마다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을까 의논했다. "사람에게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런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 줍시다" 했다. 하루에 한 구멍 씩 7구멍을 뚫어 주었는데, 그만 7일이 되어 혼돈은 죽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혼돈의 세계는 우리의 감각적 분병인식을 벗어나는 그 이전의 무분별, 그러니까 무형(無形), 무명(無名)의 세계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제1장에서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라는 것을 우리는 읽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시초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근원이다'. 그리고 제21장에서의 "道之爲物(도지위물) 惟恍惟惚(유황유홀)"에서 만물의 시작인 "중보(衆甫, 만물의 근원)"를 접한 바 있다. 이렇게 도 자체는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무엇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형상, 질료, 속알 등이 서로 어울려 세상의 모든 것이 생겨나게 하고, 이런 뜻에서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시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自古及今(자고급금) 其名不去(기명불거), 以閱衆甫(이열 )." '예로부터 이제까지 그 이름이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로써 만물의 근원을 엿볼 수 있다'는 거다. 이런 도가 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작용하고 있고, 한시도 그 작용을 쉰 적이 없다는 거다. 지금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아니 우리 자신도 모두 도의 덕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거다. 우리에게 만물의 깊이를 꿰뚫어볼 수 있는 형안만 있다면, 지금도 순간순간 작용하고 있는 도, 만물의 시원이며, 우리 존재의 근거인 도를 알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보(衆甫)"의 '보'에는 '시(始)'의 뜻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황홀한 도를 체험할 때, 우리는 만물의 원초적 모습, 도의 최초의 모습을 알고 싶어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항상 근원을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만물의 처음, 만물의 근원을 알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以此(이차)" '이것으로 알 수 있잖아!'이다. 즉 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도'라는 거다. 이 세계의 모습이 바로 도의 모습이라는 거다. 이는 내가 좋아하는 '거피취차(去彼取此)'의 재선포라고 도올은 말한다.
요즈음 카오스 이론에 의하면, 카오스 속에도 엄연한 코스모스가 들어 있다. 그러니 '것'이 있는 데, 그 '것'이 혼성된 것이다. 우리의 감각에 분별적으로 잡히지 않는 무형, 무명의 것이다. 그 무형의 혼성의 '것'은 하늘과 땅보다도 먼저 생겨났다는 거다. 따라서 "有物混成, 先天地生(유물 혼성, 선천지생)"에서 "유물혼성", 즉 '혼성된 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생"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혼성된' 그것의 생명적 우주의 프로세스(process, 과정)의 한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혼성된 것, 혼돈의 그것은 무엇보다도 천지(天地)보다 먼저 생겨났다는 거다. 여기서 천지는 하나의 단일 개념, 건(乾)과 곤(坤), 양과 음, 혼(魂)과 백(魄), 신(神)과 정(精), 기(氣), 혈(血), 시간과 공간, 남성과 여성, 강강과 유약 등의 생성의 양면을 나타내고 있는 상징체계로 읽어야 한다고 도올은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자가 말하는 혼성된 것(카오스)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내에서 생육하는, 사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서 "생"을 '낳다' 또는 '발생시킨다'고 읽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노자의 세계관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로부터의 창조'는 허용되지 않는다. '무형으로부터 유형으로의 생성'이 있을 뿐이다. 도올은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쌍방적 전이'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최진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도는 이 세계가 반대되는 두 대립항이 서로의 존재 근거를 나누어 가지면서 꼬여 있음을 말하는 범주이다. 따라서 도는 이 세계의 순수 단일성이나 일원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서로 관계 속에 잡종처럼 얽혀 있음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혼성(카오스)라는 거다. 그러므로 카오스 상태에서 질서의 상태로, 무형질의 상태에서 유형질의 상태로의 이행 과정으로 노자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 최 교수는 강조한다.
글이 길어지어, 여기서 멈춘다. 이어지는 제25장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그리고 나는 지난 1월에 오늘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다가 다음과 같은 카오스 이야기를 <인문 일기>에 썼던 적이 있다. 오늘 다시 한 번 더 공유한다. 이 이야기는 블로그로 옮긴다.
혼란스런 마음에, 서울 강의를 마치고 서울 인사동을 걷다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분원까지 갔다. 세상은 아무 말도 없다. 다만 그대로 돌아간다. 마음을 굶기니, 이젠 아무데나 나를 끼워 넣을 것 같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사유하며 그림자로 살 생각이다.
공복의 기쁨/강신애
나는 즐겨 굶네
아니 굶는 것이 아니라
조개가 뱃속의 모래를 뱉듯
내 속의 더러운 것들
조금씩 토해놓네
내 몸은 서표(書標)처럼 얇아져
어느 물결 갈피에나 쉽게 끼워지네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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