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람들이 자유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 질적 차이가 있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5. 7. 08:32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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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7일)

디폴트 모드 네크워크는 신경과학에서 어떤 자극에 집중하거나 과제를 수행하는 등의 활동을 하지 않고 쉴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을 말한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절대 코마 상태의 체험이 아니다. 메리 헬렌 미모디노-양(Mary Helen Immordino-Yang)이 수행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에 관한 연구 보고는 우리가 어떤 사물에 관심을 보일 때 특정한 방식의 신경 처리 과정이 억제되는데, 뇌가 디폴크 모드 네트워크로 전환하면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제 말한 몽상 상태에서 뇌는 기억을 저장하며 자아를 형성한다는 거다. 우리가 멍하니 있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작동하여 기억 저장이나 창의력, 개인적 의미 구축 같은 분주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거다. 우리의 뇌는 자유롭게 방황할 수 있다. 뇌는 자유롭게 놓아둘 때 고도로 집중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

홀로 있는 상황과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면, 마음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로 이동하고, 처음에는 완전히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연결 관계를 검색한다. 그것을 우리로서는 절대 수용하지 못할 호기심과 개방성을 가지고 문제를 탐색한다. 하지만 이 무작위성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방화하는 마음이 가진 힘은 아무 것도 검열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나온다. 그것은 다른 상황에서는 절대로 생각하지 못할 연결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몽상은 그것을 꾸는 사람에게 기발한 새 선택지를 주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창조적인 처리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분석적 사고, 논리적 사고는 몽상이 빠지는 마음이 시도할 수도 있는 엉뚱하거나 비대중적인 아이디어를  언제나 침묵시킨다. 분석적 사고는 잘 규정된 문제에서 선택지를 저울질하는 데 적합하다. 몽상에 빠진 마음이 가질 수 있는 사물 연결 능력이 사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는 유일한 길이라 말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이작 뉴턴이다.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뒤, 거의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혼자 연구에 전념하다가, 1665년에 페스트가 퍼지자, 그는 외딴 농장으로 피신하였다 한다. 아마 그 재앙이 낳은 유일하게 긍정적인 결과라 평가한다. 그는 대학 공동체와 강제로 격리된 그곳에서 운동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던 것이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왜 그런지 의문을 느낀 것은 강의실이 아니라, 그곳 정원에서 였다.

나의 경우는 이른 새벽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인문 일지>가 잘 써진다. 세상이 소란을 내게 쏟아 붇기 전에 말이다. 혹은 샤워를 하거나 혼자 커피숍에서 밖을 바라보는 동안 새로운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 사실 우리의 생활 모드가 우리들을 공허감에 빠지게 하는 것은, 우리가 혼자 알아서 감당하지 못하고, 심사숙고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방황하는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의미와 행복의 감각을 빼앗겼다. 창밖으로 하늘을 오래 응시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통합하는 열쇠가 될 수 있는 데 말이다.

버클리 대 심리학과 교수인 엘리슨 고프닉에 의하면, "'아하'의 순간"(오르파 윈프리식의 용어, 유레카의 순간)에서 얻는 쾌감의 파도는 사유하는 마음을 위한 오르가슴과 같다"고 주장했다. 오르가슴의 쾌감이란 결국 우리 몸이 생식하도록 하기 위해 채택한 동기부여의 잔재주일 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아하'의 쾌감(새로운 연결이 생성되는 순간 쾌감)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주려고 DNA 속에 새겨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마이클 해리스의 <<잠깐 혼자 있겠습니다>> 읽고 있다. 저자의 "마음 방랑" 훈련을 엿본다. 그에 의하면, 멍하니 있는 시간이 있고 그런 다음 '몽상'이 시작된다고 한다. 미친 듯 날뛰거나 산만한 마음을 대충 '방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마음이 새로운 통찰력을 만들어 내기를 기대하려면 공백 시간이라는 사치가 필요하다는 거다. 제대로 방랑하려면 목줄을 느슨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그가 하는 방법은 산책이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햇볕이 내리쬐는 교정을 가로질러 걷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디지털 신호를 침묵시켜 세상사에서 손을 놓는다. 그러니까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고 뭔가 중요한 일이 생각나면 공책과 펜을 이용한다고 했다. 그런 경우 목적지도 없고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 오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그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라고는 오로지 생각 그 자체 뿐이게 한다. 그때 그는 자신의 마음이 조종간을 잡도록 내버려 두고, 그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마음과 그 생각에 빠지지 말자고 걱정하고 불안해 한다. 그러나 그 불안한 에너지가 다 소진되면, 뇌가 등장하여 새로운 상자를 뒤지기 시작한다는 거다. 프로이트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다. "행복한 인간이 아니라, 불만이 있는 사람만이 환상을 품을 수 있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뭔가 부족한 점이 없다면,  아무도 '적나라한' 현실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와 화가들의 발명은 불만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세계와 우리 내면의 세계 사이의 불일치는 두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를 지으라고 말한다.  완벽하게 행복한 예술가는 실패작일 것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평화와 고요함을 가져야만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게을러질 수 있고, 길거리 모퉁이에서 빈둥대고 생각의 물줄기가 개울로 빠지더라도 내버려 두게 된다. 수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몽상의 상태에 도달하려면, 혼자 고립된 권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예가 릴케의 다음 말이다. "너의 홀로 있음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것이 너에게 주는 고통을 담아 노래하라." 카프카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쓰기는 철저한 고립이고, 나만의 차가운 심연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홀로 하는 산책에서 제멋대로 한 생각들은 어떤 원초적 원소의 웅덩이 들어 있는 엉성한 유전적 조각들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거기서 가져온, 단백질 크기의 개념들을 조합하고 변형하여 내 마음에 더 적합한 생각들로 발전한다는 거다.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곳은 우리만의 정신적 작업장이다. 그런 곳이 없다면, 타인들의 아이디어를 조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몽상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오로지 앵무새, 더 심하게는 컴퓨터에 불과하다. 몽상은 신세계의 에너지이다.

몽상은 금방 잊어버려 언어로 적어 둘 수 없었던 뇌 부스러기의 수백 가지 조각일 뿐이라도,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통로이고, 새로운 네트워크이고, 나 자신의 숨겨진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의 새 패턴이 된다. 이건 데카르트적 마음 이론과는 다르다.  데카르트적 마음에서는 나의 자아이며 합리적이고 합목적적이고, 뇌의 조타수인 작은 인간이 숭고한 결론을 향해 나를 인도한다. 반면 몽상의 뇌는 그것이 어디에 도달하든 말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치이자 가치일 수 있다.

그러니까 몽상이 '유레카의 순간'이 되게 하려면, 짜증스럽게도 훈련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자유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 질적 차이가 있다. "여가의 현명한 사용은 문명과 교육의 산물"(릴케)이라는 거다. 세바스티안 드 그라치아라는 작가는, 더 나아가, "'여분의'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은 문명의 산물이 아니라, 문명의 성공을 재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했다. 그의 말을 공유한다. "아마 어떤 나라의 내적 건강을 판단하는 척도는 그곳 주민들이 어느 정도까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좋은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드러누워 생각에 잠기고 목적 없이 돌아다니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것 등.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생각이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둘 수 있고 혼자 평화롭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몽상은 문맹률과 함께 삶의 질 지표 항목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분주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빈곤해 보이고, 굶주린 모습을 띠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효율성, 성취에 대한 끊임없는 증거를 갈망한다. 그리고 아마 이런 증거를 향한 갈망, 번쩍이는 외적 증명에 대한 갈망 때문에 홀로 있음은 그것으로부터 얻어갈 것이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취약해 질 것이다.

1박 2일의 동해 여행을 잘 다녀 왔다. 오늘 사진은 여행 중에 만난 제비이다. 여행 내내, 비가 오고 날씨가 흐렸지만, 그게 내 여행을 방해하지는 안 했다. 인문 운동가는 문제가 있어서 패러다임이 붕괴된 상황을 두고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이런 위기가 닥쳤을 때 더 이상 붕괴하지 않는 더 튼튼한 시스템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건너 가기'를 감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제로 베이스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위기가 기회로 작동되게 하려면, 우선 현 상황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고 판단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판단 중지'라고 한다. 이를 나는 '멍 때리기'라고 표현한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멍 때릴 필요가 있다는 거다. '멍 때리기'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판단 중지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니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자기 방어 기재로 쓰는 거다. 자기만의 진공 상태를 만드는 거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에, 노아의 방주처럼 진공의 배를 만드는 거다. 멍하다는 말은 외국어로 번역이 안된다. 그게 이 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마침 마침 마이클 해리스의 책을 읽으며, 많은 통찰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고, 내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고 싶기도 했다.

멍 때리기 대회/최승호

멍 때리기 대회가
2014년
서울광장에서 처음 열렸다

나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뇌에 수북한 생각들을 거북털처럼 쏟아놓고
멍게나 해삼처럼 단순해진 뇌를
멍하게
멍청하게
광장에 내버려두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멍하니 멍청하게 산다는 것은
멍게와 해삼에게나 가능한 일


멍청해지려고
우리는 무척이나 애를 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