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은 고통 없이, 걱정 없이 순탄하게 오진 않는다.

326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3일)
어제, 오늘 그리 내일 3일동안 동네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성문화축제>에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 이름으로 플리마켓에 참여하고 있다. 새로운 와인 칵테일을 3 가지 만들어 나갔다. 좀 지루하고 힘든 일이지만, 일상의 삶이기에 잘 즐기고 있다. 오늘 아침 사진이 그 거다. 오늘의 화두는 '세상의 원하는 일들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까?'라는 질문이다. 나는 6월 3일에 정권이 교체되고 이 사회의 주류가 바뀌면서 새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개벽은 고통 없이, 걱정 없이 순탄하게 오진 않는다. 역사와 우주가 말한다.
<<주역>>의 "무왕불복(無往不復) 무평불피(無平不陂)"라는 말이 생각난다. 자연의 순환 원리를 주역에서는 "무왕불복"의 원리라고 한다. 세상의 이치는 결국 가면 반드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순환 철학은 <<주역>> 11번째 괘인 <지천태> 괘에 나온다. 이 괘에 "무평불피(無平不陂)"라는 말도 나온다. '세상에 영원히 평평한 땅은 없다'는 말이다. 난세를 이겨내는 중요한 인생철학이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나 사태가 일어나면, 나는 '오이관복"한다. 이 말은 <<도덕경>>의 제16장에 나온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이다. 이 말은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라고 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다시 마음을 비우고, "오이관복(吾以觀復, 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한다. 나는, 최근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이해가 안 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 해지려고 한다. 특히 "오이관복(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을 소환하며 나를 위로 한다. 세상 모든 이치이다.
나는 이 문장을 만날 때마다 "되돌아 감"에 늘 주목한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 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이를 노자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제40장)이라 말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되 돌아 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지금 정국이 돌아가는 것에 기다림이 필요하다. 세상은 작용이 있으면 그 반대의 힘인 반작용이 동시에 작동한다.
2
때는 기다리면 온다. 그러니 매일의 루틴을 지키며, 늘 하는 일을 '그냥' 반복하며 기다리는 거다. 소설가 백영옥의 이번 주 칼럼에서 얻은 생각이다. "추운 겨울 바다로 몸을 던지는 해녀 할머니에게 피디가 바다에 해산물이 많냐고 묻자 별로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당황한 피디가 '근데 왜 들어가세요?'라고 묻자 해녀가 답한다. '어제도 했었거든!' 힘들고 지친 그 순간에도 반복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 그것이 나를 만든다. 결국 삶은 내 습관의 총합이다." 나도 이런 습관으로 매일 매일 <인문 일지>를 쓴다. 오이관복하면서,
큰 성취를 한 이들에게 정체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물으면 “어떻게 하긴요, 그냥 해요”라고 답할 때가 많다고 한다. 난 '그냥'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제 했던 일을 '그냥' 또 하는 게, 요즈음 같은 난세의 처세법이다. 그러니 습관처럼 매일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세상이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오늘 따라 '그냥'이 다르게 읽힌다. 언젠가 누군 가의 카톡에서 받아 온 글을 공유한다.
"그냥 !"
사람이 좋아지는 백만가지 이유 중에서
가장 멋진 이유를 꼽으라면 "그냥"을 꼽겠습니다.
‘왠지 그냥 좋다’라는 말이 나는 "그냥" 좋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딱 부러진 이유가 꼭 있어야 할까요?
"그냥" 좋으면 안 되는 걸까요?
그냥은 '아무 이유 없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설명할 수 없다' 는 뜻이기도 하지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만든 언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그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한 두마디 언어로 표현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 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태어난 절묘한 말이 "그냥"일 것입니다.
"그냥"은 여유 입니다.
긴 인생을 살면서 자잘한 이유 들은 일일이 상대하지 않겠다는
너털웃음 같은 말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 앞에 "그냥"이라는 말 하나만 얹어도
우리 인생은 훨씬 더 헐렁하고, 넉넉하고, 가벼워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그냥"이라는 말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복잡한 인생 사 한번 쯤은 '그냥' 헐렁하고, 넉넉한 오늘을
맞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3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 중에 조동례 시인의 <그냥이라는 말>이 있다.
그냥이라는 말/조동례
그냥이라는
말
참 좋아요
별 변화없이
그 모양 그대로라는 뜻
마음만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난처할때
그냥
했어요 라고 하면
다 포함하는 말
사람으로 치면 변명하지
않고
허풍 떨지 않아도 그냥
통하는 사람
그냥이라는 말
참 좋아요
자유다 속박이다 경계를
지우는 말
그냥 살아요 그냥
좋아요
산에 그냥 오르듯이
물이 그냥 흐르듯이
그냥이라는 말
그냥 좋아요
오늘도 유성온천문화축제장에 '파일럿 사업'으로 플리마켓 현장에 나가 정말 많은 사람들을 구경할 것이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이다. 이게 편하다. 세상이 비상식이 판을 치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만 쳐다 본다. 또 다른 방식의 "오이관복"이다. 그러나 "그냥" 아름답게 살고 싶다. 아집(집착) 또는 욕망을 내려놀고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면 그것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주는 것'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알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 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 하기 때문이다.
'알아 달라' 하면 관계가 멀어지지만, '알아주려고' 하면 관계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알아 달라' 하면 섭섭함을 느끼지만, '알아주려고' 하면 넉넉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행복은 '알아 달라는 삶'에는 없고 '알아 주는 삶'에는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에 가면 가끔 한적한 곳에 혼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을 본다. 그 꽃은 보는 사람 없고, 사람이 없어도 아름답게 향기를 날리며 피어 있다. 미모 경쟁도 하지 않고, 향기 경쟁도 하지 않고, 그냥 혼자 아름답게 핀다.
삶의 목표는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름답게 사는 것' 이다. "그냥."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오탁번 시인도 "그냥!"이라는 시를 썼다. 공유한다.
그냥! /오탁번
- 내가 왜 좋아?
- 그냥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 내가 왜 좋아?
- 그냥
나도
이
말 한번 해봤으면!
5
사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래를 놓고 토론을 벌일 수는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예측을 자신의 진로 설정에 나침반으로 삼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미래 전문가는 솔직히 없다. 이미 일어난 과거에 기댄 평론가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 보다는 변함 없는 지혜가 담긴 책을 읽고, 산책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며, 자신부터 자기 할 일을 생각해 보는 게 더 현명한 일이다. 나는 진보를 믿기 때문이다. 인문 운동가의 입장은 선명하다. 진보 정권으로 교체하여 우리 사회에 쌓인 적폐를 척결하고, 김대중-노무현-문재인정부를 거치는 동안 추진해 온 개혁을 완수해야 할 책임은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개혁을 열망하는 모든 국민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친일정권과 군사독재정권을 시작으로 이어져 온 반민주, 반민족세력이 또다시 권력을 차지하여 역사에 반하는 행보를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다시는 적폐세력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민주세력이 뭉쳐야 한다. 그래야만 진보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의 삶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흘러간다. 그러니 후회를 줄이고 싶다면 대안을 많이 만들기 보다는 흔들림 없이 지켜 나갈 수 있고 일상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만의 루틴(rutine)을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사실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우리의 결정적 실수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무심코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실패가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고, 옳은 길로 향하고 있다는 믿음에 돌을 던지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무의식적인 동기를 변화시켜 판단력을 높이는 방법에 관한 책을 쓴 줄리아 갈레프(Julia Galef) 작가로부터 얻은 생각이다. 그녀는 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판단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직접 그녀의 말을 들어본다. "당신이 지금 직면한 상황과 이용 가능한 옵션, 조율과 타협이 가능한 것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능력이 당신의 판단력을 향상시킨다. 인생의 고비 때마다 누구에게나 보편 타당하게 적용되는 조언에 귀 기울이는 것은 시간 낭비다. 자신의 루틴을 밀고 나가되 개선점이 무엇일지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후회 없는 삶으로 이끈다."
"세상의 것들 에는 다 때가 있으니, 때가 되면 사라지겠지." 중국 고사성어에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 있다. ‘한 번 엎은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낚시꾼으로 유명한 강태공의 고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강태공은 나이가 칠십이 될 때까지 낚시만 하는 백수였다. 이에 견디다 못한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떠났다. 그 후 강태공이 제후가 되고 아내가 돌아와 같이 살 것을 요청하자, 물 한 바가지를 땅에 쏟고는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있으면 같이 살겠다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싸워야 한다. 그 길은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탄핵하는 게 급선무이다. 나머지는 다 한가한 소리" 이다. "알량한 선민 의식과 빈곤한 철학에 기대어 세상을 등진 채 구름 위에서 노닐던 그 오만하고 기묘한 일상을 이제 빛 바랜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최강욱)
익건 팩트이다. 대법원은 법률심이다. 법률 적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이에 반해 제1심과 2심은 사실심이라 부른다. 항소심까지는 증거 평가를 통해 사실 관계를 판단하며 유무죄를 결정한다. 생중계를 통해 지켜본 대법원 재판은 법률심이 아니었다. 1심과 2심에 이어 3심이지만 또다른 연속적인 사실심이었다. 대법원장 조희대는 판결문에서 주문으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판결문 그 어디에도 파기 환송 결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법률 적용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나 설명은 없었다. 사실심리 결과만 쭉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법률심'이라는 위상이 스스로 부끄럽고 '사실심'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은 의식했는지, "원심의 법리 오해가 있었다"며 마치 법률심인양 뚜껑만 살짝 얹어 놓았다. 조희대의 대법원은 최고 법원 역할을 포기하고 또 하나의 '정치 집단'임을 과시했다. 사법 쿠데타를 떠나 국회 제 1야당 소속 대통령 후보의 정치생명을 자신들이 가진 사법 권한으로 끊겠다고 작심한 것이다. 그들의 파기 환송 결정은 이재명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법을 가장한 조희대 대법원의 정치적 신념이다. 그 진실을 "원심의 법리 오해가 있다"는 뚜껑 아래 숨겼을 뿐이다. '일반인의 관점'이라는 비루한 해석으로 최고 법률심이라고 하는 저의가 낱낱이 확인됐다. 이 문제는 내 삶의 철학인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다.
전쟁이다. 전쟁에서 선의에 기대고 희망적 사고에 빠지는 순간 패배다. 국민이 입법부에 부여한 것은 행정 권력만이 아닌 사법 독재에 대한 견제도 포함된다. 그게 헌법이 보장한 삼권분립이자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이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 지금은 법원의 시간이 아니라, 주권자의 시간이다. 재판부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주는 일상의 리듬을 잃어 <인문 일지>를 공유하지 못했다. 원하시면, 블로그에 가시면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