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썰물에 한탄하지 말고 곧 돌아올 밀물에 자신의 배를 띄울 채비를 하자.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5. 3. 10:01

326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2일)

1
오늘 사진은 그믐달을 찍은 것이다. 보름달에서 점점 빛의 영역을 잃으며 그믐달이 되었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달은 초하루가 되면 사라졌던 곳과 반대 방향에서 초승달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초하루에 뜨는 달은 그믐날에 졌던 달이 아니다. 새달의 빛이 시작된다. 그러니 눈 앞의 암울한 현실에 움츠려 들지 말자. 고난은 우리를 파괴할 수 없다. 고난 그 자체는 풍뎅이 한 마리 죽일 힘조차 갖고 있지 않다. 고난이 위협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무릎을 꿇었을 때 뿐이다. 우리 삶은 기쁨과 슬픔의 연속이다. 삶의 여정에는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실패와 성공은 번갈아 찾아오기 마련이다. 인생은 파도와 같다. 한 파도가 끝나면 이내 다른 파도가 밀려온다. 그러니 썰물에 한탄하지 말고 곧 돌아올 밀물에 자신의 배를 띄울 채비를 하자. 그 진리를 믿고 용기 있게 나아가자. 그것이 인생이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채워 지길 바라지 않는다. 인간이란 생래적으로 '채움의 길'을 간다. 뭐든지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더 채우고 더 가지려 한다. '도'를 알고 따르는 사람은 '채움의 길'을 버리고 '비움의 길'을 걷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 로다'하고 노래할 수 있다. '있음 그대로(being)에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 

2
정치를 잘 모르지만, 정치판이 크게 요동친 어제였다. 이재명 후보를 대법원이 유죄라며 파기 환송을 했다. 2심의 무죄를 뒤엎은 거다. 그러나 내가 기분 나쁜 것은 대법원이 같은 처지의 당선자는 내버려두고 낙선자만을 기소해 헌법적 형평성을 결여한 이번 사건의 본질과 엄격히 다루어야 할 선거범죄 소송의 특성을 애써 무시하면서 오히려 선거를 목전에 두고 후보자의 자격 박탈 가능성을 전격적으로 열어젖힘으로써 초래되는 민주주의의 혼란과 위기를 간과하는 헌법적 형량의 오류를 저질렀다는 거다. 더 나아가, 법률 공무원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스스로 자유로이 대표를 뽑을 주권자 국민의 선택을 방해한다는 거다. 그러면서 이번 대법원의 이례적으로 신속한 결정은 내란죄 피고인 윤석열에 대한 이례적인 구속취소와 특혜적 대우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오히려 사법 불신을 증폭시켰다.

3
<<논어>> 제17장 <양화> 2절에서 공자는 "오직 지극히 지식이 많은 자(上知)와 가장 어리석은 자인 하우(下愚)는 변화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길을 걷던 공자가 하루는 길 옆에서 똥을 싸는 사내를 봤다. 공자는 함께 있던 제자를 시켜 그 사내를 자신에게 데려오게 했다. “너는 짐승이 아닌 이상 어찌하여 가릴 것, 못 가릴 것 구분을 하지 못하느냐. 너는 도대체 사람이냐, 짐승이냐?” 공자는 힐난의 말과 함께 엄청나게 사내를 꾸짖었다. 그러자 사내는 부끄러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는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다시 순행(巡行) 길에 오른 공자. 이번엔 길 한가운데서 똥을 싸는 또 다른 사내를 만난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공자는 화를 내기는 커녕 제자에게 그 사내를 피해서 가자고 말한다. 제자는 길 가운데서 똥을 싸는 저 사내가 더 나쁜 놈인데 왜 피해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말한다. “길 옆에서 똥 싼 사내는 그나마 양심은 있어 가르치면 되지만 저 놈은 아예 양심 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느냐?” '하우불이(下愚不移)'의 교훈이 여기서 나온다.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논어>>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이야기인 앞에는 항상 '유상지여(唯上知與)'가 함께 붙는다. '하우'와 '상지'를 같은 등급으로 생각한다. 하우야 어리석고 못났으니, 받아들이지만, 상지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잘난 척하는 엘리트들이다. 바뀌지 않는 사람의 예로 '상지(上知)', 즉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우수하고 총명한 사람을 짝처럼 붙여 놓은 것이 공자의 통찰력이다. 그럼 상지와 '하우(下愚), 즉 아주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왜 바뀌지 않는다고 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잘난 사람은 잘났으니 그렇다 치고 못난 사람이 요지부동인 이유는 지레 포기하기 때문이다. <<논어 집주>>에 따르면, 하우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포(自暴)'하고 '자기(自棄)'하는 사람이다. '자포'는 스스로 자신을 포기한 사람, '자기'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소위 엘리트라며 나만이 정의라는 확증 편향에 있는 자의 오만함, 그가 만들어낸 거짓에 놀아나는 우매함, 마치 종교 같은 믿음. 상지와 하우는 그래서 통하는 사이인가?

지금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는 게 '상지(上知, 엘리트)'에 해당하는 "관피아(고위 행정 공무원과 법률공무원인 검사나 법관 포함)"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의 정치는 지도자, 경쟁 체제, 돈, 조직을 잃었다. 물리력과 정치력의 시대가 끝나자 관료의 힘이 세지었다. 관료는 자기 부처의 이해를 중심으로 사고 하기 때문에 '패권에 대한 자각'은 약하지만, '법'도 사실상 관료들이 만들고, 그 법이 실질적 효력을 갖게 하는 '시행령'도 그들이 만드는 나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패권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권이 있는 곳에 규제가 있고, 규제가 있는 곳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기업과 공무원, 그리고 로펌의 결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고 광범위하다. '관피아'는 척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력이 하나 더 등장했다. 법원, 헌법재판소, 검찰, 로펌을 포괄하는 법조가 그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최고, 최후의 판단 자이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자신들이 직접 뽑은 정치적 권위에도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법적 권위에는 승복한다.  정치의 사법화가 그렇게 만들었다. 검찰과 법원의 정치적 공간은 정치가 그 공간을 버렸기 때문에 열린 것이다. 이젠 제대로 된 시스템으로 복원해야 한다. 그래 나는 이번 대선이 중요하다고 본다.

4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본주의에서 부의 배분이란 정치가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성찰 할 것이 있다. 건강한 개인적 욕망과 탐욕을 구별하여야 한다. 누구나 나름의 소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 소원은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어야 이룰 수 있는 욕망은 ‘탐욕’이다. 예컨대, 아파트 값이 올라 좋은 사람도 있지만, 그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내 아파트 값이 올랐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탐욕에 가깝다. 이보단 차라리 ‘로또 당첨됐으면 좋겠다’가 건강한 욕망이다. 우리 국민 다수가 ‘건강한 욕망’이 아니라 ‘탐욕’에 투표했기에, 윤 같은 ‘탐욕의 화신’이 당선된 거다. 김과 윤이 거리낌 없이 표출한 ‘극악무도(極惡無道)’, "지랄발광"은, 우리 국민 마음 속 ‘탐욕의 총합'이다. 민주제 시대에는, 방탕하고 탐욕스러운 ‘민(民)’보다 어질고 현명한 ‘민(民)’이 훨씬 더 많아야 세상이 좋아진다. 전우용 교수의 주장이다. 나도 동의한다.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민주 시민을 위한 정치 학교가 필요하다. 함께 모여, 공부하고 배우며, 생각을 나누고, 뭉쳐 연대의 힘으로 좋은 공동체를 만들 방법을 논의하여야 한다. 정치 공학이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정치여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가 무엇인지 묻는 한 권력자의 물음에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政者正也, 정자정야)라고 명쾌하게 정의한 바 있다. 정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실천의 문제이지 힘과 이익의 다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옳은 것(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본래 목적을 잊고 그저 권력이라는 수단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진영의 논리가 앞서는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모두 대결의 논리로 빨아들인다. 가령 현 정부의 반민주, 반헌법적 통치를 비판하면 바로 상대 진영의 주장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정치가 이렇게 진영 선택의 문제가 되고 권력 교체에 불과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협소하고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의 양당제 정치 때문일 것이다. 선거가 곧 정치가 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선택과 상상의 여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정치 과몰입도 몰 정치도 아닌, 마음 놓고 지지할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국민적  갈등을 자신의 이익의 동력으로 삼는 우리 정치인들은 "사람 안에 개가 들어 있어" "개 소리"를 하느라 바쁘다. 답답하다.


개의 정치적 입장/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 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 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5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 정의했는데, 여기서 ‘정치적’이란 말은 정확하게는 폴리스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는 인간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생각했다.
- 이론적 활동(테오리아), 
- 윤리적 실천(프락시스), 
- 제작 활동(포이에시스)
이런 식으로 나누면서 생존을 위한 활동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활동 곧 프락시스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생각을 일부 이어받은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활동을 똑같이 셋으로 나누어 사유했다.
- 생존을 위한 노동(labor), 
- 외부 세계에서 의미를 캐내는 작업(work), 
-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action)
이런 식으로 나누면서, 근대에 들어와 행위의 공적 영역이 생존과 노동의 사적 영역에 잡아 먹혔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공적 영역은 권력의 사유화로 증발해버리고, 시민들은 그들 대로 개인의 사적 안녕과 이익이라는 몰정치적 태도에 빠진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공적인 정의 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이상은 또한 현실 정치를 통과하지 않으면 달리 실현할 방법이 없다는 데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현실 정치를 방기하면 정치의 이상은 더욱 멀어진다.  피곤하지만 정치를 놓을 수 없는 것이 시민의 삶이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사월의 책 대표 안희곤의 지적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기억한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받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플라톤)


지난 주는 일상의 리듬을 잃어 <인문 일지>를 공유하지 못했다. 원하시면, 블로그에 가시면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