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를 줄이고, 내 일상을 좀 더 향유하고 싶다.


325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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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유하는 사진은 두 장이다. 하나는 친구 부친의 농사를 돕기 위해 지난 주말에 상주에 갔었다. 첫 번째 사진은 그 밭에 본 산의 모습이다. 아직도 4월인데, 거리의 나무들은 벌써 연두를 잃고 초록을 건너 수채화가 유화가 되어간다. 삶과 생존은 다르다. 진정한 삶은 죽음과 대척점에 있는 생존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 보낸 것을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세네카는 삶이란 단순히 목숨을 유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치자.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누구나 바라는 장수가 오랜 인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세네카의 통찰이 놀랍다.
첫 번째 사진은 신록(新綠)이 시작되는 고추 밭 옆 산의 모습이다. 연둣빛과 연초록빛 신록의 그러데이션이 상록수의 진녹색 잎과 검붉은 나무껍질에 대비된 모습은 숲을 무대로 봄볕이 연출하는 벅찬 광경(光景)이다. 틈틈히 그 산을 바라보며 고추 심기를 도왔다. 보는 행위도 여러 층위가 있다. 의지와 욕망이 개입되지 않았지만 눈에 그냥 보이는 현상이 있는가 하면, 보려는 의지가 개입된 지각 활동도 있다. 어떤 경우든 본다는 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시각 정보를 과거의 경험과 기억과 관련시켜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널리 알려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안다’는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시각 정보에 갇히지 않고 그 정보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을 일러 통찰이라 한다.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3 가지를 제안한다.
(1) 거리를 산책하다 보면, 길 모퉁이 핀 꽃들을 만난다. 그것들은 자기의 꽃 시절을 한껏 만끽하고 있다. 자기 연민이나 비애 따위는 없었다. 뿌리 내릴 약간의 흙과 물기를 만나 생명의 진수를 드러내는 그 생명력이 경이롭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보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했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본다는 것은 시간을 들이는 거다. 시간의 향기가 그 속에서 배어드는 거다. 그럴 때 무언 가에 대해 경탄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런 감탄을 촉발한 것은 ‘자세히 봄’이다. 할 일에 몰두하느라 빠르게 걷는 이들은 기적들 사이를 앞 못 보는 사람들처럼 스쳐 지나간다.
(2) 빛이 없으면 볼 수도 없다. 내면의 빛이 어두워서 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눈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본다.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살 때 기쁨과 감사는 가뭇없이 스러진다. 그것은 일종의 속박 상태이기 때문이다. 금방 사라질 감정 말고, 평생 계속될 인생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일시적 감정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난 거랑 잘 사는 거랑 다르다. 못난 놈이라도 잘난 것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나 여기 살아 있다", "나 보고 다른 못난 놈들 힘내라", 이러는 게 진짜 잘 사는 거다. 잘 난 건 타고나야 되지만, 잘 사는 건 자신이 할 나름이다. '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마티아스 뇔케,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 타인의 시선에 맞춰 나를 애써 나를 포장하면서 내 삶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감정 소모하느라 내 가치를 잃어버리지 말자. 자기 중심을 잘 잡으면 인생은 훨씬 더 편안해질 수 있다.
(3) 가끔 인생의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 죽음, 죄책감, 고통, 우연 등 우리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일에 사로잡힐 때, 사람은 누구나 깊은 당혹감을 느낀다. 그 당혹감은 우리 삶의 토대를 흔들지만 때로는 새로운 삶의 문턱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고통을 통해 눈이 밝아진 이들이다. 그들은 타자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서지 않고, 그들의 숨겨진 눈물을 본다. 눈이 맑고 밝은 이들은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거침없이 혐오감을 드러내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이들은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딱한 일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자에게 사람들은 기도를 부탁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 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이다. 우리의 삶이 상처보다 크기 때문이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축복이라는 영어 blessing은 프랑스어 blesser에서 왔다. 프랑스어 blesser는 '상처 입다'란 뜻이다.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땐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류시화) 멋진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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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진은 고추 심기를 도와 주었다. 그러면서 흙을 실컷 만났다. 회두리에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그 누구나 농부다. 이제 땅의 소출이 경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잊으면 헛사는 것이다. '떵떵' 거리며 산다는 말도 기실 '땅'에서 왔다. 올해도 절반이 후딱 지나가고 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에 집단휴진까지 겹친다. 이런 사안들이 쉽게 해결될 수 있을까. 싹수가 노랗다. 계속되는 폭염으로 눈앞이 캄캄한데 세상사가 우리를 더 지치게 한다. 하지라는 절기에게 되레 겸연쩍은 요즘이다.
흙/문정희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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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요즈음, 우리를 고달프게 하는 압박에서, 행복보다 성공을 위한 삶이 요구하는 것 들로부터 벗어난 삶에 대한 찬사를 말하고 있는 책을 재미있게 읽고 많은 위로를 얻으며, 우리가 가야야 할 삶의 길을 엿보았다. 그 책이 프랑스계 미국인인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의 향한 찬사(Eloge des vertus miniscules)>>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겸양의 미덕을 배웠다. 그건 겸손한 태도로 상대방에게 가급적 양보하며,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소통하는 방식이다. 키워드가 4개이다. 양보, 존중, 무아(無我) 그리고 소통이다. 볼테르는 <<깡디드>>에서 헛된 꿈을 꾸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고 했다. 성공에 집착하고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야망보다는 평범을 꿈꾸라는 거다.
한 번 사는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물으며, 이 책은 여러 현인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극단을 경계하고 중용을 중시하라고 했다. 톨스토이는 "나는 평범함을 열망한다"고 했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변화로 이루어지며, 우리의 성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소하고 평범한 사건들에 의해 형성되고 변화한다"고 했다. 조지 엘리엇은 "삶은 결코 완벽하지 않고, 그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뿐이며, 이는 곧 기쁨과 성취감의 원천이 된다"고 했다. 안톤 체호프는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는 것, 자작나무의 어린 새순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에 애정을 갖는 일은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라고 했다. 조지 오웰은 "완벽한 환상보다 일상의 상대적인 불만족이 더욱 가치 있다"고 했다. 전 세계 현자들이 말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가 평범이라고 말했다. 삶은 완벽하지 않아 완전하고 평범함 없는 특별함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삶의 속도를 줄이고, 내 일상을 좀 더 향유하고 싶다. 아침에 읽은 김기석 목사의 글이다. "분주함이 사회적 신분에 대한 표징으로 인식되는 세상에서 한가로움은 덕이 아니라 게으름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이다. 가속의 시간에 적응하며 사는 이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예술품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니, 오래 머물지 못한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동안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향유’(frui)와 ‘사용’(uti)을 구분한다. 사용이 대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면 향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향유는 가장 온전한 사랑함이다. 향유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타자들과 허물없이 순수한 사귐은 불가능 해진다. 사용할 것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의 가늠자로 삼을 때 사람은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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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고 보니, 자유인의 명함처럼 좋은 건 없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는 것과 어른으로 사는 차이 쯤일까? 유명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순간의 실수로 세상을 하직하는 모습을 본다. 이 아름다운 인생의 풍경 길을 다시는 보지 못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커피 냄새, 지천에서 피어 대는 4월의 꽃 향기를 다시는 맡지 못하는 거다. 오래전 46세의 나이로 투신자살한 80~90년대 전설적인 홍콩 배우 장국영의 유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매우 괴롭다. 이에 자살한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해도 정작 당사자가 불행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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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오늘 만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좋은 말 5가지를 공유한다.
(1) "'너' 라서 다른 거고, 달라서 특별한 거야."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력을 4분의 3이나 잃는다." (쇼펜하우어)
(2) 모른다는 참 아름다운 말이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은 배울 기회도 많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는 현재 가진 것의 합(合)이 아니라, 아직 갖지 않았지만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의 합으로 결정된다.
(3) 누가 나를 오해한다면 당당히 맞설 줄 알아야 한다. 모두에게 사랑 받을 수는 없다.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차분한 자세로 주어진 할 일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4) 겁먹지 말고 도전하면 결국 해낼 수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는 우리의 천재 성과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
(5) 감사하는 만큼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다. 감사하는 마음이 최고의 지혜이다. 은혜를 되 갚는 것보다 더 귀한 의무는 없다. '때문에'를 '덕분에'로 바꾸면 하루가 아름다워진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