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마음의 주인이 되라.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5. 1. 13:35

325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26일)

1
송화(松花) 가루, 표준어로는 송홧가루는 봄철에 소나무에서 나오는 꽃가루이다. 곤충을 이용한 꽃과는 달리 바람을 이용해 수분하는 풍매화인 소나무는 대량의 꽃가루를 만들어 내어 바람에 날려 보내서 수분을 시도한다. 송홧가루를 확대하면 두개의 큰 공기 주머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조로 인해 바람에 잘 날라 다닐 수 있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거나 가려움, 비염 등을 가져다 준다고 사람들은 이 송홧가루를 귀찮아 한다. 옛날 우리는 송홧가루로 송화 다식을 만들어 먹거나, 술이나 면에 섞어 먹기도 했다.

눈이 녹으면 더러워서, 비가 내리면 단풍이 하수구를 막아서, 봄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이 모든 계절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풍경일까? 한 번 뿐인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고집스레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다 마음 먹기이고, 더 나아가 마음을 굽는 일이다. 그러려면 오늘 시 대신 공유하는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산책하다가 송화를 보고 했던 생각이다.


마음의 주인이 되라/법정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드는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 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 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 라기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정말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 들이다가 
한 번 옹졸 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러한 마음을 돌이키기 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 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말했다. "바깥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어도 우리 마음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을 알면 힘이 생길 것이다."

2
지금부터는 어제 다 못 읽은 <지산 겸> 괘의 '육사와 "육오' 그리고 '상육'의 효사를 읽고 공유한다.


'육사' 효사는 "六四(육사)는 无不利撝謙(무불리휘겸)이니라" 이다. 번역하면, '육사는 겸손함을 휘둘러 이롭지 않음이 없다가 된다. TMI: 撝:가리킬 휘·휘두를 휘·도울 위. '육사'는 대신(大臣) 자리에 있으며 음 자리에 음으로 처하여, 겸손함을 사방에 휘두르는 격이다. 불리하지 않도록 겸손을 드러나게 실천하라. 적극적으로 사양하고 타인에게 다 양보하라는 거다. '육오' 인군에게도 겸손하고 아래 백성에게도 겸손하니, 그 겸손함이 사방에 두루 미친다. '육사'가 변하면 양으로 바뀌어 외괘가 <진뢰(震雷, ☳>가 되니 겸손함을 휘두르는 상이 된다.

'육사'는 외괘의 처음에 있어 실중했지만 득위한 자리이다. 응(應)의 관계에 있는 '초육'도 음이고, 비(比)의 관계에 있는 '구오'도 음이니, 오직 '구삼'과 상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구삼'은 양 위에 있어 승강(승강)한 상태이다. 비록 '육사'가 대외적으로는 '구삼'보다 높은 임원, 대신의 자리이지만 '구삼' "노겸군자"는 노고를 다하고도 스스로 겸손하게 땅 속에 묻힌 산에 들어가 있는 형국으로, 사람들이 결코 '육사'를 '구삼'보다 더 인정하고 존경하는 상황이 아니다. 사람들은 '구삼'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일반적인 효사의 형식이라면 "휘겸 무불리"라고 문장이 구성되었을 것이다. '겸손을 실천하면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무불리 휘겸"이다. 이를 "이롭지 않음이 없도록'과 같이 점사(占辭)처럼 해석하기 보다는 '불리하지 않도록' 겸손을 살천하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겸손을 실천하지 않으면 불리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육사'가 동하면 외괘는 <진괘>가 된다. <진괘>는 '갑목(甲木)'이니 마치 '구삼 위에서 '남산 위의 저 소나무'와 같이 자기가 리더처럼 보이도록 나아가는 상이 된다. 그렇게 하다 가는, 변한 외호괘 <태택괘> 금(金)에 의해 잘리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육사'가 동하면 지괘는 제62괘인 <뇌산 소과> 괘가 된다. 아래 그림처럼, <뇌산 소과> 괘는 대감(大坎, ☵)의 상이다. 자칫하면 어두운 큰 물에 빠지는(坎陷也, 감함야)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뇌산 소과> 괘의 <괘사>는 "小過(소과)는 亨(형)하니 利貞(이정)하니 可小事(가소사)오 不可大事(불가대사)니 飛鳥遺之音(비조유지음)에 不宜上(불의상)이오 宜下(의하)면 大吉(대길)하리라" 이다. 번역하면, '소과(小過)는 형통하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 작은 일은 가능하고 큰일은 가능하지 못하니, 나는 새가 소리를 남김에 올라감은 마땅하지 않고, 마땅히 아래로 내려오면 크게 길할 것이다'가 된다. 형통하다. 바르게 해야 이롭다. 작은 일을 가능해도 큰 일은 불가하다. 나는 새는 소리를 남기니 올라가는 것은 마땅치 않다. 마땅히 내려가야 크게 길할 것이다는 뜻이다. 대감(大坎, ☵)의 상에서 새의 상이 나온다. 가운데 양효는 몸통, 양쪽 바깥의 음효는 날개를 상징한다. 그리고 올라가지 말고 내려가라고 이야기 한다. 곧 겸손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육사'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无不利撝謙(무불리휘겸)은 不違則也(불위칙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겸손함을 휘둘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은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가 된다. TMI: 違:어길 위, 則:법칙 칙. '육사'는 대신 자리에 있다. 대신으로서 겸손하게 하는 것은 곧 나라의 법도를 잘 준수하는 것이다. 또는 불리하지 않도록 겸손을 드러나게 실천하는 것은 이치에 위배되는 않는다는 것이다.

'육사'의 입장에서 겸손을 실천하는 것은 거의 사회적 생존과 관련된 일이다. '육사'의 진심이 어떤 가에 상관없이 세상 사람들은 '육사'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리한 상황을 맞자 않도록 적극적으로 자신의 겸손함을 외부에 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휘(撝)"는 '손(수)과 행동(위)이 결합된 글자이니 손을 휘두르듯이 눈에 잘 띄게 겸손을 실천하라는 거다. 공자는 그런 방식으로 겸손을 실천해도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화이라는 것이 잇기 때문이다. '육사'의 의지와는 무관한 '육사'라는 '자리(위)'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이 특정한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점을 쳐서 <지선 겸> 괘의 '육사' 효를 얻게 되면, 손사래를 치면서 적극적으로 사양하고 타인을 위해 ㅏ리의 일 등을 양보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더 좋은 일로 돌아올 수 있다.
 
3
'육오' 효사는 "六五(육오)는 不富以其鄰(불부이기린)이니 利用侵伐(이용침벌)이니 无不利(무불리)하리라" 이다. 반역하면, '육오'는 부하지 아니하고 그 이웃으로써 하니, 침벌함이 이로우니,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가 된다. TMI: 鄰:이웃 린, 侵:침노할 침, 伐:칠 벌. '육오'는 외괘의 중을 얻은 인군(人君)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로서의 겸손함은 홀로 부와 권력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만백성과 그 부를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로서 무작정 겸손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군으로서 나라의 법에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마땅히 징벌을 해야 이롭다.

좀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이웃과 함께하기만 해서는 부유할 수 없으니 침벌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지나친 겸손은 폐해를 낳는다는 거다. '육오'는 실위했지만 득중했다. 유순한 리더의 상이다. 외괘는 <곤괘>이다. '육오'가 역시 강하지 못하고 부드럽기만 한 '육사', '상육'과 함께하고 있기에 <곤괘>를 이루고 있는데, <설괘전> 제11장에 "곤위인색(坤爲吝嗇)"이라고 했으니, <곤괘>는 인색함, 곧 부족함을 뜻한다. 부유하지 못한 상황이다. 즉 리더가 유순함에 참모와 고문까지 그러하니 유순함이 지나쳐 유약한 상태가 된 것이다. 겸손함이 지나친 데서 오는 폐단이다. 그 폐단이 바로 내호괘 <감수괘>이다. '육사'와 '육이'가 만인의 추종을 받고 있는 '구삼'과 손을 잡고 어두운 세력을 이룬 것이다. <간괘>에서 도적의 상이 나온다(坎爲盜, 감위도). 마치 리더가 연약한 틈을 타서마음을 나쁘게 먹은 자들이 나라와 회사의 돈을 빼돌리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래서 부가 자라지고 있는 것과 같다. 제 마무리 군자와 같은 사람도 주변에 아부꾼들이 싱숭생숭하게 자꾸 마음을 부채질하면 자기 정체성을 잃고 헛된 망상에 빠져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Hels다. 그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 음습하고 어두운 <감괘>를 몰아내야 한다.

외호괘가 <진뇌괘>로 '나아간다'는 의미인데, '구오'가 동하면 외호괘가 <리화괘>로 변하니 '침략하여 징벌한다'는 뜻이 나온다. <리화괘>는 곧 밝음이니 무력을 통해서라도 어둠의 무리를 응징하여 도적들에 의해 줄줄 새던 부의 유출을 막고 리더십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기도 하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利用侵伐(이용침벌)은 征不服也(정불복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침벌함이 이로움은 복종하지 않는 것을 정벌하는 것이다'가 된다. TMI: 征:칠 정. 다시 말하면, 침벌하는 것이 이로운 까닭은 불복하는 무리들을 토벌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은밀한 <감수괘>의 세력을 불복종하는 자들로 규정했ㄱ 그들을 몰아내는 것은 이로운 일이라 했다.

<지산 겸> 괘 '육오'의 상황은 내부 단속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리더가 지나치게 안일했던 탓이다. 이제부터 라도 정신을 차린 후 눈을 외부로 돌리는 데산 조직 안을 촘촘히 점검함으로써 자신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썩은 곳을 도려내야 한다. 리더가 리더로서의 위엄을 갖추어야 할 때인 것이다. '육오'가 동하면 지괘는 제39괘인 <수산(水山) 건(蹇)> 괘가 된다. 위엄을 갖추어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찾아내어 단죄하지 않으면 겨울 산속을 헤매다 동상에 걸리는 것과 같은 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다.

4
'상육' 효사는 "上六(상육)은 鳴謙(명겸)이니 利用行師(이용행사)하야 征邑國(정읍국)이니라" 이다. 번역하면, '상육은 겸손함이 우니, 군사를 행하여 읍국을 침이 이롭다'가 된다. TMI: 鳴:울 명·울릴 명, 師:군사 사. 다르게 말하면, 지나치게 겸손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구삼'으로 하여금 내부를 정리하게 만드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상육'은 <지산 겸> 괘의 맨 위에 처하여 아무리 겸손하고자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알아달라고 우는 격이다. 이러한 상황은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군사를 행하여 자기 읍국(邑國)을 침이 이롭다고 하였다. 읍국(邑國)이란 자기 마음을 가리킨다. 

'상육'의 효사는 '육오'의 것과 비교하며 해석해야 그 뜻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상육'은 득위했지만 실중한 자리이다. '육오' 효사에 나오는 이웃(隣) 중의 하나이다. 음이 음자리에 있어 겸손함이 지나치고 그로 인해 유약한 탓에 유순한 '육오' 리더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 소문이 퍼져 있는 상황이다. '육이'의 "명겸(鳴謙)"은 겸손함이 저절로 알려지는 것이었다. 닭의 울음소리처럼, 바람처럼 세상에 자연스럽게 알려졌다. '상육'의 "명겸"은 외부에서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육오' 리더의 입장에서는 군대를 일으켜 '육이', '구삼', '육사'로 ㄱ성된 어둠의 무리를 침벌하는 것이 이로웠다(利用侵伐, 이용침벌). '육오'는 유순한 리더십의 폐해를 인식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강한 리더십으로 전환하여 그것을 응징할 수 있는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육'은 실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단지 리더에게 풍부한 경륜에 바탕한 조언을 건넬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리더십에 반기를 드는 무리들을 대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육이'와 '육사'의 꼬임에 사리분별이 어두워 지긴 했지만 본시 '구삼'은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군자였다. 얼마든지 본래의 성정을 회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노력할 사람이다. '상육'은 이 점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상육'은 '구삼'과 정응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육'이 '육오' 리더를 돕는 방식은 '구삼'을 설득하여 <감괘> 무리들을 깔끔하게 평정하는 것이 된다. 맞부딪쳐서 피바람을 일으키는 것보다 상책인 셈이다. 이것이 "利用行師(이용행사)"이다. 제7괘인 <지수(地水) 사(師)> 괘에서 "사(師)"에 스승과 군사(軍士)의 의미가 있는 것을 읽었다. 군자인 '구삼'을 지칭하는 글자이다. "邑國(읍국)"은 '나라 안의 고을'이란 뜻이니, "征邑國(정읍국)"은 조직 내부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것이다. 그것은 '구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이용행사"인 것이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鳴謙(명겸)은 志未得也(미지득야)니 可用行師(가용행사)하야 征邑國也(정읍국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겸손함이 숨은 뜻을 얻지 못한 것이니, 가히 군사를 행하여 읍국을 치는 것이다'가 된다. TMI: 未:아닐 미, 得:얻을 득. '상육'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자기 뜻을 이룰 수 없다. 군사를 동원하는 강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언행을 돌이켜야 한다. 지나치게 겸손한 것은 사사로움을 탐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삼'으로 하여금 내부를 정리하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거다.

"志未得也(미지득야)"는 제13괘 <천화동인> 괘의 '상구'에 나왔던 구절이다. '사사로움을 탐하지 않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겸손함이 지나쳐 나약할 정도로 보이는 "명겸(명겸)"의 상태가 된 까닭은 기본적으로 '육오' 리더가 외괘 <곤괘>의 평등한 리더십, 낮은 리더십, 겸손한 리더십'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문인 '상육'도 리더의 철학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사리사욕을 추구하기 위해 리더를 일부러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이 '상육'이 '구삼'을 설득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된다. '상육'은 정당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구삼'을 설득하여 움직이게 함으로써 직접 조직 내부에 형성된 <감괘> 무리를 정리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상육'이 동하면, 외괘가 <간괘>가 되므로 '구삼'은 '상육'의 겸손함이 산처럼 진중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상육'의 말대로 행하게 된다. '구삼'이 그렇게 할 것이기에 '구삼'을 움직이게 하는 일을 공자는 '옳다, 바람직하다(可)'고 인식하는 것이다.

'상육'이 동하면, 지괘는 제52괘인 <중산 간> 괘가 된다. 산 두개가 중첩해 있는 상이다. 산에 막히듯 일의 진행이 답답한 상황이고, 산이 멈추어 있듯 일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럴수록 함부로 움직이는 대신 현실을 받아들이고 태산처럼 무겁게 스스로를 수양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괘이다. <중산 간(重山 艮)> 괘는 모든 움직임을 그치고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없고 함도 없는 평정(平靜)의 세계이다. <중산 간> 괘는 수양방법론과 그 과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중산 간> 괘가 육체(肉體)의 평정(平靜)을 이루는 수양을 의미한다면, <<상경(上經)>>의 <풍지 관(風地 觀)> 괘는 육체의 그침으로 일어나는 정신계(精神界)의 작용을 설명하고 있는 괘이다.

이를 <지산 겸> 괘 '상육'가 연결시키면 무조건 강경책을 써서 내부의 도적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 무리를 이끄는 사람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고, 근본적으로 덕을 갖춘 사람이니 그에게 사태를 수습할 기회를 주는 것이 나음을 알 수 있다. 금방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쉽게 단념하지 말고 태산과 같이 신중하게 인내하며 기다리면 결국 이로운 방향으로 결론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대상, 동일한 사건이라도 입장과 처지에 따라 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해결책에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지산 겸> 괘의 '상육'에서 우리는 사람과 가람 사이의 오해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다. 동시에 오해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법도 존재하기 마련임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곧 인간으로 서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오해의 가능성에 마음을 열게 되며, 타인을 성급하게 낙인 찍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어쩌다 곤란한 상황에 처해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고 싶어 하며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우리는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겸손할 수 있다면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손을 내밀 수 없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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