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27일)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까치발을 하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보폭을 너무 크게 하면 제대로 길을 걸을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하는 노자 <<도덕경>> 제24장을 읽을 차례이다. 우리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그 자체의 구조에 의하여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좋은 문장이다.
진득하게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고 일어서는 것으로 부족해 발꿈치를 든다. 발꿈치를 들면 빨리 보고 많이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결코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또 보폭을 넓혀서 한꺼번에 성큼성큼 앞으로 빨리 나아가려고 한다. 몇 걸음은 실제로 빨리 나아가지만 계속 그렇게 걸어갈 수가 없다. 까치발과 큰 걸음은 사람에게 일종의 착시효과를 준다. 처음에 많고 빠른 결과를 가져올 뿐인데 그 과정이 지속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까치발을 하고 큰 걸음으로 걷는 것이 낫다. 하지만 그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처럼 순간에만 통할 뿐 그 다음에 여전히 막막할 뿐이다.
좀 더 높이 서겠다고 발끝으로 서는 것은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으로서는 단단히,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멀리 가겠다고 다리를 한껏 벌리고 가려고 하는 것도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으로는 멀리, 오래 갈 수 없다. 모든 부자연스런 행위를 버리는 것이다. 이런 부자연스런 일로서는 본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결과만 불러 올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은 부자연스러운 인위의 행동을 그 자체의 조화의 법칙에 의하여 차단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초조해 하지 말고, 일상에서 조급증을 덜어내고 싶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자중하며 일상을 행복하게 향유하고 싶다. 하루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시작된 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졌고 지금껏 우리들의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경쟁을 통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가능성이 십분 발현되기도 하고 발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쟁을 통한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릴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의 국민의식을 조사한 자료를 살펴보면 행복하기 위해 거창한 무언 가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남 보란 듯이' 살지도 않는다.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물질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남보다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삶, 경쟁에 밀릴까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이 장을 읽다 보니, <<구약성서>> "시편" 제 1편을 1절이 소환된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한다." 이 말을 좀 쉽게 풀어 본다.
(1) 그는 범죄자들과 나쁜 일을 도모하는 일에 동참하여 걷지(walk) 않는 사람이다.
(2) 그는 죄인들이 가는 길에 서 있지(stand) 않는 사람이다.
(3) 그는 남을 중상모략 하는 자리에 있지(sit)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그걸 다음 같이 '안 하기'를 하는 거다.
(1) 공동체를 음해하는 일을 도모하는 일에 참여하여, 그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범죄자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곳에 걷는 일(walk), 즉 행동하지 않는다.
(2)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이 하는 삶의 스타일을 따라 그 안에 서 있지(stand) 않는다.
(3) 자신이 모르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중상 모략하고 시기하는 자리에 앉아 남을 헐뜯는데 앉아(sit)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여기서 앉아 있는 다는 건 자신의 몸에 베어,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는 수동적인 삶의 모습에 앉아 안주(安住)하는 사람이다. 탈 영토 화하여, 건너가기를 끊임 없이 시도하여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길 위에 서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묵상해야 한다.
(1) 나는 오늘 내가 가야할 길을 잘 걷고 있는가?
(2) 나는 오늘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과 함께 서있지 않는가?
(3) 나는 오늘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자리에 앉아 안주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안 하기'를 위해서는, 내가 나도 모르게 하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제3자가 되어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노자의 '무위(無爲)'가 소환된다. '무위'는 부자연스럽게 인위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거다. 그런데 '무위이불무위(無爲而不無爲)'라 했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면 부족하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안 하기'를 하면, 그 결과가 좋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은 우주의 순환이나 사계절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또한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무위'는 오랜 연습과 훈련, 시행착오와 수정, 혹독한 자기 점검과 자기 변화를 거쳐 도달하게 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이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운 좋은 발견', '재수 좋게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세렌디피티'는 자신의 만의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에겐 그런 행운이 찾아 올 리가 없다.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그릇이 마련되지 않아, 금방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불행이다.
바람이 전하는 말/최서림
이제 그만 납작 엎드려 민들레로 살라 하네.
몸 안에 공기 주머니를 차고 방울새로 살라 하네.
부딪히지 말고 돌아서 가는 물로 살라 하네.
위벽을 할퀴고 쥐어짜듯 아픈 새벽
유리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일러주는 말,
비우면 채워지고 비우면 채워지니 강물처럼 살라 하네.
물새 똥 앉은 조약돌처럼 구르고 구르면서 살라 하네.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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