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는 최근 "과물 엘리트". 즉 ‘시험권력’ 고시 엘리트들의 민 낯을 보았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4. 24. 09:03

325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24일)

1
온 거리가 철쭉으로 도배되었다. 너무 흔하니 꽃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눈에 잘 뛰지 않는 진달래가 보고 싶다. 어떤 철쭉 꽃은 색이 예쁜데, 게 중에는 천박한 생도 잇다. 그리고 너무 풍성하여 겸손해 보이지 않고, 너무 나대는 것이 기분이 나쁘다.

진달래는 ‘진’과 ‘달래’가 합쳐진 이름이다. 즉 ‘달래 꽃’을 가리키는데, 그보다 더 좋은 꽃이라 하여 ‘진’이 붙은 것이다. 달래는 '달려있다'는 뜻인지, '다래'의 달래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진달래는 먹을 수도 있고 약에도 쓸 수 있어 '참꽃'이라고도 불리며, 한자어로는 '두견화(杜鵑花)'라 한다. 옛날 촉나라 임금 두우(杜宇)가 억울하게 죽어 그 넋이 두견새가 되었고, 두견새가 울면서 토한 피가 꽃으로 변하였다고 하여 '두견화'라고도 한다. 이 설화는 진달래의 꽃말인 ‘절제’와 관련이 깊다. 한방에서는 '두견화' 또는 '만산홍'이라 하여 꽃을 약으로 쓰는데, 혈액 순환을 활발하게 하여 기침, 고혈압, 월경 불순 등의 증상에 처방하였다.
 
우리나라에 '화전 놀이'라는 민속이 있었는데, 이는 진달래꽃이 만발한 3월 삼짇날 부녀자들이 진달래로 전을 부쳐 먹고 춤추며 노래하고 하루를 보내던 놀이이다. 이것을 먹으면 한 해 동안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또한, 진달래꽃이 두 번 피면 가을 날씨가 따뜻해 지고, 꽃이 여러 겹으로 피면 풍년이 든다고 믿기도 하였다. 진달래꽃으로 빚은 진달래 술은 봄철의 술로 사랑 받았다. 특히, 충남 당진의 면천 진달래 술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명성이 높다.
 
진달래는 오랜 시간 전국에 걸쳐 살고 있어서 인지 예술 작품부터 생활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다/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고 한 김소월의 <징달래꽃>도 있고, 여기에 곡을 붙여 노래한 가요도 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피는 곳에 이 마음도 피어~"로 시작되는 가곡도 많이 불린다.
 

진달래꽃/이진흥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온 몸 구석구석
오들오들 그리움이 피었습니다
 
가슴 속 관류하는 고통의 핏줄
바위틈에 숨겨진 화려한 절망들이
봄바람에 터져서 피었습니다
 
향기로운 당신 말씀 가혹하여
함부로 찢어져서 빠알갛게
온 산에 철철철 흘렀습니다
 

2
진달래는 개나리와 함께 우리 땅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한국 대표 봄 꽃인데, 요즈음은 진달래와 헷갈리는 철쭉이 온 거리를 수놓고 있다. 오늘 아침은 모양과 색이 비슷한 진달래와 철쭉의 차이점을 살펴 본다. 가장 쉬운 방법은 꽃이 활짝 피었는데 잎이 없다면 진달래, 무성한 초록 잎과 함께 꽃이 피어 있다면 철쭉이다.
 
그 다음은 꽃잎의 생김새로 구분할 수 있다. 철쭉 꽃잎에는 짙은 색의 반점이 있다. 이 반점은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꿀을 분비하는 기관으로 꿀 샘 또는 밀 선(蜜腺, honey guide)이라고 한다. 이 '허니 가이드'는 꿀이 없는 줄 알고 그냥 지나쳐 가려는 나비와 벌에게 "가지마. 여기 꿀 있다"고 붙잡는 역할을 한다. 곤충이 꿀을 먹으려면 아무래도 암 술이나 수술 위에 앉게 되고 이때 번식을 위한 꽃가루를 묻히는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이렇게 지혜롭게 '꽃가루 받이' 전략을 사용한다. 하지만 진달래 꽃잎에는 밀선이 없거나 있더라도 철쭉보다 옅다. 그러나 진달래 이파리를 비벼보면 레몬 향 같은 향이 난다. 자신을 방어하는 물질을 만들어내서 애벌레 잎을 갉아먹지 못하게 막는 작전이다. 이 세상 모든 생명들은 저마다 스스로 디자인하고 있다.
 
그리고 철쭉은 꽃 받침이 있지만, 진달래는 꽃 받침이 업다. 철쭉과 진달래는 잎의 끈적거림으로도 구분할 수 있는데, 철쭉은 진달래와 달리 끈적거림이 있기 때문이다. 단일 품종인 진달래의 꽃은 주로 분홍색이며, 드물게 흰색 꽃을 피우는 흰 진달래도 있다. 품종이 다양한 철쭉은 꽃의 색도 여러 가지이다. 일반적인 철쭉 꽃의 색은 진달래와 같은 분홍색, 흰색이지만, 철쭉의 한 종류인 영산홍은 붉은 색, 흰색, 분홍색 등 다양한 꽃을 피운다. 이 이외에도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해 '참 꽃', 독성이 있는 철쭉은 먹을 수 없는 꽃이라 해 '개 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앙상한 가지에 잎이 없이 분홍 빛만 피어 있다면 진달래이고, 꽃과 잎이 동시에 피어 있는데 꽃에 반점이 많고, 수술의 개수가 8개 이상이면 철쭉이고, 꽃과 잎이 동시에 피어 있는데 꽃에 반점이 없고, 수술의 개수가 5개이면 영산홍이다.
 
끝으로 진달래 피는 4월이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다시 4‧19날에’>는 시조가 가슴에 뭉클 솟아오른다. 봄이 오면 앞산 뒷산 지천으로 피어나는 연분홍 진달래꽃, 누구나 반기고 좋아한다. 시인은 산하에 활짝 피어 있는 진달래를 보며 4‧19 혁명 때 희생 당한 젊은이들의 넋을 떠올린다. 불의에 항거 하다 총탄에 피 흘리며 죽어간 젊은 넋들의 한이 무더기 무더기 꽃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얼마나 많은 목숨의 희생인가? 피로 물든 그날의 목숨들이 꽃 사태로 비유 되어 속절없고 황망하고 애잔한 분위기를 연상하게 한다. 시인은 “그렇듯 너희는 지고/욕처럼 남은 목숨,(…)”이라 현실의 삶을 부끄러워한다. 다른 한 편, 역사 속 숭고한 넋들을 간절히 추모하며 그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아 살아있음이 욕되지 않겠다는 절규로 들린다.
  

진달래-다시 4.19날에/이영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2
우리는 최근 "과물 엘리트". 즉 ‘시험권력’ 고시 엘리트들의 민 낯을 보았다. 이런 말들이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너무나 이상한 일을 많이 하는데, 자기들끼리 싸여 있다 보니 자신들이 얼마나 이상한지 판단을 못하는 것 같아요.” “몇달 동안 그자들의 민 낯이 얼마나 초라한 지 분명히 알게 됐죠.”  내란 사태가 드러낸 엘리트 관료, 정치인들의 민 낯을 우리는 다같이 보았다는 거다. 3년도 안 되는 기간, 윤석열 정부의 어이없는 실책 릴레이와 비현실적인 친위 쿠데타, 그로 인한 자멸로 치러지는 조기 대선이 40일 앞으로 다가왔다.

사전은 ‘엘리트’를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지난 3년간 윤석열과 그 주변 엘리트들이 곳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진창들을 만들어 놨는지, 그 그림자들이 얼마나 길게 드리워 있는지 우리는 모두 목도했다. 각종 외교 참사와 공천개입 의혹, 끝을 알 수 없는 의료대란과 R&D 예산 삭감, 수 없는 ‘입틀막’, 소위 ‘이채양명주’라는 권력형 시리즈 비리 사태, 급기야 내란괴 탄핵 사태까지. 대통령의 한마디에 소신 없이 맞장구친 엘리트 관료들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한 우익 언론은 칼럼을 통해 ‘엘리트 리더’의 등장을 콕 집어 다음과 같이 찬양했는데, 지금 보면, 얼마나 웃기는 언론 기자의 말인가? “윤석열의 등장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정 환경과 전문 교육을 바탕으로 한 엘리트들이 리더로 부상(浮上)한 일이다. (중략) 윤 대통령은 대학교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70년 건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서울대를 제대로 나온 대통령이 됐다. (중략) 이것은 우리나라의 지도자상(像)을 정상화하는 의미가 있다.”

이런 엘리트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 사회 교육 현실에 쓴 소리를 해온 김누리 중앙대 교수(<경쟁교육은 야만이다> 저자)는 최근 언론에서 “한국 사회의 지배 엘리트는 대다수가 ‘또 다른 윤석열’”이라며 “근원으로 거슬러가면, 윤석열을 키운 것은 극단적인 능력주의 경쟁교육이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교실’이 괴물 윤석열을 잉태한 모태”라고 질타했다. 이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문제를 나의 <인문 일지>에서 여러 번 지적했다.

이런 문제를 지적한 경향신문의 송현숙 후마니타스 연구소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최근의 기사들을 보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다. 더 놀아도 부족할 나이에 7세, 4세 고시라는 말이 나온다. 영유아, 초등학생 대상 유명 학원의 레벨 테스트를 일컫는 말이다.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일찍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해 명문대에 입학하고 또 다른 윤석열, 또는 윤석열 주변의 지배 엘리트들로 커 주길 기대해서다. 극단적인 조기 경쟁교육은 ‘세상에 이런 일이’ 식으로 외신의 주목을 받았고, 교육시민단체에선 이를 ‘아동 학대'로 규정해달라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학대’ 외의 이름이 없다. 걷기와 동시에 경쟁을 내면 화하는 아이들이 어떤 어른이 될지 자명하지 않은가. 끔찍하다." 나는 아이가 없어서, 그리고 시골에 살아서 별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골에도 아이들이 학원에 가느라, 놀이터에 없다. 우리 어린 시절에서 꿈도 꾸지 못한 좋은 시설의 어린이 놀이터에 어른이나 동남 아시아에서 온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뿐이다. 

2022년 칼럼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얼마나 한심한 소리인가? 언론의 기자들이 썩었다. 소개한다. 지금 읽으니까 열불이 난다. "우리는 비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최고에 이르는 것을 두고 ‘개천에서 용(龍) 난다’고 한다. 과거에는 통했다. 이제는 아니다. 이제 용은 개천을 뚫고 솟아나는 것이 아니고 시스템에 따라 교육받아야 한다. 자기만 잘나고 똑똑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주변이 모두 똑똑한 환경에서 같이 자라야 부정(不正)을 배격하고 공정을 배운다. 이제 대한민국도 그런 시스템을 가질 자격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소위 집안, 학벌 좋은 엘리트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자는 얘기다. 내란 사태의 와중에도 각종 꼼수가 등장하고, 반성의 말 한마디 없이 다른 엘리트를 추대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 권력의 편에서 영향력을 계속 누리겠다는, 왕당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요즈음은 서울 강남에서 용이 난다. 상위 20%와 하위 20%의 사교육비 차이는 6배가 난다는 통계가 나온다. 기회의 평등은 조건이 좋은 사람에게는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우 나쁜 것일 수 있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우화는 잘못된 것이다. 둘은 육지에서 같이 뛰면 안 된다. 이들은 조건이 다른데 경주를 한 것이다. 거북이는 물에서 더 빨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거북이가 이긴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들이 이런 신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보아라.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열심히 하면 된다." 

실제로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설령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해도 그는 이미 개천 사람들을 대변하지 않는다. 과거 신민 교육의 대상이었던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은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 점차 고객이 되었다는 게 문제이다. 교육은 존재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소유를 위한 수단이 되었고, 학생들은 시민이 되기 전에 고객이 되었다. 교육의 세 주체 중 학부모회만 법제화된 일이나 교사들이 각종 잡무 외에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는 일, 또 학생들이 교실에서 태연하게 잠을 자거나 학원 강사가 학교에 초빙되는 일 등은 모두 학생들이 시민이 되지 않은 채 고객이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시민은 자신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에 대한 의식을 갖지만, 고객은 구매력을 행사할 뿐 의무와 책임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고객들에겐 신민의 습성이 아직 남아 있다. 자율적이지 못하고 타율적이며 집단 귀속성이 강하다.

그래 나는 모든 집단에서 탈퇴하고, 시민으로 '홀로 서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 시민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채 구매력을 가진 집단의 팬덤화, 특히 미디어의 장에서 이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무엇보다 구매력에서 비롯된다. 이런 식으로 ‘정치의 종교화, 팬덤화’와 함께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가 없는 한국의 ‘죽은 교육’이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회의할 줄 모르게 만듦으로써 그 어느 사회보다 확증편향의 함정을 깊고 공고하게 팠다는 점에서 그 연유를 찾는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회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와 토론을 거의 하지 않는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대신 암기한다. 그것도 정답이라는 고정된 형태로다. 생각하는(=회의하는) 과정 없이 고정된 정답을 의식세계에 주입한 우리가 고집불통이 되는 만큼 확증편향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한국 사회는 설득이란 말은 있어도 설득이 되지 않는 사회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도 남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나 또한 아무 한테도 설득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양 살아간다. 이런 사회 구성원들에게 확증편향이 한번 빠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함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게다가 ‘나’로서 생각한 적이 없으므로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지혜도 갖기 어렵다. 나의 자리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겠는가? 한국인의 확증편향을 강고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확증편향에서 벗어나기, 그것은 나부터 ‘회의하는 자아’가 되는 길 말고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런 전제 아래 어렵더라도 이웃을 설득하는 수밖에.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교육이 펼쳐지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해서 "괴불 같은' 엘리트들이 더 무섭다. 왜냐하면 생각 없이 부패하기 때문이다.


3
미국 정치학자 마이클 존스턴은 저서 <<부패의 증후군>>에서 국가 부패 유형을 4가지로 나누며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의 대표 국가로 한국을 지목했다고 한다. 각계 고위층 인사들이 밀접하게 연결돼 이익을 독점하는 형태의 합법적 부패를 가리킨다. 현재의 내란 사태는 한국 사회의 부패 증후군이 곪아 터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내란 사태를 통해 뜻밖의 소득이 있었다. 그것은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권력 엘리트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 대선은 다시는 '괴물 같은' 엘리트들에게 권력을 줘선 안 된다는 것, 괴물 엘리트들을 양산하는 시스템과 교육을 바꾸고자 하는 다짐에서 치러져야 한다. 부패가 곪아 터진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게 해야 한다. 일신의 안전과 사리사욕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용감하게 증언한 김형기 특수전사령부 제1특전대대장,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장,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 등에게서 희망을 본다. 경쟁 대신 공동체, 함께 잘 사는 길을 고민하는 새로운 엘리트들의 부상을 꿈꾼다.

4
내가 <인문 일지>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꿈꾸는 공동체가 "인간-다움의 공동체"이다. 여기서 인간-다움은 짐승과 구별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즐겨 읽는 김월회 교수의 글에서 배웠다. 인간과 짐승은 별 차이가 없으나, 아주 작은 차이가 있다면, 가르는 기준은 '도덕'이다. 인간만이 의로움을 지니기에 사회를 일구며 인간 답게 살게 된다. 따라서 도덕적이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 단지 짐승일 따름이다. 이때 짐승은 ‘비인간’을 뜻한다. 옛 사람들이 인간을 짐승이라고 칭할 때는 인간 축에 끼지 못하는 존재라는 뜻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인간 존재는 인간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될 수 없다. 인간 사회란 다름 아닌 인간다운 인간들의 공동체이기에 비인간이 끼지 못함은 당연하다. 물론 비인간 존재도 인간 사회에 함께 있을 수는 있다. 소나 개, 닭 같은 동물이 인간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을 인간 답게 해주는 근거인 의로움 등의 도덕은 오늘날 민주 사회로 치자면 국민에게 요구되는 민주적 제 가치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대신 국민은 민주적 제 가치를 익히고 이에 따를 의무를 진다. 좌우의 이념 투쟁이나 여야의 진영 경쟁도 이러한 기본 전제를 지킨다는 대 전제 아래 비로소 정당화된다. 게다가 우리가 구현하고 빚어갈 사회가 인간 다운 사회여야 한다는 점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다. 인간 사회는 누가 뭐라 해도 인간 다움의 공동체여야 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민주 헌정 질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훼손하며 스스로를 인간 범주에서 이탈시킨 이들의 목소리를 인간의 목소리와 대등하게 다룰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래 불편한 진실인 한국의 부패한 엘리트들을 고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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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다움 공동체를 말하다 보니, 인간이 짐승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이 소환되었다. 우리 사회의 사이코패스("狂人, 광인)는 짐승보다 더 비인간적이다. 사이코패스의 사전적 정의가,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이 없으며,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에 행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후회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공감이 타인을 배려하는 인간 다움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나의 편안함이 행동의 동기가 된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하인리히의 재판을 보면서 놀란 것은 악행 자체의 논리적 완결성(치밀하게 준비해 근면하게 학살했다는 점에서)에 비하면, 그 일을 행한 자의 정신적 수준은 너무나 천박하다는 점이었다. 하인리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했다고 대답한다. 악행의 이유는 그렇게 짧거나 사실상 거의 없다. 악행은 정신적 수준이 저열하고 천박한 사람도 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악행의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선행을 행하려면 수준이 높아야 만 한다. 세 살배기도 악행은 저지를 수 있지만, 선행을 하려면 좀더 배워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악행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천박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악이 선만큼이나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악은 선의 결여일 뿐이다.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바로 악행이다. 선을 행하는 건 힘들다. 하지만 악을 행하는 논리는 너무나 빈약하거나 없다. 악은 그저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들의 행위일 뿐이다. 인간-다움의 기준인 도덕적, 아니 윤리적 행위는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시작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와 타인이 서로 다르며,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본심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전제가 없다면 선을 행하는 게 어려워진다.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볼 수도 없기 때문에, 사이코페스는 나와 남이 다르다는 것을 몰라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없다. 

사이코패스는 악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처럼 생각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불쌍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이코패스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그래서 벌어진다.

이들은 흔히 소시오패스(sociopath), 즉 반(反) 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며 이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 외 자신을 잘 위장하며 감정 조절이 뛰어나다. 인생을 이겨야 하는 게임이나 도박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이용할 타깃으로 생각한다. 매우 계산적이다. 겉으로는 매력적이고 사교적으로 보일 수 있다. 어릴 때 비정상적으로 잔인하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재미 삼아 한다. 자신의 잘못이 발각되면, 거짓으로 후회, 반성을 하거나 동정심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순진함을 강조한다. 거짓말을 하는 데 능숙하다. 일반인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들통날 까 봐 긴장하지만, 소시오패스는 양심이란 사전 속 단어이기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내 생각으로는, 지적 장애인은 계산하는 데는 문제가 있어도, 감정적으로 자녀를 안아주고 보살피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회적으로 지적 장애인보다 계산과 이성만 발달한 소시오패스가 훨씬 더 위험하다. 소시오패스는 가장 빨리 강자의 위치에 도달하지만, 가장 빨리 내려오게 된다. 히틀러처럼 말이다. 오래 생존하는 이들은 감정이 발달한 이들이다. 오직 지적 능력만 키운 사람은 결국 가장 빠르게 도태되기 때문이다. 오늘 화두인 '괴물 같은 엘리트'들이 지적 능력만 키운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말이나 행동을 거칠고 비열하게 한다.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게 적절한 감정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수명이 긴 것도 감수성이 더 발달해서이다. 능력 있고, 못된 인간, 감정에 문제가 있는 인간 즉 그런 독재자들이 힘이 셀 때는 숨죽이고 있지만, 힘이 약해지면 거세게 그들을 제거해왔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세상의 가치가 뒤흔들린다. 영혼과 분리 되지 않은 온전함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를 꿈꾼다. 그렇게 희망한다. 그러려고 우리는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거다. 겸손이 넘치는 공동체를 꿈꾸면서, 내가 철쭉보다 진달래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철쭉은 너무 오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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