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탐색이나 검색이 아니라, 사색이 필요하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4. 21. 10:50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20일)

오늘 아침 노자 읽기를 하루 멈추고, "선택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생각이다. '나로 살고 싶다'는 말이다. '탐색'이 아니라, '정착'을 꿈꾸겠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무한 탐색 모드"(피트 데이비스) 속에 살고 있다. 선택지가 너무 많다. 그래 포모 증후군이라는 말이 나왔다. ‘포모(FOMO)’는 ‘Fear Of Missing Out’의 약자로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 가’라는 공포를 말한다. “나만 없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거다. 분명한 건 두려움은 안개처럼 실체가 없지만, 공포는 실체가 있는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너무 선택지를 열어 두는 것이다. 이게 요즘 세대들의 특징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특징을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 표현했다. 현대인들은 어느 한 가지 정체성, 장소, 공동체에 스스로 묶어 두기를 원치 않으며, 그래서 마치 액체처럼 어떠한 형태의 미래에도 맞춰서 적응할 수 있는 유동적 상태에 머무른다는 거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탐색만 하는 거다. 얼마 전에 고인이 되신 이어령 교수는 "시점을 바꿔 보면 대상이 달라진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알려면 검색하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려면 사색하고, 미래를 알려면 탐색하라. 검색은 컴퓨터 기술로, 사색은 명상으로, 탐색은 모험심으로 한다. 이 삼색을 통합할 때 젊음의 삶은 변한다”고 멋진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군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한다. 문제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영역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곧 구원이다. 왜냐하면 앎은 무지를 알아차리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은 질문이 없고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태도이다. 탐색이나 검색이 아니라, 사색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난 20세기는 이분법이 지배한 시대이다.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등으로 이분법이 지배한 세기이다. 그리고 인생은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트라이앵글만 잘 지키면 된다고 여긴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디지털 혁명과 함께 낯설고 기이한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 세상이다. 그 안에 온갖 지식과 정보가 그득하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사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도래하면서 기술과 자본이 혁명을 주도하며, 인공지능의 시대라는 4차산업혁명이 진행중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그 기술을 활용하는 인식의 힘 역시 고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의 힘이 고양되려면, 생명력인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에로스의 충동에 로고스의 비전을 부과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에서 로고스로 변주되어야 한다. 그 때 좋은 방법이 글쓰기이다.

그 글쓰기가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 주는 이유는 여럿이다. 첫 번째, 글을 쓰려면 사유가 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생각이 명료하고 맑아야 한다. 그래야 언어가 생성되고 논리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투명한 언어, 논리적 일관성을 지향하게 되면 욕망의 불꽃은 저절로 사그라진다. 두 번째 글을 쓰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을 하려면, 생리 구조가 수승화강(水丞火降)의 상태가 되어야한다. 수승화강은 평정의 다른 이름이다. 세 번째, 글쓰기에는 어떤 노동이나 운동보다 고강도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욕망을 잠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방향으로 투여한다는 뜻이다. 네 번째, 글이 생산될 때의 성취감은 짜릿한 쾌락과는 클라스가 다르다. 가치를 창조하는 기쁨의 파동은 온 몸을 촉촉히 적셔 준다. 이게 글쓰기가 주는 마력이다.

그리고 오르텅스 블루의 <사막>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그 사막에서 그는/너무도 외로워/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도시는 자주 사막에 비유된다. 도시의 이미지가 삭막한 탓이다. 도시가 사막이라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래알이다. 도시라는 사막에는 모래와 모래를 이어주는 접착제가 없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늘 비어 있다. 도시는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이다. 검색에서 사색으로, 접속에서 결속으로 옮겨야 한다. 검색과 접속의 디지털 문명에서, 뒷걸음질로 걷거나 멈춰 서는 것이 자발적 사색이다. 그리고 그런 사색과 더불어 타인의 처지에 공감할 때 사회적 결속이 생긴다.

'포모'의 반대 개념이 ‘조모’(JOMO·JOY OF MISSING OUT)이다. 선택하지 않아서 놓칠까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지 않아서 생기는 즐거움을 뜻한다. 가령 결혼하면 잠재적 연인을 찾을 기회는 사라진다. 하지만 기회를 포기한 대가로 안정감이 찾아온다. 더 이상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포모’ 증후군이 미래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해독제는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삶이 ‘유한하다'는 명확한 인식이다.

그리고 막상 우리가 열광하고 사랑하는 건 선택 가능성이 무한정 열려 있는 세상이 아니다. 매번 바뀌는 가게가 아니라, 60년째 영업 중인 노포(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들이며, 잠재적 연인이 가득한 데이트 앱이 아니라 50년 헌신한 노부부 이야기인 것이다. 배고플 때 먹는 밥이 가장 맛있다. 기쁨을 극대화하는 건 역설적으로 절제다.

오늘은 24 절기상 곡우(穀雨)이다. 그런데 비 소식은 없다. 곡우는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에 있으며, 봄의 마지막 절기에 해당한다. 곡우의 ‘곡(穀)’은 곡식을 뜻하며 ‘우(雨)’는 비를 말한다. 두 단어가 합쳐져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상들은 곡우를 한 해 농사를 책임질 비가 내리는 중요한 시기로 여겼다. 그래서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다양한 속담들이 전해 지고 있다. 곡우 때는 농사 뿐 아니라, 조기 잡이도 활발해진다. 이 시기에 잡은 조기는 조기 중 으뜸으로 '곡우 사리'라고 부른다. 농사를 중시했던 과거에는 벼를 파종하는 곡우 시기에 죄인도 잡아가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등 중요한 절기였다. 몇일 전 <경향신문>에서 "곡우"라는 시를 알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 공유한다.

곡우/정우영

봄비 그치자 아침 이내
포근포근 산자락을 감아돈다.
느른하고 불안하다.
이런 날이면 천산 누옥(漏屋)의 우리 어머니,
육탈의 가벼운 몸 또 근질근질하실 게다.
천명(天命)도 아랑곳없이 떨쳐 일어나
요정처럼 날래게 묵정밭을 일구실 게다.
어허, 저기.
천산에서 뜯어 흩뿌리는 모정(母情)이
무지개 되어 훨훨 땅바닥에 날아내린다.
눈이 부셔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너무 환해서 비릿한 눈물 번진다.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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