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4월 18일)
다음 3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급적 멀리해야 할 사람들이다. 참고: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프리드리히 니체-김신종 역, 포레스트북스)
▪ 가까운 사람 끼리도 우열을 따진다. 주변 사람들끼리 비교하며 교묘히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한다.
▪ 어떤 상황에서도 나쁜 점을 찾는다. 예컨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 나 혼자만 행복해지길 바란다. 아니다. 그걸 넘어 나 빼고 모두가 불행하길 원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나르시스트'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나르시스트'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타인의 좌절을 바는 사람이다. 니체는 "가장 악질적인 인간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남을 망가뜨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의 못남을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질투를 심고, 서로를 신뢰하던 이들은 이간질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나쁜 관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 받지만, 사람 때문에 망가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니 우리를 망가뜨리는 사람에게서 빠르게 멀어지는 것이 좋다. 때에 따라서는 사람을 싫어해도 괜찮다. 아니면 불가근불가원 하는 거다.
나는 한자 성어,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공자가 한 말이다. 소인배를 대할 때 너무 가까이하면 다치기 쉽고, 너무 멀리하면 해코지하므로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말이다. 어쨌든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하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이라는 이름으로 이 거리 두기를 강조했다. 그는 "용기란 무모하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은 상태라 했고, 절제란 방종도 아니고, 무감각하지도 않은 상태 그리고 관대 함이란 낭비도 인색도 아닌 상태이고 긍지란 오만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은 것"이라 했다. 이 거리 두기가 인간들끼리 의 관계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의 ‘사이’와 ‘사이’의 틈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단어도 한자로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을 쓴다. 좋은 관계를 ‘사이 좋다’고 우리는 표현한다. 좋은 사이란 뜨겁게 가까운 거리도, 차갑게 먼 거리도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36.5도의 따뜻함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무수한 사이에 겨우 존재하는 것이다. 겨울과 봄 사이, 밤과 아침 사이, 아이와 어른 사이, 이해와 오해 사이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 그 무수한 사이 속에서.
여기서 사이는 '거리 두기'이고 '틈' 아니 '간격'을 벌리는 데서 나온다.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공간과 시간, 내가 장악해야 할 순간에도 모두 간격이 있다. 인간, 시간, 공간, 순간, 모두 다 간(間)자가 들어간다. 불가근불가원이라는 이 절제된 간격이 야말로 내가 너를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표현이다. 그래 '간격', '틈'은 사랑의 완성이다. 그래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 온다"는 말처럼, 사랑은 상대방과의 '틈', 아니 '간격'을 존중하는 연습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틈', 아니 '간격'은 상대를 온전한 인간으로, 대상을 온전한 세계를 가진 가치로 인정하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사랑하여 그 뜨거운 불꽃에 데이고, 그것이 두려워 너무 멀리 떨어져 얼음처럼 차갑고 외롭게 지내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홀로 조용한 방에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생"긴다고 말했다.
나와 너 사이를 매어주는 위대한 감정인 사랑에도 '틈', 아니' 간격'이 필요하다. 물론 절제 된 '틈', 아니 '간격'이다. 이 '틈'이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절제된 '틈', 아니' 간격'은 사랑의 완성이다. 배철현 교수가 자신의 책, <<정적>>에서 인용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사랑의 의미에 대한 편지를 공유한다. "사랑은 어렵습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완수해야 할 가장 어려운 임무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궁극적이며, 인간이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며, 인간이라는 마지막 증거입니다. 사랑은 준비입니다. (…) 사랑은 합치는 것, 상대방에게 나를 온전히 주는 것, 그리고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연합은 분명하지 않고, 완결되지 않고 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종속 시키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려면 눈이 필요하다. 하지만 눈은 물체의 상이 통과하는 렌즈일 뿐이고, 사실 물체를 보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딴 데 있으면 눈으로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에 "심부재언 시이불견(心不在焉 視而不見)"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를 것이다. "우리가 '관심(關心)'을 두지 않으면 사물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관심은 어떤 것에 마음을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준비 단계이다. 그런데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거기서 한 발 나아가 ‘마음으로 보는 관심(觀心)'의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배연국)
부처가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고는 제자 아난다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부처께서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쥔 모습을 봅니다.” “무엇으로 보느냐?”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난다야, 눈은 다만 대상을 비출 뿐이고, 보는 것은 마음이니라.” 진짜 세상을 보려면 바깥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강조한 것도 눈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마음으로 보는 법을 알려준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깨어 있지 않고 욕심에 따라 살다 보면, 누구나 나를 잃어버릴 수 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그것 때문에, 나는 그 양만큼 고통을 받는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함께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럽다. 나를 지키는 싸움은 쉽지 않다. 왜?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 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잘 싸우는 방법은 '싸움의 타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가령, 누군가와의 갈등을 빚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존재 전체'와 싸운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특정한 생각과 싸우는 것이다.
불가원 불가근/조정권
쓸데없는.
모임에
시간에
장소에 유혹 받는
내 엉덩이에.
핸드폰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시간을 툭툭 건드리는 손에
야단치는
마음이 있었으면.
볼륨 낮추고 시간 붙들어 앉힌
마음처럼.
심리학에서 나르시시즘(Narcissisme, 과도한 자기애)은 마키아벨리즘, 사이코패스 성향과 함께 ‘악(惡)의 3요소(the Dark Third)’로 분류된다. 자아도취에 빠진 '과도한 자기애'는 주위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반사회적인 것이 특징이다.
'과도한 자기애'를 지닌 이들의 증상은 대인 관계에서 남을 위할 줄 모르고, 자신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느껴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의 능력에 대해 비현실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무제한적인 능력, 재물, 권력, 높은 지위, 아름다움이나 이상적 사랑을 바란다. 간혹 이러한 목표가 달성된다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다고 실망한다. 또한 존경과 관심의 대상이 되고자 끊임없이 애쓴다. 내면의 충실보다는 겉치장에 더 관심이 있고, 친구를 깊이 사귀는 것에 별 관심이 없고, 멋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비판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과 분노로 인해 상대를 모독하고,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실의에 빠질 때는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 수치심, 허무감으로 괴로워한다.
다음과 같은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그렇다.
▪ 끼부림이 심하다. 나르시시즘이 있는 사람은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이 사람들이 상대방의 호의와 친절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수집해 상대방의 취미와 좋아하는 음식 등을 파악한 뒤,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의 ‘로맨티시스트’ 작전에 넘어가선 안 된다. 그들은 당신이 사랑에 빠진 순간, 사용가치가 사라져버린 당신을 ‘뻥’ 차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동정을 구걸 한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툭하면 아픈 과거나 불우한 가정 사에 관해 얘기함으로써 동정과 연민을 자아내곤 한다. 상대방의 흘리는 눈물을 바라보며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갈 때가 많다. 가령 상대방이 자신을 모함했다거나 자신을 ‘스토킹’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이는 물론 조직 내 한 사람을 자신의 ‘적’으로 돌림으로써, 다른 조직원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기 위한 그들의 생존 전략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연기자인 나르시시트들은 완벽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통해, 상대방이 하지도 않은 말과 행동을 스스로 했다고 믿게 만들기도 한다.
▪ 그들은 상대방에 대해 칭찬과 비난이 교묘하게 섞인 언어를 구사한다. 언뜻 들으면 칭찬 같지만 곱씹어 생각해보면 ‘기분이 나쁜’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런 언어 전략 외에도 그들은 인간관계에서 ‘당근’과 ‘채찍’을 지나치게 자주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을 조련하려 든다. 특히,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칭찬을 줄이고 비난 횟수를 늘림으로써, 상대방이 끝내 칭찬을 구걸하게 한다.
▪ 가차 없이 연락을 끊는다. 그들은 첫 만남에선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큼 헌신적으로 행동하지만, 당신의 이용 가치가 떨어진 후엔 살면서 옷깃 한 번 스친 적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당신을 무시할 것이다. 한편 연인 관계에서도 자기애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잠수를 자주 탄다. 이들은 당신이 보내는 모든 연락을 무시함으로써, 당신이 뭔가 큰 잘못을 했다고 믿게 한다.
▪ 자해‧자살 소동을 벌인다. 당신이 이별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무렵, 그들은 무릎을 꿇으며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자기 자신을 더는 사랑하지 않는 당신을 한 번 더 ‘조종’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으며 당신에게 사과를 구하고, 심한 경우엔 자해‧자살 소동을 벌이며 당신에게 또 한 번의 관심과 애정을 구걸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연기’에 속으면 안 된다. 이들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순간, 새로운 사랑을 기대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애성 성격 장애와 나르시스트는 약간의 뉘앙스가 있다. 다른 사람의 개별성을 인지 못하는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 소의 인물 나르키소스를 알아야 한다. 신화 이야기는 내일 이어간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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