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진실은 좋지만, 사랑이 더 좋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4. 14. 18:48

324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14일)

1
바실리 그로스만이라는 러시아의 소설 <<삶과 운명>>을 읽고 있다. 소설가는 인간의 승리는 모든 거대한 것, 추상적인 것을 이기는 구체적인 것, 개인적인 것에 있다는 주장을 한다. 내 일상의 삶에서 우리가 사는 이유와 의미를 발견하여야 한다. 어제 두봉 주교님에 대해 쓰면서 했던 말, "기쁘게 떳떳하게" 사는 거다. 소설 초반에 만난 문장이다. "잔인할 정도로 솔직해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솔직함이 두려워 솔직해지기를 마다하고 있었다."

솔직함과 정직함은 차이가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정직함'이고, '솔직함'은 내 마음 속의 판단이기 때문에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평화를 깨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말해서' 라는 발언은 관계를 망가뜨리기 쉬운 말이다. 그냥 말을 안 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나는 가끔 내 솔직한 마음을 말하여 대화 분위기를 '뻘쭘'하게 만들곤 한다. 이젠 솔직한 말은 가급적 안 할 예정이다. 그리고 아무리 가치 있는 말이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가슴 속에 들어가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된다. 그러나 가치 있다고 상대에게 함부로 충고하거나 '지적 질'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진실은 좋지만, 사랑이 더 좋다. ”상투스, 상투스“('거룩하시다'로 시작하는 성가): 입만 열면 거룩한 소리로 남 한테 부담을 줄 때 하는 말이다. 맛있게 먹고, 남을 비난하거나 그러지 않고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더 겸손하다. 남을 비난하지 말자, 타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데 평생을 바치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수녀회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기준은 하나였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나요"였다.

2
예수는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그 과정에서 배신과 고문,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외쳤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제27장 46절) 이를 아람어로 말하면,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이다. 예수는 당시 유대 근본주의자의 시기와 로마 제국의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 짧은 인생을 마친다. 이 이야기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 즉 큰 뜻을 위해 목숨마저 제물로 바치는 인물의 원형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희생에 관한 원형적인 이야기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희생을 통해 고통과 아픔을 일시적으로 멈출 수 있다. 희생이 클수록 효과는 크다. '사랑이 있는 고생은 힘들지 않다'는 말이 기억난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라면 최고의 선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 자신의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 고통을 줄이고 싶은 사람
▪ 존재의 흠결을 바로잡으려는 사람
▪ 능력 범위 안에서 최고의 미래를 끌어내려는 사람
▪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결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힘들어도 의미 있는 길을 따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고결한 희생은 절망에 찌든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3
이번 주말이 부활절이다. 이 부활은 충분한 고통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고통이 없는 부활은 존재할 수가 없다. 만일 누가 그런 부활이 존재한다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가짜다. 부활은 진주와 같다. 찬란한 진주는 연체동물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기생충이나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때, 서서히 형성된다. 충분한 고통과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견디는 과정이 곧 부활이다.

어제 수난 주일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를 만났다. 이 말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당신은 나를 버리십시까?'라고 해석된다. 이것은 시편 22장 1절이기도 하다. 예수는 믿었다. 인간은 모두 '신의 형상'으로 창조됐고, 그 형상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이며, 신의 형상의 가시적인 표현이 사랑이라고. 인간이 다른 사람,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대상도 신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사상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인권 사상이며, 누구나 신의 자녀라는 평등 사상이다.  

그런 깨달음은 당시 유대교 신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희생 제사를 지내고, 바리새인들이 해석해주는 성서를 일방적으로 듣고, 그들이 만들어낸 교리를 준수하는 것이 당시 유대 신앙이었다. 천국은 그런 종교 행위를 반복하고 교리를 수용할 때, 들어갈 수 있는 '복권'이었다. 그러나 예수에게 천국의 의미는 달랐다. 예수는 천국을 '신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할 때, 그 안에서 구축되는 이상적인 관계로 봤다. 그런 예수의 주장은 당시 종교인들에게 신성 모독이었다. 급기야는, 혹은 당연하게 당시 종교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안정을 원하는 로마 제국의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형으로 처형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당신은 무엇을 위해 저는 이렇게 버리십시까?'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다. '왜' 대신 '무엇을 위해'로 말이다. 실존적인 질문이다. 니체는 "인생에서 '왜'(why)를 아는 사람은 어떤 역경을 동반한 '어떻게 이럴 수가'(how)를 견딜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에게 묻는 질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혹은 "당신이 목숨을 바칠 만큼 높고 귀한 가치를 찾으셨습니까?" 부활은 충분한 고통과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4
예수의 십자가는 긍휼의 표시이다. 긍휼은 공감이나 연민을 뛰어넘는 환대의 정신에서 나온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라는 데, 우리는 환대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환대는 공감을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긍휼(compassion)로 치유에 나서는 행동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이다. 예수는 당시 절대왕권이 있던 세상에서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식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주장하시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셨다. 이는 예수의 몸의 부활보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했던 예수의 정신이 부활한 것이다.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에게 기꺼이 가는 길은 '예수가 하느님 이시다'라고 고백하고, 갖가지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지혜로 사람들과 뭇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5
예수가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가 된 것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원칙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원칙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과 주변, 특히 옆에 있는 나그네의 처치를 생각한 것이다. 엠마오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인식하게 된 유일한 통로는 '낯선 자'를 인식하고 그에게 비정상적인 만큼의 호의를 베푼 것이다. 예수는 '낯선 자'이다. '낯선 자'에게 행동으로 긍휼을 보여줄 때, 신의 신비가 우리 눈 앞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때 예수가 사라진 것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이 낯선 자가 '진짜' 예수라고 사칭하면서 종교 장사를 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예수가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로 예수를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 예수라 부른다. '신'의 특징은 '낯섦'과 '다름'이다.

6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복 많이 받아 남보란 듯이 잘 살고, 내세에서도 죽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한 것, 말하자면 "제 목숨", 지금의 '작은 자기'가 잘 되고 영속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작은 자기를 구원코자 하면 참 자기를 잃을 수밖에 없고, 작은 자기를 버릴 때 큰 자기를 찾게 된다는 거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진정한 제 목숨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역설의 공식이다.

우리가 흔히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데,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바스타제인'의 번역어이다. 이 단어가 지닌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이다. 구체적으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갈 때 이 동사를 쓴다. <<삶이 고통으로 휘청거릴 때>>에서 송봉모 신부님은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가는 것이다. 안고 가는 것은 단순히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 
물론 지고 가든, 안고 가든 짐은 짐이다. 그런 짐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바스타제인'의 느낌으로 어깨나 등으로 짊어졌던 짐들을 풀어 그것들을 품 안에 안는 자세로 바꾸어 보는 거다. 짐의 무게에 짓눌려 등이 자꾸만 점점 더 굽어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늙어가기보다는,  그 짐- 화나게 하는 것, 지치게 하는 것 -들을 눈 맞추고 자장가를 부르며 마음으로 아기를 안 듯 살포시 안아 보는 거다. 어쩌면 그 길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지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 <십자가>를 보면, 그에게 십자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십자가는 희생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다. 십자가가 희생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꽃 피우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십자가는 영광이다. 그 사실을 알면, 십자가가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감사할 줄 안다는 거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목숨을 바쳐 소중하게 그 십자가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거다.

루카 복음 9장 23절에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우선 나를 버리려고 애쓰는 거다. 원하는 것을 줄이고, 가진 것을 내려 놓고, 십자가의 짐을 늘 품으려고 하는 거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녹 9:23)라 말하지만,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 등에 지고 힘겹게 질질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품에 안고 가는 거다. 자신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기며 기뻐하는 마음으로 안고 가는 거다.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이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인내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을 소중히 간직한 채 자기 인생을 완성하는 거다.


십자가(十字架)/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7
정치 이야기를 가급적 <인문 일지>에 공유하지 않을 생각인데, 최근의 조기 대선 정국에서 '난가병'에 걸린 대선 후보들의 행동과 말 그리고 그 주변의 정치인들의 태도를 보면, 인간을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김동춘 교수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그가 보는 현 시국의 관점 디자인 3 가지를 <인문 일지>에 공유한다.

(1)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돌아왔듯이, 내란이 성공할 가능성을 우리는 완전 배제 못한다.
김 교수는 헌법재판소가 지난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을 파면했지만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대통령 몫의 헌법재판관 2명을 지명한 것, 국민의힘이 조기 대선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것 등을 주목했다. 그는 “12·3 비상계엄은 실패했지만,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돌아왔듯 윤석열의 내란이 궁극적으론 성공할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회의 결의로 비상계엄을 좌절시킨 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힘이지만 동시에 비상계엄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며 “정아은 작가가 저서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에서 말했듯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전두환씨가 천수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전씨 등 5·18 민주화 항쟁을 비롯한 과거 국가 폭력 연루자들에 대한 청산이 완전하게 이뤄지지 않은 것이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2) 최근 우리 사회에서 극우 세력의 부상은 ‘오래된 현재’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존하고 설득해야 할 우리의 이웃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지난 4개월간 부상한 극우 세력에 대해선 “오래된 현재”라고 표현했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반공주의적 사고가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넷 우익(인터넷 우익 세력)’과 SNS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진행된 ‘21세기적 쿠데타’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군사주의, 반공주의적 문화와 연결된 높은 연령대의 ‘구 우익’과 기독교 보수주의 집단들과 연결된 ‘신 우익’이 겹쳐진 것”이라며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과거처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일사불란한 동원이 기반이 된 게 아니라 넷 우익 등의 지지를 통해 부정선거론을 일반 국민에게 설득하고 주입한 형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윤석열과 측근 검찰, 군부 상층 관료 등 이번 내란 사태의 연루자들은 처벌의 대상이지만 그들을 지지했던 시민들은 공존하고 설득해야 하는 우리의 이웃”이라고도 했다. 이들에 대해서는 사회개혁과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부정선거론과 같은 극우적인 이야기에 기웃거리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국민이 윤석열을 뽑았기 때문에, 차기 정권에서는 우리 사회의 제도와 의식에 대해 성찰과 복기하는 과정도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했다.

(3) 조기 대선 국면에 필요한 일이 복기와 개헌 시기와 방법을 약속하는 거다.
김 교수는 “헌법과 법을 위반한 내란 세력에 대한 단호한 처벌과 함께 왜 현재와 같은 상황이 됐는가에 대한 성찰과 복기 과정이 중요하다”며 “윤석열을 누가 뽑았는가, 왜 이런 방식의 정치를 했는가 등에 대한 집단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통해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고리를 끊어내야 ‘진정한 내란 종식’이 가능하단 것이다. 특히 이번 조기 대선이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후 치러진 선거처럼 “후보 중심의 선거판”으로 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촛불당’이나 ‘응원봉당’이 만들어져 해당 당의 후보가 4~5% 정도의 지지율을 얻고 (더불어)민주당하고 협상하는 식의 프랑스식 결선투표제의 한국형 형태가 대안이 될 수 있다”면서도 “사실상 이상일 뿐 현재 한국엔 새로운 당을 만들 수 있는 동력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는 “그렇기에 민주당과 다른 야권, 시민사회 3자가 일종의 공동선거운동 본부를 만들고 내란 종식을 비롯해 개헌, 사회개혁 등 집권 후의 개혁 의제를 공동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개헌에 대해서도 “개헌 내용까지 공약으로 내세우지 못하더라도 개헌의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분명한 약속을 해야 한다”고 했다.

8
복기가 필요하다. 반추와 복기는 다르다. 반추는 이미 끝난 나쁜 상황을 곱씹고 곱씹는 것으로 심리학자들이 최악의 감정적 습관이라 부르는 것이다. 반추가 반복되면 나빴던 과거가 몸과 육체에 들러붙어 끝없이 악영향을 끼친다. 바둑의 복기 역시 경기가 끝난 후 이어진다. 바둑기사들은 경기 후, 자신이 둔 한 수 한 수를 분석해 무엇이 좋고 나쁨을 분석하고 더 좋은 다음을 준비하는데, 그것이 복기다. 반추와 달리 복기는 ‘이기든 지든’ 무조건 한다. 복기의 기능은 승리와 패배 모두에서 배운다는 대원칙에 있다. 조훈현은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패배한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아플수록 더 철저히 복기하는 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당장 이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지는 게 두려워 회피하거나 반칙, 꼼수를 쓰게 된다. 지혜로운 교육자가 아이의 성적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자체를 평가하는 이유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지는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해도 질 수 있다. 중요한 건 승리든 실패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행복과 쾌락이 다르듯 성장과 성공 역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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