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하게 꽃들은 자기 할 일이라고, 만발해 있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4월 12일)
지금 읽고 있는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저자인 파커 J. 파머는 '분리된 삶'이 어떻게 시작되는 지를 다음과 같이 잘 말해주었다.
▪ 어떤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와 내 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지만 듣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내면의 진실된 작은 소리를 외면한다.
▪ 좋은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나의 재능을 억압한다. 아니면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빠져든다. 일시적인 쾌락이나 중독에 빠져든다.
▪ 스스로 확신을 품고 다루거나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하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도 침묵한다.
▪ 내면의 어둠을 부정해서 그 어둠이 더 큰 영향을 미치게 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투사 해서 실제로는 존재 않는 '적'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남들을 속이고 있다고 느끼고, 발각될지 모른다고 불안해 하고, 자신의 자아를 부인한다는 사실에 우울해 하면서 터무니 없는 대가를 치른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도 역시 그 대가를 치른다. 무슨 말인 가하면, 영혼과 분리된 단층이 자신의 생의 한가운데를 갈라 놓고 그 단층이 뒤틀리며 벌어질 때마다 내 말과 행동이 영혼의 진실과 단절되면서 주위 사물들이 흔들리고 깨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주변의 자연 속에 있는 모든 사물들에 숨겨진 온전함을 알아차리는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한다. 쉽게 말해, 자연의 모습에서 온전함을 자주 맛보아야 한다. 나는 가까운 곳에 텃밭을 갖고 그 기회를 누린다. 그래야 우리는 쉽게 변하고 불신으로 가득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면, 자신의 온전성에 새롭게 눈을 뜨고, 우리의 불완전함 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갖게 된다는 거다.
온전함은 완전함과는 다르다. 온전함은 깨어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의식과 선택이라는 축복이자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소나무는 자신의 생각으로 고통을 자초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우리를 분리시키면서도 또 온전해지도록 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지녔다.
'분리된 삶'의 다양한 모습을 열거해 본다.
▪ 맡은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고, 그 일로 도움을 받게 될 사람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때이다.
▪ 꼭 그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도 기본적인 가치를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영위할 때이다.
▪ 영혼을 파괴하는 상황, 관계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이다.
▪ 진실을 감추고서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득을 얻으려 할 때이다.
▪ 갈등, 도전 그리고 변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숨길 때이다.
▪ 비판 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공격받을까 두려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추려 할 때이다.
분리됨은 개개인에게 나타나지만, 곡 그것은 다른 이들의 문제로 이어진다. 예컨대, 정치 지도자들이 '갈라진 혀'로 말하면 그것은 곧 시민들의 문제가 된다.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뉴스에 등장한다. 이미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당신이 부정한 마음으로 여기 우리와 함께한다면/당신은 우리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분리된 삶'은 윤리학의 실패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분리된 삶'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유권자에게 거짓말하는 정치가들은 윤리의식이나 확신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믿음을 자신의 삶에서 멀리 떼어놓는 습관에 빠져 있는 거다. 지식과 믿음이 삶과 분리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는 십 대와 이십 대를 거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을 조종할 능력을 주는 '객관적인' 지식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배운 윤리학은 위대한 사상가들과 그들의 이론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가 되고, 우리 내면을 형성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자료 수집 훈련이 될 뿐이 것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황매화이다. 이 꽃은 아름다운 꽃송이만큼 꽃말도 예쁘다. 꽃말은 '높은 기풍'과 '숭고'이며, 단아한 모습만큼 잘 어울리는 듯하다. 요즘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고, 맨발 걷기를 하는 길에 벌써 만발했다. 봄에는 참 여러 가지 꽃들이 핀다. 그러나 순서가 있었다. 제일 먼저 봄을 기다리는 꽃은 동백꽃, 성급해서 눈 속에서 핀다. 그 다음은 버들강아지-갯버들 꽃, 다음은 산수유와 매화 그리고 목련이 이어진다. 병아리가 생각나는 개나리가 거리를 장식하는 동안, 명자나무 꽃, 산당화 그리고 진달래가 봄 산을 장식한다. 바닷가에서는 해당화가 명함을 돌린다. 다음은 벚꽃이 깊어 가는 봄을 알린다. 그 사이에 마을마다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이 이어진다. 3월엔 개나리와 진달래, 4월엔 목련과 벚꽃, 5월엔 라일락이 피면서, 적어도 매화와 산수유가 봄을 앞서 알리고, 그 끝자락에 철쭉도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었다. 이렇게 꽃이 피는 순서가 있었는데, 지금은 동시 다발적으로 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병들어 꽃이 피는 순서가 무너졌다.
그래도 무심하게 꽃들은 자기 할 일이라고, 만발해 있다. 화란춘성(花爛春盛, 꽃이 만발한 한창 때의 봄), 만화방창(萬化方暢,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라 흐드러짐)이 시작되었다. 꽃들은 다른 꽃을 의식하지 않고 가장 나 답게 자신을 뽐낸다.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뽐을 내기에 바쁘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리(理), 원칙이 있는데 말이다. 꽃이 너무 일찍 피었다가 져버리면 그 꽃에 의존해 살아가는 곤충의 활동 시기와 어긋나 곤충이 살 수 없고 그 곤충을 먹고 사는 새도 살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꿀벌 폐사 현상이 양봉업자의 애를 태웠고 근래로 올수록 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꿀벌이나 새가 없으면 자연수분이 이뤄지지 않아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생태계에 큰 혼란이 초래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봄꽃을 구경하는 게 기쁘지만은 않은 이유다. 그래 순서를 다시 알려주고 싶다.
순서/안도현
맨 처음 마당 가에
매화가
혼자서 꽃을 피우더니
마을회관 앞에서
산수유나무가
노란 기침을 해댄다
그 다음에는
밭둑의 조팝 나무가
튀밥처럼 하얀
꽃을 피우고
그 다음에는
뒷집 우물가
앵두나무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피어나고
그 다음에는
재 너머 사과 밭
사과나무가
따복따복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사과 밭 울타리
탱자 꽃이
나도 질세라, 핀다.
삶에는 성실성(誠實性, integrity-정성스럽고 진실한 품성, integrity)이 중요하다. 성실성은 '온전하고, 이미 갖추어져 있고, 깨어지지 않은 상태나 성질'을 뜻한다. 나뉘지 않고 온전한 상태, 원래의 조건에 일치하고, 손상되지 않고, 섞인 것이 없는 진정한 상태에 있는 어떤 것을 말한다. 프랑스어는 Integrite인데, 생략이나 파손되지 않은 전체로 본래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유위(有爲)가 없는 무위(無爲)의 상태가 아닐까?
무위(無爲)는 말 그대로 하면 행위가 없음(non-action)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도식 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다. 도올에 의하면, 여기 '무'를 '없다'라는 명사로 보지 말고, '지운다', '버린다'라고 하는 동사로 보라 한다. 나는 그래 '무'를 그냥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비우거나 버리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법정 스님이 말하는 무소유도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게다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물성(物性)을 지키는 것으로 본다.
'무위'의 반대되는 개념이 '유위'이다.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것들로 무엇인가를 자꾸 하면 할수록 사태가 엉클어져 가는 상황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다음 같은 행위들이다.
▪ 인위적 행위
▪ 과장된 행위
▪ 계산된 행위
▪ 쓸데 없는 행위
▪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 자기 중심적 행위
▪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 억지로 하는 행위
▪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무위지사(無爲之事)' 또는 '무위지위(無爲誌爲-무위의 위)'는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으로 '함이 없는 함'이다. 파커가 말하는 "성실성"에서 <<중용>>에서 말하는 "지성(至誠)"이 소환된다. 이 이야기는 내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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