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채우는 힘 (4)

323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9일)
1.
꽃들은 저 마나 피어나고 지는 모습이 다르다. 우리 인간들도 저마다 살다 가는 길이 제 각 각인 것처럼. 동백은 한 송이 개별 자로서 피었다가, 주접스런 꼴 보이지 많고 절정의 순간에 뚝 떨어지며 진다. 매화꽃, 벚꽃, 복사꽃, 배꽃은 풍장을 한다. 꽃잎 한 개 한 개가 바람에 흩날리다 땅에 떨어져 죽는다. 산수유는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었다가 노을이 스러지듯 살짝 종적을 감춘다. 나무가 숨기고 있던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 같다고 김훈은 묘사한 적이 있다. 나도 내 삶을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부분이 있다. 산수유처럼. 그리고 길게 이야기 하고 싶은 꽃이 목련이다. 목련은 도도하게 피었다가 질 때는 지저분하다. 목이 부러질 듯이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 올리며 뽐내다가 질 때는 남루하다.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한꺼번에 뚝 떨어지지 않고 잎 조각들로 느리게 사라진다. 온갖 추한 모습을 보이며.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복효근)는 것인가?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꽃과 만나고 이별하면서, 행복한 봄의 한철이 지나간다.
현실은 봄이 왔는데도 봄이 아니라는, 여전히 춥고 아프고 외롭다는 원성이 황소바람처럼 거세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는 이야기는 없고 현저하게 나빠졌다는 수치만 줄을 잇는다. 나라 사정이 힘겨우면, 인구소멸 고위험 지역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경제는 물론이고 교육과 의료와 문화에서 취약한 부분이 수도권 도시에 비해 많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동네는 저녁 장사를 접은 식당과 가게가 한둘이 아니다. 임대를 내 걸은 빈 곳이 즐비하다. 또한 갖가지 행사들도 축소되거나 취소되었다. 문 닫는 가게가 잦은 만큼 빚은 무겁고,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폐교는 는다. 곤두박질치는 현실에 두 손 두발 다 들게 생겼으니 이제 정말 바닥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넋두리처럼 얹혔다. 형편이 나아지고 잇지 않다. 이젠 6월 3일이지나면, 정권이 교체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더 나아지길 희망할 뿐이다.
2.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다시 채우는 힘" 이야기를 이어간다. "자기 삶을 살아내는 이들은 거룩하다"는 문장부터 시작한다.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거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말이다. 영어로는 holiness이다. 세상의 속되고 부패한 풍습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먹고, 입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죄스럽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다. 그 그림자를 마치 없는 것처럼 가장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림자를 새로운 삶의 힘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옹두리(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상한 자리에 결이 맺혀 혹처럼 불퉁해는 것, 굳은살)를 볼 때 마다 상처를 딛고 상승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은 나무가 대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나무는 누구를 탓하지 않고 비애조차 내비치지 않으며 홀로 그 상처를 치유한다. 생명이 하는 일이다. 생명은 그랴 장엄하다. 아무리 싫어도 곤고해도 내색하지 않고 검질기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통해 세상에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 그런데 그런 생명을 '껌'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나쁘다.
나는 그림자의 역할을 안다. 그래 그림자가 찍힌 사진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그림자가 물리적 존재를 중첩하면서 비물리적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자 없는 물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림자 없는 성공을 싫어한다. 나는 더 깊고 진한 그림자를 좋아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낙인 찍기를 넘을 수 있는 하나의 바로미터이다. 낙인은 당파성이 다른 사람들끼리 만의 배제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자행될 때 더 아프고 치명적이다. 같은 진영이라면서 서로 욕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침소봉대하여 공격하는 사람들은 서로 방해하는 모습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배제한다. 서로 가까이 있어 조금 부딪힐지라도, 빛과 그림자의 어우러짐으로 서로 중첩되어 새로운 지형을 만들 때, 나는 거기서 어울림과 연대의 미학을 깨닫는다. 빛만 쫓아 해바라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타인들 속에 그림자로 묻혀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들, 타인들의 광선 속에서 그림자로 반짝이는 사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일상의 삶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할 생각이다.
업보/강민숙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나는 내가 무거워
햇빛 쨍한 날
내 그림자를
먹어버렸다
내 속이
시커먼 까닭이다.
'업보(業報)는 절대 번지수를 잊지 않는다.' 이 표현과는 다르지만 성경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가 그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는 주일 목사의 설교도 결국 업보에 관한 말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말도 전해진다. ‘인과응보는 시차(時差)는 있어도 오차(誤差)는 없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다. 한 개인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하나의 역할만을 담당하고 산다. 세상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우리는 '직(職)'이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성숙해 간다. 당연히 모든 행위는 사실 수행(修行)이며 거기에 자신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특정'한 역할(職)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業)한다. 이것이 바로 '직업(職業)'이다. 인간은 '직업'을 잘 수행함으로써 사회적이고 공적인 존재로 확장한다. 바로 '직업인'이다.
문제는 '업(業)'이다. 자신이 맡은 역할(職)을 전인격적인 태도로 대하느냐, 아니면 기능적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인격적인 태도는, 마음은 다른 곳에 두고 정해진 일만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의 궁극적인 의미를 살펴서 거기에 온 마음을 두고 기꺼이 불편함과 수고를 받아들여 조그마한 확장성이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하나의 수행처로 삼아야 한다. 그 역할을 통해서 자아가 완성되고 실현된다는 지속적인 각성을 하고,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마음이 떠난 상태에서 자신의 역할을 기능적으로만 대한다. '직'과 '업'이 분리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직업인'이 아니라 그냥 '직장인'이라 한다. 한 사회의 건강성과 진보는 구성원들이 '직업인'으로 사느냐, '직장인'으로 사느냐가 좌우된다.
그것을 떠나, 잘 사는 인생이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성실하게 직분(職分)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를 파블로 피카소는 조금 근사하게 변형시킨다. "삶의 의미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그 재능으로 누군가의 삶이 더 나아지게 돕는 것이다." 자신이 비록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한발 짝 더 내디뎌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감동을 준다. 이것이 바로 어떤 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모든 창의적인 일이나 사회적인 공헌 등은 우선 자신이 확장되어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공적인 역할로 자리잡은 경우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하나의 수고가 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수고가 있어야 세상은 더 나아지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더 성숙해진다.
3.
우리가 학문적으로 말하는 ‘성공적인 노화’의 조건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 학자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조금씩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든다.
- 육체적, 정신적 질병과 장애의 최소화,
- 인지적, 육체적 기능 유지,
-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유지다.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건강해야 사회 속에서 활동할 수 있고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뇌도 건강 해진다.
무병장수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유병장수(有病長壽)’의 시대인 요즘에는 어디가 아프더라도 삶의 질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해졌다. 하버드대 의대 교수이자 책, < <행복의 조건>>의 저자인 조지 베일런트는 성공적인 노화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며, 단순히 건강한 신체 상태를 넘어 주관적 행복감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통한 균형 잡힌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국 스탠퍼드대 로라 카르스텐슨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남은 시간을 의식하게 되면서 보다 의미 있는 관계에 집중하게 되고, 이를 통해 만족감을 극대화한다고 했다. 결국 노년기 만족감의 열쇠는 ‘누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의 삶이 충분히 좋았고 본인 삶에 만족하여야 하고, 말도 그렇게 하여야 한다. 이는 몸이 좀 불편했어도 자식과 손주들 그리고 가까운 이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자신의 삶을 든든하게 지탱해주어야 한다. 그러니 자기 것을 많이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나 만의 리듬으로 살며, 매일 걷는 길에 작은 변화를 주고, 오랫동안 미뤘던 사람에게 전화 한 통을 걸고, 스스로를 위한 소소한 목표를 세워보는 것. 그것 만으로도 노년의 삶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노인이 이런 삶을 살 수는 없다. 노년기에는 흔히 세 가지 고통인 ‘삼고(三苦)’가 따라온다고 한다. 외로움,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 문제다. 그래서 ‘노년에도 활기차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때로는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아가야 한다. 나이 들어 몸이 예전 같지 않아도 웃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4.
헌법재판소 결정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대등한 동료 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인간을 향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제도다. 이 신뢰는 모든 정치적 견해를 향한 것이다. 힘을 써서 타인을 내 쪽으로 끌어들이는 제도가 아니라 그 힘을 분배해 타인이 스스로 결정하게 만든 제도다. 그렇게 내려진 각각의 진실을 존중하며 나아가기로 한 제도다.
나는 민주주의라는 말보다는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말을 더 존중한다. 우리 헌법에 규정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은 국민주권주의 원칙이다. 국민의 능동적 정치 참여, 자유로운 투표, 반대 의견의 자유로운 형성 등을 뜻한다. 곧 대한민국의 헌법 질서는 대통령은 물론 어떤 국가권력이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함부로 제한할 수 없으며, 검찰이나 경찰은 물론 대통령이라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질서를 뜻한다. 헌법이 규정하는 자유도 그렇다. 대통령에게 있어 자유란 어떤 특정한 이념에 치우친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국민이 선출한 일꾼 답게 국가권력을 잘 통제해서, 국민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라는 거다.
이를테면 경찰을 통제해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철저하게 보장하고, 특정 사건에 대해 반복적으로 수 백 번씩 압수수색을 할 정도로 검찰이 준동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의 범위에서, 다른 대안이 없는 아주 특별한 최후의 경우에 제한적으로 진행하도록 견인하는 데 있다.
이때 말하는 질서는 전체주의, 권위주의 세력이 말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르다. 헌법이 규정하는 ‘질서’도 권력이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지배’라는 말도, 법률로 국민을 다스린다는 게 아니라, 권력자나 권력 기관을 법의 지배 아래 두겠다는 주권자의 의지의 표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집권 세력은 국민이 정부의 지침을 잘 따르며 질서 정연하게 살길 바라겠지만, 이런 식의 질서는 국민에게 강요할 수 없는 무례이며, 자체로 인권 침해다.
5.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였다. 나는 프랑스 유학하면서 그 사회로부터 이 의식을 배웠다. 프랑스에서는 좌파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폭넓게 동의를 얻고 있다. 이 말은 이렇게 다시 고쳐 말할 수 있다. "사회 정의가 사회 질서보다 더 중요한 가치이다." 우리 사회는 사회 질서가 사회 정의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교육시겼고 지금도 시키고 있다. '기초 질서를 지키자!"는 구호로 학교에서 교육 받으며, '안보 이념'을 정의나 자유, 평등의 가치보다 더 강조 받았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 질서와 안보 이데올로기를 지금도 계속 주입 받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분단 상황을 이용한 지배 세력에 의해 주입 되어 사회 구성원들 한테서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그만큼 강력하게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 자들의 사회 정의의 요구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 받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 정의보다 질서를 강조하는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변화는 없다. 사회 변화를 두려워하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가 수구 보수 세력들에 투표하는 것도 이 두려움의 표시이다.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사회 정의가 사회 질서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질서에 대한 무의식의 복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안정을 추구하는 본능적 경향이 있다. 우리 인간은 무질서와 혼란은 불안과 긴장을 불러오기 때문에 은연중에 안정 상태, 아니 중지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지배 세력이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의와 차별, 배제가 이루어지고, 억울함과 굴종을 강요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회 정의를 계속 요구하여야 한다. 사회 질서보다 사회 정의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저항해야 인간이다. 생각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삶은 주인의 삶이 아니다. 존재를 남에게 맡긴 노예의 삶이다. 알베르 까뮈는 "나는 저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저항은 창조이다. 창조는 저항에서 나오고, 그 뿌리는 분노에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이 아니다. <<분노하라>>는 책을 쓴 스테판 에셀이 한 말이다. 불의, 불평등, 전체주의, 비인간화 등에 대한 분노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분노해야 할 일에 의연히 분노해야 한다. 어리석음을 걷어내고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게 인문 정신이다.
6.
카뮈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말 하나를 더 소환한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의 유명한 말이다. 프랑스 사회의 특징이 관용(똘레랑스)이지만, 그 의미를 잘 알고, 그 정신이 우리 사회가 갈등과 대립의 골을 메우는 방법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에서 엄격하게 적용되는 엥똘레랑스(intolerance) 정신도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관용(寬容)과 프랑스어의 '똘레랑스'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관용'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또는 그런 용서'라고 정의한다. 프랑스어로는 '똘레랑스(tolérance)'라고 한다. 우리가 말하는 ‘너그러움을 의미하는 관용’이 서로 간의 차이를 덮어두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화합(和合)’을 강조하는 태도라면, 프랑스에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더 도드라지게 강조하되 서로를 인정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나는 '똘레랑스'의 개념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 나는 늘 이 문장을 외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단지 차이일 뿐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면,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다르다고 '욱'할 필요 없다. '욱'이 발전하면, 폭력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톨레랑스’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특정 사안들, 가령 나치 추종과 인종차별, 헙범 파괴, 폭력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앵톨레랑스(intolerance)’, 즉 '불관용'을 단호하게 견지한다. 즉 상위의 목표인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에는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논리가 촘촘해, 잘 이해를 해야 한다. '불관용(엥똘레랑스)도 단호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불관용 해야 할 것들이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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