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간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시간을 쓰기'라는 결단이 필요하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4월 4일)
소중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 스마트폰을 잠시 손에서 놓고 시간내어 만나고 얘기 나누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시간을 쓰려면 너무 많은 의지가 필요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 누군가를 나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보고 싶은 넷플릭스 시리즈와 매일 업데이트되는 유튜브와 거의 생화학적 도파민 시스템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쇼츠와 릴스를 넘어서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누구도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앱으로 사람들을 알게 되더라도 그들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긴 어렵다. 누가 됐든 그와 적어도 몇 십 시간쯤은 함께 보내야 그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될 여지라도 생긴다. 우정에 관한 책인 로빈 던바의 <<프렌즈>>에 소개된 한 연구에 따르면, 그냥 아는 사람에서 '가벼운 친구'라도 되려면 45시간 정도는 함께 보내야 한다고 한다. 유의미한 친구가 되려면 100시간쯤은 함께 보내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시간 부족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다들 하나같이 '시간 없음'을 호소하고 있다. 연애할 시간도, 친구를 만날 시간도, 취미를 키울 시간도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거의 매일 듣는다. 나름대로 노동 시간 등은 점점 합리적으로 변해간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모르면 몰라도, 우리에게 할 일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집에 돌아오면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앉아 TV를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스마트폰 하나만 켜더라도 온갖 SNS에 유튜브·OTT를 보거나 각종 게임, 쇼핑 등을 하다 보면 시간이 '순삭(순식간에 삭제)'된다.
어쩌면 그런 와중에 우리에게 가장 없어지는 시간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쓸 시간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나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만들려면 우리 인간은 시간을 써야 한다. 이는 익히 수많은 사람들의 절절한 공감을 얻은 '어린 왕자와 여우'의 이야기에서부터, 털 손질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친밀감을 높이는 영장류의 본능, 최근의 우정에 관한 심리학 연구에 이르기까지 거의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시간을 쓰지 않으면 누구도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누군가에게 충분한 시간을 써서 그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능력을 점점 잃고 있다. 우리가 한겨울 수분이 메말라가는 나뭇가지처럼, 그 누군가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능력을 잃고 있다. 마치 온 사회와 문화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에게 쓸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라, 코인 투자를 하라, 평생 다 봐도 볼 수 없는 온갖 영상들에 빠져라, 그렇게 말이다.
별 생각 없이 그냥 살면, 우리는 타인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가능성에 스스로 닫혀버릴 수 있다. 그냥 돈 벌고, 소비하고, 누워서 먹는 당분과 누워서 보는 콘텐츠에 중독되고, '서로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인간의 세계'로부터 차단된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은 그러라고 태어난 것이 아닐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유대 관계를 맺고, 지지하고, 의존하며, 서로에게 절절 해지라고 태어난 쪽에 가까울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시간을 쓰려면 너무 많은 의지가 필요하게 됐다. '내가 시간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시간을 쓰기'라는 결단이 필요하다. 애써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폭풍을 뚫고 골짜기를 넘듯이, 그를 찾아 떠나야 한다. 그를 만나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고, 어깨를 두들기고, 만나서 반갑다며 웃고 이야기에 빠져들어야 한다. 늦기 전에 연락하고, 찾아가자. 누군가는 나이가 들면 친구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나이가 들고 나면 남는 건 사랑과 우정뿐일 수도 있다. 다른 것들이 오히려 허상에 가까웠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문화평론가이자 변호사인 정지우의 글이다. 정말 맞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시간 써야 한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보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했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본다는 것은 시간을 들이는 거다. 시간의 향기가 그 속에서 배어드는 거다. 그럴 때 무언 가에 대해 경탄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때는 욕망이 나를 지배하거나 불안하게 만들지 못한다. 기독교 신앙이란 욕망이 허상임을 알아차리고 그 너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는다. '이 정도는 누려야지'라며 욕망을 슬글슬금 키운다. 거기에 사로잡히면 늘 결핍되어 있고 행복은 영원히 유보될 수밖에 없다.
이젠 "욕망의 주류 서사"(김기석 목사)를 건너가야 할 때이다. 시간은 나는 거이 아니라, 내는 거라고 한다. 그리고 이젠 욕망의 배치를 다르게 해야 한다. 욕망의 재배치라는 말은 욕망의 '건너 가기'를 하자는 거다. 어떻게?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자는 거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나 명품가방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 진다. 더 좋은 자동차와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쾌락적응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 관계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쾌락 적응을 통해, 만족이 불가능한 쳇바퀴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인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불행하다. 우리는 한 가지 욕망을 실현시켰을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욕망은 진부한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목사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본다.
"'H=c/d.' H는 해피니스(Happiness), 행복이에요. c는 캐피탈(capital), 돈이죠. d는 디자이어(desire), 욕망이에요. 자본주의는 행복이 커지려면 돈이 많아져야 한다고 하죠. 그런데 돈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경쟁 논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어요. 경쟁이라는 것은 배타적이지요. 타자가 나에게 지옥을 안겨 줘요. 이 도식 안에서 살아가면 언제나 불안이 내면화됩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가 만든 이 도식 안에 삶을 집어넣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옛날에 비해 돈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그만큼 행복하질 않아요. 욕망이 커져서 그래요. 거꾸로 욕망이 줄어들면 행복이 커지지요. 욕망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내적 든든함이 있어야 해요. 내적 든든함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제법 아름답고 좋다는 걸 알아차릴 때 생겨요."(김기석 목사) 오늘 아침 다시 되새긴다. 욕망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내적 든든함이 있어야 해요. 내적 든든함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제법 아름답고 좋다는 걸 알아차릴 때 생긴다는 것을. 그래 정선 여행을 다녀왔다.
몇일 전 시내에서 일을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동네 초등학교를 들렸다. 목련이 얼마나 피었는지, 동백꽃은 피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내면 우리는 만난다. 문정희 시인이 동백을 이렇게 묘사한 것은 동백은 한 송이 개별 자로서 피었다가, 주접스런 꼴 보이지 많고 절정의 순간에 뚝 떨어지며 지기 때문이다. 매화꽃, 벚꽃, 복사꽃, 배꽃은 풍장을 한다. 꽃잎 한 개 한 개가 바람에 흩날리다 땅에 떨어져 죽는다. 산수유는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었다가 노을이 스러지듯 살짝 종적을 감춘다. 나무가 숨기고 있던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 같다고 소설가 김훈은 묘사한 적이 있다. 나도 내 삶을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부분이 있다. 산수유처럼.
동백/문정희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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