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들엔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3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3일)
나는 한 가지 삶의 원칙이 있다. 몇 년 전부터 내 속도로 내 일상을 꾸린다. 아침에 만난 문장이다. "세상 모든 것들엔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꽃도 계절도 피고 지는 속도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효율성’이라는 속도에 맞추느라 자연스러운 몸의 리듬을 놓친다. 일을 빠르게 처리할수록 일이 더 많아지는 역설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느낀 건 멀리, 오래 가려면 자신의 속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백영옥) 그 저마다의 속도를 따르는 것이 '도(道)'를 알고 구현하는 사람이다. 그 도는 자연을 따른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했다.
자연의 봄에는 참 여러 가지 꽃들이 핀다. 제일 먼저 봄을 기다리는 꽃은 동백꽃, 성급해서 눈 속에서 핀다. 그 다음은 버들강아지-갯버들 꽃, 다음은 산수유와 매화 그리고 목련으로 이어진다. 병아리가 생각나는 개나리가 거리를 장식하는 동안, 명자나무 꽃, 산당화 그리고 진달래가 봄 산을 장식한다. 바닷가에서는 해당화가 명함을 돌린다. 다음은 벚꽃이 깊어 가는 봄을 알린다. 그 사이에 마을마다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이 이어진다. 그 끝자락에 철쭉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라며 봄에 꽃이 피는 순서가 없이 동시에 피면서 화란춘성(花爛春盛, 꽃이 만발한 한창 때의 봄), 만화방창(萬化方暢,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라 흐드러짐)이었는데, 올해는 비교적 위의 순서를 잘 따르는 듯하다.
사람도 자신의 속도로 살아야 건강하다. "삶이란 스스로의 속도로 자신만의 풍경을 얻는 과정이다. 그제야 마음이 번잡할 때마다 내가 산책을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빠른 세상에서 내게 휴식을 주는 게 ‘걷는 속도’로 바라본 풍경이었던 것이다. (…) 우리에겐 고유의 리듬이 있다. 분명한 건 속도를 늦춰야 비로소 보이는 ‘사각 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필요가 아닌 내 필요에 종종 보폭을 맞춰야 한다." (백영옥)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삶의 방향이다. 삶은 몇 살까지 반드시 뭘 해야 하고, 어디에 도착해야 하는 숙제가 아니다. 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맞춰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천천히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 빨리 어딘 가에 도착하기만을 바란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즉 자신이 목표로 하는 삶을 향해 올바로 나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방향을 잘 잡으려면 잠시 멈춰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답보다 내면에서 나온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간절하면 내가 뭘 원하는지 보인다. 어제 만난 문장이다. "행복은 인간적인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생활에서 느끼는 보람과 만족이다."(김태형) 이 문장의 키워드는 세 개이다. 인간적인 삶의 목적, 보람과 만족이다.
(1) 인간적인 삶의 목적은 인간 본성에 부합되는 욕망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인문적 지식을 축적하여야 한다. 여기서 인문 운동의 필요성이 나온다.
(2) 인문 운동은 인간적인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경전이나 고전 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고, 그 내용들을 써보고, 또 공유하자는 거다.
(3) 인간다운 생활과정에서 우리는 보람과 만족감을 축적하여야 한다. 욕망의 즉각적인 충족인 쾌감과 목적 실현 후에 오는 만족을 구별하여야 한다. 그리고 보람은 만족감 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만족감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에서 온다.
당연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것 같다. 내 속도로 내 삶의 목적에 맞게 사는 데서 오는 만족과 보람을 찾으며 살자는 거다. 예컨대, 사주나 토정비결을 보는 것보다 ‘그냥 나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타인의 예언을 들을 시간에,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반드시 그 일을 해내는 실천의 순간이 더 기쁘고 만족스러우며 보람차다는 거다. 정여울이 하는 말이다.
그리고 장윤금 숙명여대 총장은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는 성경 구절에서 큰 힘을 얻는다고 한다. "더 이상 내 힘과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오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는 것이 시작이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그 하느님의 자리에 노자가 말하는 '도(道)'를 대입해도 된다고 본다.
어제 <<도덕경>> 제 16장에서 만난 문장이다.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 이 말은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는 뜻이다. 도올은 "만물이 더불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고 해석했다. 나는 '만물이 다 함께 자라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로 본다"로 읽고 싶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 모양 속에서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는 거다. 제40장에 나오는 "반자, 도지동(反者, 道之動)"이 떠오른다 도의 운동 모습은 되돌아가는 것 혹은 반대편을 향한 움직임이다. '복'은 '반'을 의미한다. 그리고 '복'은 '돌아감'으로 생성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성이 완성되면 죽는다. 그러나 죽음 새로운 생성을 위한 '돌아감'이다. 이 '돌아감'은 종료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객관적 질료가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애를 완성하고 자기 뿌리(지기의 근원,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거다.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 속상하지만, "도"의 움직임이라고 여긴다. "오이관복(吾以觀復)"할 뿐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밖에 나가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봄을 실컷 만끽하리라. 거기서 "도"를 만나리라. <도덕경> 제17장의 정밀 독해는 블로그로 옮긴다. 새로 뽑힌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다. 노자는 이 장에서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라고 하면서,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위(無爲)’의 원칙이라 강조한다. 여기서 '무위'라고 하여 방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산과 들을 풍요하게 하는 이슬처럼, 가랑비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시민들에게 도움을 주라는 거다. 그러면 시민들이 일이 잘될 때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새로 뽑힌 지도자와 그 그룹에 믿음이 안 간다. 난 단지 '도의 반(反)'만 기다릴 뿐이다. "어디 뻘 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더디게" 온 봄과 함께. 그 기다림을 인문 지식에서 얻는다. 그래 오늘도 노자 <도덕경>을 읽고 익힌다. 사진은 어제 밤 늦게 나가 찍은 목련이다.
봄/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 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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