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3월 29일)
최근 포털 뉴스를 보면, "국가와 사회에 마지막으로 봉사를 한다는 마음으로…." 라는 문장을 자주 만난다. 일신의 영달이 아닌 국가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어렵게 출마를 결심했다는 뜻 같은데, 정당의 공천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을 보면 정말 그런 건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예컨대, 낙천하면 삭발이나 단식 같은 극단적 수단을 동원해 불복하거나 정치 인생 내내 몸담았던 당을 떠나 정반대 이념의 당으로 거리낌 없이 달려가는 정치인들이 있으니 말이다. 봉사할 기회를 놓쳐서 하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
젊어서 많이 벌고 일찍 은퇴해서 편안한 노후를 즐기겠다는 '파이어족'(경제적 자립 후 조기 은퇴)을 꿈꾸는 이들이 정치권 밖에는 적지 않다. 정치권은 반대다. 최소 16년 이상 배지를 달고도 열 명 중 아홉 명은 여전히 "한 번 더"를 외치는 것이다. 가까이에서 본 국회의원이란 직업은 물론 힘든 점도 있다. 민원이 끝이 없고 명절 등 대목에는 주말 없이 지역구 행사를 돌아야 한다. 가족들이 자칫 정치적 공격에 노출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상쇄할 당근도 크다.
선수(選數)가 쌓일수록 의원들은 어린아이처럼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일상 생활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보좌진의 의전을 받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혼자서는 승용차 문을 여닫거나 모바일 뱅킹을 사용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의원들은 담당하는 국회 상임위원회의 소관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 유관 민간 기관에 '슈퍼 갑'이다. 입법과 예산은 물론 민간 기업 대표의 국정감사 출석 여부를 결정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로펌이나 규모 있는 기업에서 국회를 상대하는 대관(對官) 담당자가 예전보다 많이 늘었다고 한다. 정부와 비교해서도 의회 권력이 부쩍 커졌다는 방증이다.
사람들은 의원 수를 줄이자고 한다. 그러나 그 것은 문제가 있다. 의원 수를 줄이면 남은 의원들에게 권한이 더 집중돼 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한은 더 커진다. 세비를 확 줄이면 검은 돈을 받고 싶은 유혹이 커지거나 금수저 출신 의원들만 늘어날 수 있다. 오히려 국회의원 수를 늘리고, 의회 특권을 대폭 줄여야 한다. 그리고 의원직을 보람은 크지만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고된 일자리로 만드는 건 어떨까? 다음과 같이 말이다.
- 보좌진은 차량 운전기사로 쓸 수 없게 엄격히 제한한다. 의원의 대중교통 이용을 독려한다.
- 보좌진을 지역구 관리나 선거운동에 동원할 수 없게 한다.
- 본연의 업무인 법안 심사에 충실하도록 국회가 열리는 기간에는 매일 출퇴근 도장을 찍게 한다.
- 특히 민간 업체와 접촉하면 기록을 남기게 의무화한다.
- 다선 의원이 될수록 임금이 줄어들게 설계한다.
이런 국회가 된다면 공천 불복 소동은 옛이야기가 될 것 같다. 대통령이나 당 지도부가 공천권을 무기로 의원들을 줄세우는 데서 비롯하는 패거리 정치도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지도부가 일 잘하는 의원들을 찾아가서 '제발 그만두지 말고 한 번 더 출마해 달라'고 부탁하게 될지 모른다. <한국일보> 이성택 기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틈 나는 대로 말하지만, 다음이 정치에 대한 나의 주장이다.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이다. 권력의 창출만이 전부가 아니다.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치는 우리의 삶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정치는 우리들에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해준다. 신체를 구속할 수도 있으며, 돈도 걷어가며, 군대로 데려가기도 한다. 정치는 우리들의 '정신 세계'도 지배한다. 정치에 아무리 냉소적일지라도 정치는 우리들의 삶으로부터 단 1cm도 떨어지지 않는다. 원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사회에 대한 철학, 의지, 전문성이 없으면 해서는 안된다. 정치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의 영역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가 무엇인지 묻는 한 권력자의 물음에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政者正也, 정자정야)라고 명쾌하게 정의한 바 있다. 정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실천의 문제이지 힘과 이익의 다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옳은 것(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본래 목적을 잊고 그저 권력이라는 수단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진영의 논리가 앞서는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모두 대결의 논리로 빨아들인다. 가령 현 정부의 반민주, 반헌법적 통치를 비판하면 바로 상대 진영의 주장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정치가 이렇게 진영 선택의 문제가 되고 권력 교체에 불과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협소하고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의 양당제 정치 때문일 것이다. 선거가 곧 정치가 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선택과 상상의 여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정치 과몰입도 몰 정치도 아닌, 마음 놓고 지지할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국민적 갈등을 자신의 이익의 동력으로 삼는 우리 정치인들은 "사람 안에 개가 들어 있어" "개 소리"를 하느라 바쁘다. 답답하다.
개의 정치적 입장/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 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 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 정의했는데, 여기서 ‘정치적’이란 말은 정확하게는 폴리스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는 인간의 활동을 이론적 활동(테오리아), 윤리적 실천(프락시스), 제작 활동(포이에시스)으로 나누면서 생존을 위한 활동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활동 곧 프락시스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생각을 일부 이어받은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활동을 생존을 위한 노동(labor), 외부 세계에서 의미를 캐내는 작업(work),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action)로 나누면서, 근대에 들어와 행위의 공적 영역이 생존과 노동의 사적 영역에 잡아 먹혔다고 지적한다. 공적 영역이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권력의 사유화로 증발해버리고, 시민들은 그들대로 개인의 사적 안녕이라는 몰정치적 태도에 빠진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공적인 정의 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이상은 또한 현실 정치를 통과하지 않으면 달리 실현할 방법이 없다는 데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현실 정치를 방기하면 정치의 이상은 더욱 멀어진다. 피곤하지만 정치를 놓을 수 없는 것이 시민의 삶이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사월의 책 대표 안희곤의 주장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기억한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받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플라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인문운동가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개의_정치적_입장 #배한봉 #국회의원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