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무백열(松茂柏悅):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도 기뻐한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3월 28일)
나에게 <페이스 북>은 세상을 만나는 창이다. 하루 한 번은 좋은 생각들을 적어가며 흩어 본다. 오늘 아침 거기서 만난 문장이다. "금방 사라질 감정 말고, 평생 계속될 인생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일시적 감정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난 거랑 잘 사는 거랑 다르다. 못난 놈이라도 잘난 것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나 여기 살아 있다', '나 보고 다른 못난 놈들 힘내라', 이러는 게 진짜 잘 사는 거다. 잘 난 건 타고나야 되지만, 잘 사는 건 자신이 할 나름이다. '기분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마티아스 뇔케,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 타인의 시선에 맞춰 나를 애써 나를 포장하면서 내 삶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감정 소모하느라 내 가치를 잃어버리지 말자. 자기 중심을 잘 잡으면 인생은 훨씬 더 편안해질 수 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했다는 말을 소개하는 카드 뉴스를 만났다. 내가 불행하면 자꾸만 타인에게 관심이 생긴다. 그러니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타인을 시기하지 말일이다. 인간의 시기심은 그들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심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인 동시에 죄악이고 불행이다. 인간은 시기심을 행복의 적이고, 우리의 숨통을 막으려는 사악한 악마로 봐야 한다. 그러니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지 말고 기뻐하라. 남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는 자는 결코 행복해지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나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너보다 뒤쳐져 있는지 생각하라. 인간은 자신보다 사정이 나아 보이는 사람보다 사정이 나쁜 사람을 살펴야 한다. 가기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만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나는 모든 것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행복의 특성이 있다. 결국 행복은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에게 있다. 왜냐하면 조금이나마 믿을 만한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아닌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따르는 고충, 불이익, 위험, 불쾌감은 아주 크고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을 자신에게 줘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이 많을수록, 기쁨의 원천을 자신 안에서 찾을수록 우리는 행복해진다. 행복은 스스로 만족하는 이의 것이다. 어울리려고 애쓰지 마라. 나이들수록 혼자가 더 행복하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시기와 질투에 대한 생각을 좀 더 이어간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나를 장례 시키고(吾喪我),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꽈리를 틀고 있는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샘하며 미워하는 마음이다. 비슷한 말로 '시새움'이 있다. 자기보다 잘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다. 줄여서 '시샘'이라고도 한다. 질투는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 내리려 하는 행위이다.
러시아 민화를 소개한다. 운 좋게 마술램프를 발견한 농부가 있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 지니가 나타나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농부는 옆집에 젖소가 있는데 온 가족을 다 먹이고도 남아서 그들이 우유를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농부의 얘길 듣던 지니가 "옆집처럼 우유가 잘 나오는 젖소를 구해드릴까요?"라고 물으니 농부가 대답했다. "아니, 옆집 젖소를 죽여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속 깊은 질투와 시기심을 말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왜 그럴까? 첫 번째 원인은 지나친 경쟁 속에서 살고, 거기서 발생하는 불평등이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두번째는 우리의 교육문법이 잘 못되어 깊이 사유하는 훈련을 시키지 않고, 경쟁 속에서 지식만을 암기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 속에서 패배감을 느끼면, 우리는 자존감을 잃게 된다.
남의 불행과 고통을 보며 느끼는 기쁨을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라고 한다. 고통을 뜻하는 '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Freude'의 합성어이다. 사람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은밀히 즐기는 심리가 있다. 사람은 악하고 선한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속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악한 속성을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 나는 믿는다. 그건 자존감에서 나온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오랜 속담은 이런 인간 심리를 잘 드러낸다. 언젠가 소설가 백영옥은 미국 소설가 고어 비달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이처럼 축구에서 골을 넣은 선수는 기쁨에 환호하지만 상대편의 골키퍼는 고통으로 얼굴을 감싼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시기와 질투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회와 과정이 공정하다면 입시와 승진, 사업의 성공을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샤덴프로이데'의 심리를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다. 원래 인간 세계가 야박하고 비정하다.
반면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왜냐하면 타인의 슬픔은 아무리 나눠도 마음이 무거울 뿐 진짜 내 것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웃의 기쁨을 진심으로 나누는 경우는 좀 더 힘들다.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시기와 질투가 생기려 하면, 이런 식으로 심리 상태를 바꾼다. 이를 나는 '풍요의 심리"라 한다. 세상에 좋은 것은 많고, 풍요로워서 남이 성공하고 인정받아도 내 몫은 남아 있다고 보는 심리이다. 그 반대 가 '빈곤의 심리'이다. 이 세상 좋은 것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이 가져가면 그만큼 내 몫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심리이다.
백영옥 소설가는 불교의 무디타(Mudita)의 지혜와 제퍼슨이 한 말을 소개했다. 무디타는 타인의 행복을 즐기는 기쁨을 뜻한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한 말은 이 거다. "누가 내 등잔의 심지에서 불을 붙여가도 불은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송무백열(松茂柏悅)'이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도 기뻐한다. 사촌이 땅을 사야 나도 잘된다'는 말이다. 제2의 기계시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 혁신의 길목에서 협업과 협력이 필요한 우리의 자세이다.
오늘 아침 다시 불교에서 말하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소환한다. 붓다는 인간 마음의 가장 숭고한 상태를 산스크리트어로 "브라흐마비하라"라 했다. 숭고함이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의 선과 악을 넘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한없는 경외심이 넘치는 단계다. 숭고함의 의미는 '셀 수 없는/경계가 없는'이다. 이것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셀 수 없는 마음'이 된다. 나는 이것을 '사랑의 4단계'라고 본다. 계단을 오를수록 더 어렵다.
(1) 자(慈)=마이트리(maitri, 산스크리트어)=헤세드(hesed, 히브리어)=아가페(agape)=참된 사랑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 사랑의 초점은 상대방에게 있다. 만일 그 초점이 자신에게 있고 상대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자'는 상대방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깊이 살펴서, 상대방에게 행복을 주려는 마음이다. 한자 '자(慈)'를 해석하면, 나와 상대방의 마음이 가물가물(玄)해져, 하나가 된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의 상태를 의미한다. 마이트리, ‘자’는 소극적으로 내가 타인을 내 자신처럼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 환경을 조성하는 작업까지 포함하는 큰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기꺼이 주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숨은 노력이자 배려까지 포함된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를 향한 마음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한없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인류는 그 순수한 마음을 어머니로부터 부여받아 각자의 심연에 간직하고 있다. 교육이란 이 심성을 체계적으로 일깨우는 자극이다.
(2) 비(悲)=카루나(karuna)=compassion(연민)
‘비’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당한 상처나 고통을 함께 슬퍼할 뿐만 아니라, 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거나 제거하려는 마음과 행동이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비참한 상황에 처한 낯선 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비'는 그런 감정 이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연민보다 긍휼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동일하게 느껴, 그 상대방을 그 고통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과 행동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영어로 ‘컴페션(compassion)'이다. 미 말은 상대방의 고통(passion)을 기꺼이 함께(com) 나누려는 마음이다. ‘카루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걱정, 근심, 슬픔,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느낄 수 있도록 상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관세음보살의 마음은 대자심이 아니라, 대비심이다.
- 상대방의 슬픔에 동참한다.
- 상대방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하고 조치를 취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 옆에 앉아 말없이 그의 슬픈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3) 희(喜)=무디타(mudita)
'희'는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행복처럼 느끼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행복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줄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노력이다. 실제는 카루나보다 더 힘들 수 있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겠는가? 상대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 아상(我相, 나가 있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까운 친구, 동료 혹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의 성공을 시기나 질투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면, 무디타란 숭고한 감정을 소유한 자이다.
(4) 사(捨)=우펙샤(upeksha)
‘사’는 버린다는 것으로, 마음에 집착이 없고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수련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주위에 일어난 유혹에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정진하는 의연함과 자신감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아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갈 뿐이다. 고생 끝에 산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볼 때 느끼는 그 감정이다. 눈앞에 탁 트인 광경이 펼쳐지는 이유는 정상에 올라온 사람의 시선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마음이다. 그리고 사람의 배경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다. 특권의식이나 선민의식을 없애는 것이다. 그냥 무덤덤하게 대하는 마음은 아니다. '자비희(慈悲喜)'를 모든 존재들에게 평등하게 내는 마음이다.
이 '사무량심'으로 무장한 사람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속에 쾌적을 유지하는 자이다. "요가 수련자의 마음은 자, 비, 희, 사의 실천을 통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쾌적하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사실 어떤 사건이 기쁘고, 슬프고, 혹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없다. 이런 감정들은 그 사건에 대해 나의 반응일 뿐이다.
목련은 도도하게 핀다. 모가지 부러질 정도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며 뽐내다가 질 때는 남루하다.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복효근)는 것인가?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나는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가만가만//발소리를 죽"이면서 걷는다.
목련 그늘 아래서는/조정인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가만가만
발소리를 죽인다
마른 가지 어디에 물새알 같은
꽃봉오리를 품었었나
톡
톡
껍질을 깨고
꽃봉오리들이
흰 부리를 내놓는다
톡톡,
하늘을 두드린다
가지마다
포롱포롱
꽃들이 하얗게 날아오른다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목련 꽃 날아갈까 봐
발소리를 죽인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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