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성인을 쌓아 놓지 않는 사람(聖人不積)이라고 정의한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3월 27일)
어제는 하루 종일 우울하였다. 오늘 사진 처럼, 검은 구름이 뒤를 자꾸 따라왔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온 마음의 근육으로 자기 위로와 자기 돌봄으로 기분을 잘 달래고, 하루를 충만하게 마치었다. 그런다가 아침에 <인문 일지>를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김영민 교수의 글, <생각의 공화국>을 읽었다. 나는 믿고 읽는 몇 명의 칼럼니스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인터넷에서 그의 글을 만나면 스크랩해 두었다가, 새벽에 다시 읽는다. 그래야 맑은 정신으로 행간의 숨은 뜻을 파악한다. 거기서 만난 문장이다. "인간은 해석하는 동물이고, 현실은 늘 해석된 현실일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 현실 그 자체를 묘사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굴지만, 파악된 현실에는 이미 자신의 관점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해석하지 않고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주제 파악을 하라, 현실 파악을 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 누구도 해석 이전의 주제 파악이나 현실 파악을 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석 이전의 현실이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그런 걸 보고서 미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김 교수는, 내가 이미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적이 있는, 니체의 <토리노의 말> 사건을 갖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1889년 1월 3일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울부짖으며 말에게 달려간다. 말의 목을 감싸 안고 날아오는 채찍질을 막으려 든다. 바로 이 순간 니체는 미쳐버린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그 광기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한다."
니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 사건의 존재는 결코 실증된 적이 없다고 했다. 토리노 말 사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추정된 발발 시기보다 11년이 지나서야 등장하며, 그 기록조차 전해지는 풍문을 받아 적은 것에 불과하며, 과연 그때 광장에서 얻어맞는 말이 있었는지, 니체가 그 말을 보았는지조차 확증할 수 없다고 했다. 토리노의 말 사건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거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이야기다. 해석을 부르는 강력한 이야기다.
문제는 다시 사회가 여구하는 ‘해석의 코드’ 거부하면, 광인(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거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 개고기는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였다. 소의 식용 도축은 불법이었고, 돼지고기는 오늘날처럼 보편화하지 않았다. 대개 닭이나 개를 먹었다. 그러던 한반도에 조선의 니체가 있어, 어느 날 아버지가 보신탕을 먹는 현장에 난입하여 울부짖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니체처럼, 그를 개 먹는 문화에 반기를 든 문화적 영웅이라고 간주해야 할까? 아마도 그는 광인 취급을 받았으리라. 난동을 부릴 때, 그는 공감이 넘치는 상태라기보다는, 개고기란 대상을 해석할 코드를 잃은 상태였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가 개고기가 음식이라는 당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 이전의 개고기 현실과 마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붉은 살점, '이게 도대체 뭐지'하다가 미쳐버리게 될지 모른다.
나는 작금의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그냥 눈 감으면 되는데, <인문 일지>를 쓰면서 현실의 이면이 보인다. 보통 다른 사람들의 현실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혼자 미치는 거다. 그런데 바로 타협한다. "부쟁(不爭)의 철학"(노자, <<도덕경>>)의 마음의 근육에 장착했기 때문이다.
<<도덕경>>은 도(道)로 시작하여, 부쟁(不爭)으로 끝난다. 이를 연결 지으면 ‘도는 곧 부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쟁투(爭鬪)가 난무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 되어 가는 험난한 시대를 살면서 내린 결론일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전편을 통해 '부쟁(不爭)'을 강조하였다. "상선약수(上善若水)"로 시작되는 제8장에서는 "수선리만물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고 했고, 제22장에서는 "부유부쟁(夫唯不爭) 고천하막능여지쟁(故天下莫能與之爭)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의 어떤 것도 그에 맞서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제68장에서는 "선용인자위지하(善用人者爲之下) 시위부쟁지덕(是謂不爭之德) 사람을 잘 쓰는 사람은 스스로 아래에 거하니 이를 일컬어 부쟁지덕이라 한다"고 했고, 제81장에서는 "성인지도(聖人之道) 위이부쟁(爲而不爭) 성인의 도는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다"는 말로 <<도덕경>>을 마무리하고 있다.
'부쟁'에는 노자 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과 평화, 공정이 응축되어 있다. 자연은 무위하고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겨울을 이기려고 다투지 않고 겨울도 봄을 이기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때가 되면 묵묵히 자신을 비우고 겨울에게 때를 넘겨주고 겨울 또한 때가 되면 따뜻한 봄을 위해 자신을 버린다. 다투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가을이 있고, 또 다른 겨울이 있게 된다. 각자의 분수와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 다투지 않기에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면 분쟁(分爭)이 발생하지만 욕심을 비우면 '부쟁(不爭)'하게 되고 세상은 공정해 진다.
노자는 자신의 능력을 베풀고, 진리를 말하고, 깨달음을 전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한다. 그 성인은 자신의 가진 것을 자신의 울타리에 쌓아 놓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파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깨달음을 전하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큰 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잘 안다. 주었지만(與), 더 많아지고(多), 베풀었지만(爲) 더 갖게(有) 된다는 노자의 논리 속에는 쌓지 말고 베풀라는 성인의 삶이 있다. 통장에 돈을 쌓아 놓아도 내가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장에 찍힌 숫자와 금의 무게만큼 삶은 더 짓눌리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노자는 성인을 쌓아 놓지 않는 사람(聖人不積)이라고 정의한다.
특히 나는 노자 <<도덕경>> 제66장에 나오는 "선하(善下)"라 말도 좋아한다. 상대 방 밑에 자신을 둘 줄 아는 거다. "부쟁의 지혜"이다. 나는 이 보다는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그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는 '겸양지덕'과 단순히 "부쟁(不爭, 싸우지 않음)"을 넘어서는 다양한 리더의 철학으로 읽었다. "부쟁"은 성공한 자의 신의 한 수라는 거다. "선하"는 과정이고 그 결과가 부쟁으로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강(江)과 바다(海)가 깊고 넒은 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아래로(下) 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골짜기(百谷)의 물이 그 곳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노자는 부쟁의 철학을 주장한다. 상대방과 나의 손실 없이 부드럽게 이기는 방법이 노자가 원하는 승리 방법이다. 이를 박재희 교수는 "노자의 유약 승리법"이라 한다. 씨우지 않고 상대방의 가슴에 못박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다.
아무도 걸은 적이 없는 길을 계속 건너 가자는 것이 내 철학이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으며,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만난 누구든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는 맛은 관계이고, 거기서 일어나는 활동의 폭이 확장될 때 일어난다. 게다가 관계와 활동 속에서 일어나는 수렴하고 발산하는 순환 가운데 내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다. 이걸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소유 욕망에 사로잡혀 집착하기보다 존재로 건너가기를 하며, 자유를 확장해 나갈 때 발산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관계와 활동이 작동된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와 똑같은 말만 하는 사람은 필요 없다. 그래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해석하는 동물이고, 현실은 늘 해석된 현실일 뿐이다." 이 이야기를 하다가, 샛길로 빠졌다. 현실과 싸우려 하지 않으려 해도, 인간은 해석하지 않고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거다. 주제 파악을 하라, 현실 파악을 하라는 말이 있지만, 그 누구도 해석 이전의 주제 파악이나 현실 파악을 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석 이전의 현실이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그런 걸 보고서 미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리고
"어떤 해석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해석 이전의 현실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끔찍하여 감당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음은 김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인간은 해석 없이 살 수 없다. 신, 동물, 사물에 대한 일정한 해석을 전제하지 않고는 문명을 건설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결국 기존의 해석이 오작동하는 순간이 온다. 토리노의 말 사건의 핵심은 단순히 연민과 공감의 문제가 아니다. 연민과 공감이 만능은 아니다. 일정한 해석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공감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미역국을 먹으며 미역에 상처가 될까 봐 목이 메면 어쩔 것인가. 많은 이들이 불쌍한 말을 감당할 문화적 코드를 향유하던 시절에 니체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 코드로부터 소외되고 말았다. 그 순간 그는 벌거벗은 현실을 마주하고 결국 미쳐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급변해가는 오늘날, 어떻게 해야 기존의 신, 동물, 사물에 대한 기존 해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미쳐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김 교수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제안했다.
- 왜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느냐고 개탄하기 이전에, 자기 현실이 결국 현실에 대한 해석임을 인정하는 일,
- 자기 해석이 유일한 해석이 아님을 인정하는 일,
- 특정 해석이 시대와 맺는 관계를 질문하는 일,
- 어떤 해석도 영원하지 않음을 감내하는 일,
- 해석을 강제당하기 전에 해석을 스스로 구성해보는 일,
김 교수는 이러한 노력 속에서 비로소 우리 인간은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좀 덜 미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좀 어제의 우울이 풀린다. "인간은 해석하는 동물이고, 현실은 늘 해석된 현실일 뿐이다." 그럴 때는, 시를 읽는 거다. 그러면 기분이 더 나아진다. 오늘 공유하는 시의 시인 김남조는 2020년에 마지막 시집 <사람아, 사람아>를 펴냈다. 시인의 열 아홉 번째 출간 시집이었다. 이 시는 그 시집에 실려 있다. 시인은 시집을 펴내면서 자신에게 시(詩) 혹은 시심(詩心)은 “한 덩이의 작은 흙이었으면서 기적처럼 풀씨가 돋아나는 신비를 보여 주었”다고 회고했다. 나는 이 시심을 사람이 갖고 있는 내면의 옥토(沃土)로 이해한다. 그리고 내면의 너른 옥토를 소유하고 있기에 모든 사람은 제 스스로 성주의 지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주(城主)/김남조(1927~2023)
당신은 성주가 되었다
성 하나에 한 사람뿐인
그가 되었다
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모자를 벗지만
그때 웃음판이 멈추기도 한다
당신의 고독은 깊어 간다
탁월함이 인격인 건 아니고
행복이 가치의 지표도 아니다
재물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고독은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멀리 보며 전체를 생각하라
좋은 꿀의 꿀물을 타서
많은 이가 감미롭게 마시게 하라
겸허히 기도하라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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