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이 '우리'에서 '나'로 넘어갈 때, 노자와 장자가 있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매주 금요일은 동양 고전 이야기를 하는 날이다. 계속해서 최근에 열심히 읽고 있는 『장자』 이야기를 이어간다. 몇년 전에는 이런 글을 적어 둔 적이 있다. 주도권이 '우리'에서 '나'로 넘어갈 때, 노자와 장자가 있다. 공자가 인간을 “인”(仁)이라고 하는 본질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면서 그의 철학 체계는 이미 근대성을 대표로 보여줄 준비를 마쳤다. 신의 세계를 벗어났다는 말이다. 공자에게서 본질로 서의 “인”은 잘 보존되고 키워져 할 대상이다. “인”이 확장된 최종적인 단계를 그는 “예”(禮)라고 말한다. 근대 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보편적인 이념이다. 그래서 그는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듣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말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의 철학을 한마디로 개괄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한 주자의 말은 매우 정확 해진다. 여기서 “기”(己)는 개별적이고 경험적이며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일상적인 자아다. “예”(禮)는 보편적이며 집단적이고 이념적인 기준이자 체계이다. 그래서 공자의 철학에서는 일상을 영위하는 경험적이고 개별적인 자아는 부단한 학습의 과정을 거쳐 보편적인 이념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어야 성숙이 완료된다. 여기서는 '나'보다는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다.
노자는 이와 다르다. 보편적인 이념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선'으로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이상'(理想)의 지위를 차지하는 한 '기준'으로 행사된다. 기준으로 작용하면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기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분과 배제 그리고 억압의 기능은 폭력을 잉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준으로 행사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의 단계를 최대한 약화 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것을 그는 “거피취차”(去彼取此)라고 표현한다. 즉 “예”처럼 저 멀리 걸려 있는 이념을 버리고,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구체적 '나'(己)의 일상을 중시하라는 말이다. “극기복례”와는 정반대이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우리'보다는 '나'에게 있게 된다. 보편적 이념의 지배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성에 의존하자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의 책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에서 얻은 생각이다.
지난 3월 24일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더 맵고, 자극적인 맛은 늘 유혹적 이다. 만드는 사람이나, 그 걸 먹고 즐기는 사람에게나 마찬가지 이다. 이 어려운 문제 앞에서, 장강명 소설가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1) 매운 맛, 자극적은 것들의 경쟁이 어느 선을 넘으면 사람들이 그런 맛과 그런 것들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순한 맛과 담백한 것이 각광을 받는 때가 올까? 강강명 소설가는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애초에 우리의 눈, 코, 귀, 입이 불공정하다. 게다가 캡사이신으로 매운 맛을 내고 막말을 던지는 게 재료의 풍미를 살리고 정책을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2)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표준 조율 음을 만들고, 영상물 상영 등급을 정하듯, 라면 맵기와 정치 문화에 대한 성문 규정을 마련해야 할까?
(3) 우리가 각자 감각 기관의 편향된 신호를 극복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할까?
(4) 아니면 순한 맛에 보조금이라도 줘야 할까?
이 질문을 듣고, 우리에게 지금은 공자가 말한 '기준'이 '표준'으로 자리 잡고, 극단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잡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우리'에 방점이 찍혀 있어, '나"로 그 방점을 옮겨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젠 표준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가시 권에서 '하나의 별'처럼 행사해야 한다고 본다. 공자의 예를 너무 고지식하게 해석하지 말고, 그 '예'가 중용, 아니 균형을 위한 표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아침이다.
마른 물고기처럼/나희덕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만 함께 있자고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어두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팔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는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어두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두움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꺽이고 빛나던 눈도 비늘도 시들어 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 『장자』의 「대종사」에서 빌려옴. "샘의 물이 다 마르면 고기들은 땅 위에 함께 남게 된다. 그들은 서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준다. 하지만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로 옮긴다.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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