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비겁'의 반대가 용기(勇氣)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3. 19. 17:23

319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19일)

어제는 춘분이 가까이 왔는데, 눈이 내렸다. 그러더니 다행스럽게 바로 눈이 멈추고, 해가 떴다. 헌법재판소가 해도 너무 한다. 그러나 이렇게 나를 위로했다. 가장 넉넉한 사람은 자기한테 주어진 몫에 대하여 불평 불만이 없는 사람이고, 가장 강한 사람은 타오르는 욕망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며, 가장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이다.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내려도 올 것은 오는 법이다. 비겁하게 살지 않을 테다.

1.
'내란성 우울증'이 계속된다. 왜냐하면 가치가 전도된 이 사회의 모습을 눈뜨고 바라보아야만 내가 속상하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3일 친위쿠데타 이후 내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내란죄를 저질렀다고 질타 받는 이들이 오히려 남을 향해 ‘내란을 선동'한다고 공개적으로 대응한다. 가해자가 갑작스레 피해자인 양 목소리를 높인다.

김관욱 교수는 이런 형상을 비겁함으로 푼다. "떠오르는 단어는 비겁함 뿐이다. 비겁함은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병적인 현상이며 우리 사회의 공적 시스템을 좀먹는 만성적 질환이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며 마치 사회적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다. 정치인, 행정가들이 보여주는 비겁함은 단순한 나약함이나 도덕적 결핍이 아니라 일종의 병적인 상태이다. 이러한 비겁함이 도를 넘어선 현상을 마주할 때 시민들은 극심한 도덕적 충격과 좌절을 경험하며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감내해야 할 고통이 깊어진다." 우리는, 고통을 감내하기 전에, 그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한다. 왜 그들은 비겁한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자기 껍질부터 못 깨는 사람은 또 그런 늙은이가 된다. 저 사람들 욕할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저 꼴 밖에 될 수 없었던 걸, 바로 너희 자리에서 너희가 생각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채현국이라는 분에게 들었던 말이다.

비겁(卑怯)한 사람을 우리는 '겁쟁이'라고 부른다. '비겁'의 반대가 용기(勇氣)이다. 한국의 엘리트 관료들이 비겁하고, 대가 약하다. 조금도 자기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왕을 꿈꾸는 자 옆에는 늘 세습 귀족들이 똑같이 꿈꾼다. 전우용 교수의 담벼락을 읽고 터득한 것이다. 왕이 되려는 자 옆에는 언제나 '세습 귀족'이 되려는 자들이 있다. 왕과 세습귀족들의 나라는 민주 공화국을 파괴해야 만들 수 있다. 높은 곳에 '세습 귀족'을 꿈꾸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언제 폭탄을 맞을 지 모른다.

2.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집단이 비겁함을 보이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이상보다 현실적 계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의 비겁함이 반복된다는 것은 단순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굳어진 병리적 현상이라 볼 수 있다는 게 김교수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그는 의학적으로 ‘병리적 비겁함’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심리학에서는 ‘도덕적 회피’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거나 희석하는 심리적 과정으로, 대중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인들에게서 쉽게 발견된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1961년)과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함’ 개념에서도 나타나듯이 권력자는 자신의 책임을 구조적 요인으로 전가하며 도덕적 판단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비겁함의 병리적 형태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하였다.
▪ “어쩔 수 없었다”라는 비겁함
이는 책임을 외부 요인에 돌리는 가장 흔한 방식이다. 정치인들은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 “불가항력이었다”라거나 “국제 정세 때문이었다”라는 식으로 변명한다. 이것은 병적인 ‘자기합리화’라 할 수 있다. 
▪ “최선을 다했다”라는 비겁함
이 말은 책임을 회피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러나 ‘최선’이란 상대적 개념이며, 실제로는 무능함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으로 결과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누구 때문에 못했다”라는 비겁함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은 오래된 전략으로 ‘야당이 반대해서’ ‘관료들이 협조하지 않아서’라는 식의 변명은 흔하다. 심리학적으론 ‘책임 회피’이며 인류학적으론 ‘희생양 만들기(scapegoating)’의 전형적인 사례다. 역사적으로 독재정권은 항상 외부의 적을 만들어 자신의 무능을 감추려 하지 않았던가?

3.
위의 세 가지 일반적(?) 비겁함에 더해 시민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병적인 비겁함이 있다. 
▪ “법을 가장 잘 지켰다”라는 비겁함
비겁한 정치인은 법과 제도를 핑계 삼는다. 이는 ‘법률적 형식주의’라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이 “우리는 법을 따랐을 뿐이다”라고 주장하며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지적했다. 법이란 도덕과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야 하는 도구이지 책임 회피의 방패가 될 수 없다. 
▪ 그 모든 비판에도 떳떳하다고, “오히려 화를 내는” 비겁함
일종의 ‘도덕적 방어기제’이자 ‘방어적 공격성’이다. 자신이 공격받을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공격성을 높이는 일종의 ‘투사(projection)’다. 정치인들이 비판을 받을 때 사과하거나 반성하기보다 오히려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 앞선 모든 비겁함에 대한 비판에도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라고 겁박하는 비겁함
일부 지도자들은 자신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포장하며 국민을 협박한다. 만일 “내가 아니면 나라가 무너진다”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지도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떠올려야 한다. 독재자와 같은 정치인과 지지 세력이 비겁함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다면, 우리 시민들은 도덕적 분노와 연대로 맞서야 한다. 의학에서 면역체계가 병균을 퇴치하듯이, 사회적 면역력은 시민들의 연대에서 비롯된다. 연대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정의가 있다.

"단결은 하나의 조직 안에서 이견을 극복하거나 유보하고 뭉치는 것이다.
통합은 두 개 또 그 이상의 조직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연대는 각 조직이나 개인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사안에 따라 힘을 모으는 것이다."(전우용)

지금 우리 사회는 심한 갈등 속을 지나고 있다. 남북 분단에 이어 짧은 기간에 민주화와 압축적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 지나친 경쟁과 승자 독식 문화, 성과지상주의에 물질만능 등의 풍조가 갈등의 골을 깊이 파 놓고 있다. 게다가 보수와 진보의 이념, 동서 또는 중앙과 지방의 지역, 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빈부, 청장년과 노년 세대의 가치관 대립과 복지정책, 양성문제, 대-중소기업, 노사,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은 물론 심지어 장애인,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갈등이 다양하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갈등 해결을 통한 사회통합이다. 우선 정치권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주문한다. 타협 없는 자기확신, 선거의 유불리에 따른 정파 이익 우선, 편가르기, 증오와 복수를 멀리하고 양보와 타협을 통한 통합, 연대와 포용, 국익 아니 공익 우선과 미래 지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4. 
비겁의 반대가 용기(勇氣)이다. 난 프랑스 유학 시절 친구들이 나에게 용기를 내(프랑스어 Bon Courage!)라고 하면 싫어했다. 용기의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용기의 반대가 비겁이라고 생각하니, 이젠 그 용기의 위대함을 잘 이해하겠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최적의 삶을 위한 전략도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이 겁쟁이"이라 했다. 전쟁터에서 겁쟁이는 만난 적도 없는 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지레 도망친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공포가 그를 겁쟁이로 만든 것이다. 나는 우연히 태어났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태어났다고 여기고 싶다. 이렇게 태어난 여기 이 땅에서 해야만 하는 임무는 무엇인가를 매일 아침마다 나는 물어야 한다. 그 임무는 나에게는 의미(意味)가 있고, ,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움, 즉 미(美)를 선사해야 한다. 의미가 있는 일이란 타인과 구별되는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만 시도되고 추진될 만한 일이다. 만일 그 일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도, 그럭저럭 유사하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일에는 나만의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내게 불가항력적으로 맡겨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은 나라는 고유한 인간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특별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의미가 있는 일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되어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흘러 나오는 소리에 반응하는 자는 용맹스럽고 위대하다. 보통사람들은 자신을 돌아 보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온통 몰입되어 있다. 대중이 원하는 자신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로 치장한다.  시시각각 펄럭이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삶에 평온이 없다.  SNS나 미디어를 통해 조작된 이미지를 자신의 삶의 모델로 삼아 자신의 모습과 마음을 화장하고 성형한다. 대한민국은 IT강국이 아니라, '흉내' 강국이다. SNS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허상이 아니라 진상이라고 착각한다. 어떤 대상의 개성을 조용히 인정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부러움을 조장하거나, 싫증이 나면 바로 시기로 돌변해 악의적으로 공격한다. 우리는 IT를 통해 자신과 다른 인간과 문화를 경험하며, 자신을 독특한 다름을 지닌 존재로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영혼을 고양시키기보다는, 평범하고 진부한 대중의 일원으로 살길 바란다. 그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다. 그리고 비겁한 사람이다.

5. 
어떤 사람이 낙타에게 물었다. "오르막이 좋으냐, 내리막이 좋으냐?" 낙타가 대답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짐이다." 저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에게 짐이 없다면 얼마나 발걸음이 가벼울까? 인생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가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할 때가 많다. 마음의 짐이 무거우면 인생 길이 힘들다. 살아가는 일이 자꾸 짐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욕망을 가볍게 하는 게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 개개인에겐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가 있다. 지나친 욕심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오버해서도 안되고 감당해야 하는 무게를 비겁한 방법으로 줄여가도 안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순탄하게 돌아가는 것은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낙타의 생/류시화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들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6. 
스마트폰 보기를 줄여야 한다.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 세대>>는 현실 세계의 ‘과잉 보호’와 온라인 세계의 ‘과소 보호’가 어떻게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지 분석한다. '과잉보호'는 자율적인 놀이를 통해 호기심과 독립심을 키우고, 또래와 겪는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방해한다. 저자는 “어린 나무가 제대로 자라려면 반드시 바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람은 나무를 휘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 나무의 세포들은 압력을 견디느라 더 단단해지고, 뿌리는 더 깊어진다. 약간의 스트레스가 면역력을 높이는 안티프래질 이론을 양육에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온라인 세계의 '과소보호'가 심각하다. 초연결 시대의 단절이 필요하다. 미국 13주에서 아동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제한하는 법률이 통과됐다. 프랑스는 13세 미만 스마트폰 사용 금지 법안 입법을 검토 중이고 호주는 16세 미만 소셜미디어 가입 금지법을 추진 중이다. 과거보다 나빠진 아이들의 정신 건강 때문이다. 모든 것이 연결된 과도한 ‘소통의 시대’는 ‘고통의 시대’로 치환되었다. 상대 마음을 읽는 ‘낭독의 시대’는 가고 ‘난독의 시대’가 왔다. 스마트폰은 이제 아이들의 여섯째 손가락이다. 이들에게 시급한 건 과도한 IT 기기를 분리하는 일이다. 초연결 시대의 단절은 이제 건강한 양육의 핵심이 될 듯하다. 어른들도 스마트폰을 너무 보고 있다. 이것이 온라인 과소 보호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망가진 건 어른의 뇌도 마찬가지다.

좀 촌스러운 이야기인 줄 모르지만, 어린 시절의 체험 학습을 통해 얻은 소중한 기억들은 복합적인 감정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강원도 체험학습 중 발생한 사고로 인솔 교사가 유죄 판결을 받자 무사안일이 체험학습의 목표가 됐다. 교사들은 ‘취소를 전제로 한 계획’을 세우고 그래도 아쉬운 학교들은 운동장에서의 하루 야영을 택한다. ‘아빠, 어디가’ 방영 이후에 자란 요즘 아이들은 가족여행에 익숙하다. 굳이 체험학습을 갈 필요가 없을 듯하지만 단체 활동의 경험은 다른 차원의 배움이다. 샤워를 제때 못하고 불편한 잠자리를 참느라 분명 고생했는데 재밌었던 아리송한 추억들이 생긴다. 그런데 어른들의 무심함이 아이들의 중요한 성장 단계를 놓치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어떤 경험이든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밋밋한 생활을 깨트린 경험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체험학습을 경험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7. 
시인 ‘타고르’는 “고통을 멎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한다. 성공의 은혜가 아니라 “실의에 빠졌을 때 당신의 귀하신 손을 잡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기도한다. 그리고 간절함을 담아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살다 보면,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은 모두 맞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이들을 많이 봤다. 그러나 포기가 곧 실패는 아니다. 때론 멈추는 게 더 큰 용기일 수 있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은 바라는 걸 이루는 게 아니라, 흙탕물 같은 자기 마음을 정화해 평정과 냉정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이젠 기도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와 다짐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기도하는 모든 이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좋아질까? 우리 삶에 맑은 날만 이어진다면 이 땅은 꽃과 나무 없는 사막이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별을 볼 수 있고, 빗속을 통과하면 무지개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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