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웃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 님의 삶을 본받는 그리스도 인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3. 17. 09:13

319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16일)

1. 
어제는 본당 공동체 봉사자 교육이 있어 교구청에 다녀왔다. 나는 유아영세를 받고 카톨릭에 입문하여, 교리를 잘 모르고 맹목적으로 성당을 다녔다. 그러는 중에 프랑스 유학 동안에도 카톨릭(보편) 교회의 의미를 잘 모르고 습관적으로 신앙 생활을 했다. 다만 다음 몇 가지는 늘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사진은 교구청 정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7 성사 중의 고해성사의 모습이다.

2. 
소외 받고 어려워 하는 낯선 이웃이 곧 예수이시다. 그 이웃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그리스도인이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 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로 예수를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 예수라 부른다. '신'의 특징은 '낯섦'과 '다름'이다. 우리는 세상의 걱정과 유혹이 너무 강해서 눈이 멀고 뜨거움이 식고 말았다. 예수에 대한 뜨거운 체험을 회복하여야 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파편적이고 편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이 종교이다. 나와 다른 이데올로기와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신'은 비로소 우리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3. 
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굳은 결심이다. 기도는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내는 결단의 순간이다. 그렇게 해서 기도는 자신만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쌓여 있는 적폐(積弊)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건 '영적 성숙, 영혼을 살찌우자'는 거다. 그 영혼을 '살 찌움'으로 '허심(虛心)'의 세계를 구축하는 거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사람에게 아무런 삶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묻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욕망만을 무작정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도는 오히려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는 행위다. 기도는 자신이 욕망을 신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경청하는 수고이다. 그러니까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최선을 찾는 행위이고, 습관적으로 해오던 생각과 말,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출발한다. 

4. 
일상에서 '선행(善行)을 해라'는 거였다. 예언자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善行)이라고 말했다. 그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가를 묻는 일이다. 미가는 우리가 가장 매력적인 향기를 잔잔하게 내뿜을 수 있는, 인향(人香)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해주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동물적인 인간에게서 신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다음 세 가지를 나누어 볼 수 있다.

▪ 정의(正義) 실천하기
정의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미쉬파트'란다. 그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공평하게 판단하다, 재판하다'이다. 그러니까 '미쉬파트'의 소극적 의미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동일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에 대한 벌을 넘어 사람들 각자에게 걸맞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성서는 지속적으로 미쉬파트는 '과부, 고아, 이민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그들의 바람을 사회에서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오늘날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한 부모가정, 노인계층이 포함된 기초생활자, 차상위 계층 등이 바로 이 미쉬파트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사회의 성숙도와 정의 실현 정도는 순전히 그 사회가 이 계층을 어떻게 대하느냐 에 달려 있다. 이 계층에 대한 소홀이나 무관심은 자비의 부족이 아니라, 신의 제1명령인 '미쉬파트'를 범하는 죄악이다. 신이 인간에게 원한 첫 번째 명령,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선은 사회의 취약 계층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신을 위한 '예배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평상시의 작은 선행이 성전에서의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다.

▪ 자비 희구(慈悲 希求) 하기
'자비 희구'를 히브리어로 하면, '아하보쏘 헤세드'라 한다. '아하보쏘'는 보편적으로 '사랑하다'로 해석한다. 특히 '인간들 간의 사랑, 즉 부부, 자녀, 친구들 간의 사랑과 우정 혹은 신에 대한 인간의 정성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적인 감정이 내포된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희구(希求)'로 번역할 수 있다. 헤세드(chesed)는 현대어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인애(仁愛)'라고 해석하고 영어로는 'steadfast love(변치 않는 사랑)', 'kindness(친절)'로 번역된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성이나 사랑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랑으로 한자로 표현하면 '총애(寵愛)'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이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믿어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다. 신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신은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이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무아'의 상태로 진입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영어로 'I'm nothing'의 상태가 되어야 아가페, 헤세드의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의 생존은 바로 어머니의 헤세드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어린 아이는 어머니를 통해 헤세드가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도약하게 하는 이타적 존재라는 사실을 서서히 배운다. 신은 우리에게 자기 희생적 사랑을 목표로 삼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경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의는 실천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인 헤세드는 희구(希求)하라는 명령이다. '희구 하라'는 말의 뜻은 '바라서 요구함'이다. 그러니까 헤세드를 원하고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말이다. 희구의 비슷한 말은 간구(懇求)이다. 간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구함'이란 말이다. 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갈구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헤세드는 관심의 단계를 넘어선다, 그것에는 베푸는 주체와 받는 주체가 일치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아파하는 갓난 아기의 고통을 어머니도 느끼듯이 인간은 헤세드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나의 삶으로 인식한다. 신은 그런 삶이 어렵다고 판단해 헤세드를 '희구하고 간구 하라'고 주문한다는 거다.

▪ 겸손(謙遜)생활하기
겸손 생활을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만난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겸손 생활 하기'이다. 겸손은 자기 비하적인 면과 동시에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발점이다.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계곡 물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리더들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인간이 겸손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 생명의 오묘함을 완벽하게 알 수 없고, 단지 그 지극한 일부만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근본은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일일 뿐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직업, 명성 그리고 재산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혹은 남에 의해 강요된 하느님을 숭배하고 그 하느님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믿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신봉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 종교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생을 산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만의 하느님'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하느님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지름길이 때문이다. 그 하느님을 찾게 되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5. 
그렇지만, 그 교육에서 많이 배웠다. 그 배운 내용은 블로그에 정리한다. 대신 좀 길지만, 다음 시 속에 배운 것들이 거의 다 들어 있다. 길지만, 자주 읽으며, 내 일상의 삶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사순 식기에 필요하다. "네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그러면 우리는 구원 받는다. 다시 말하면 부활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 그래 사순 시기는 배우고, 희망하는 거다.


나는 배웠다/샤를르 드 푸코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 뿐임을.
사랑을 받는 일은 그 사람의 선택에 달렸으므로.

나는 배웠다.
아무리 마음 깊이 배려 해도
어떤 사람은 꿈 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것을.

인생에선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 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서로 배워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다
그 일에 어떻게 대처하는 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 내도 거기엔 늘 양면이 있다는 것을.
어는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고 떠나야 함을.
더 못 가겠다고 포기한 뒤에도 훨씬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드러낼 줄 모르는 이가 있다는 것을.
내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남을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정이 계속되듯 사랑 또한 그렇다는 것을.

가끔은 절친한 친구도 나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그래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남에게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고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해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툰다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며
다투지 않은다 고 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또 나는 배웠다.
때론 남보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두 사람이 한 사물을 보더라도 관점은 다르다는 것을.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 앞선다는 것을.
친구가 도와 달라고 소리칠 때 없던 힘이 솟는 것처럼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글 쓰는 일이 대화하는 것처럼 아픔을 덜어준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과
내 주장을 분명히 하는 것을 구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리고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 받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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