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319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11일)
"사소한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오늘 아침 화두이다. 이것은 노자의 철학으로 노자 <<도덕경>> 제52장 이야기이다. 오늘 사진은 올해 경칩에 산 <설유화>이다. 어제 서울 모임에 다녀오는 바람에 오늘 오전에 공유한다.
1.
'사소한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는 말은 "견소왈명(見小曰明)"으로 표현되었다. '조그만(小) 것에서 위대함을 볼(見) 수 있는 능력이 '현명(明)함'이라는 거다. "明", 이건 밝을 ‘명'자라고 한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明)자를 풀이하면, 달과 해가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다. '명'자는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 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시비를 따지는 병폐를 고치려면 밝은 "명(明)"이 있어야 한다.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서 나오는 일방적 편견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물을 한쪽에서만 보는 편견을 버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동일한 사물이 이것도 되면서 저것도 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거도 저것도' 본다는 말이다. 나에게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는 이 것만이라며 고집하고 그것을 절대 화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상황에 절대 필요한 인문 정신이다.
2.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 강함'이라는 말은 "수유왈강(守柔曰强)"으로 표현되었다. '부드러움(柔)을 지키며 사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거다. 부드러운 물이 강하고, 센 바위를 이기듯이, 부드러운 풀이 강한 바람에 견디듯이, 부드러움은 위대한 강자의 정신이라는 거다. 부드러움은 이 자연계가 운행하는 모습이다(弱者道之用, 약자도지용), 또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의 '도'는 강한 자보다 약자를 돕는다. 여기서 하늘의 도는 '진리'라고 읽을 수 있다. 그래 약한 부분에 눈길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 "지유치빙지견(至柔馳騁至堅, 제43장)"이라 말한다.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지극히 견고한 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거다. 여기서 "치빙(馳騁)"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내달리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뚫고 들어간다'는 의미로 보기도 하고, '완벽하게 제어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말을 달리게 하는 것은 말을 제어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유(至柔)"가 "지견(至堅)"을 제어한다고 읽을 수 있다. 마치 여자가 남자를 제어하고, 물이 불을 제어하는 것과 같다.
2.
"지유치빙지견(至柔馳騁至堅)"은 제36장에 나왔던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하고 견고한 것을 이긴다)과 같은 뜻을 갖는다. 강한 다이아몬드를 뚫고 지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한 물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둘 다 부서지고 만다. 물과 같은 가장 부드러운 물질이라야 다이아몬드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중국 한나라의 명장 이광이 어느 날 산속을 가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화살을 쏘아 정통으로 맞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런데 바위라는 것을 알고 다시 쏘니 화살이 계속 튕겨져 나왔다. 마음속에 바위가 없는 상태, 즉 무(無)의 상태에서는 바위를 뚫을 수 있었지만 바위를 채운 상태, 즉 유(有)의 상태에서는 그것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를 뚫을 수 있는 것은 '무'밖에 없다. 그리고 유약해지는 것은 삶으로 가는 것이고, 굳세고 강해지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우리의 몸도 유연해야 건강하고 부상의 염려가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늘 스트레칭과 운동을 통해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마음이나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마음도 비워 유연하게 하는 것이 몸을 유연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음에 굳은 신념이나 집착이 있으면 유연한 몸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의 병의 대부분은 마음에서 나옴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에서 생각을 비우지 못하면, 항상 다투느라 괴롭다. 돈, 명예와 권력 등을 다투어 적을 만들게 되고, 얻어도 행복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생각을 비워야 그것들을 얻기 쉽고, 얻어도 집착하지 않으니 위태롭지 않게 된다.
3.
최근에는 페이스북을 보다가, 좋은 시가 담벼락에 오르면, 그 시를 가져온다. 그리고 내 <인문 일지>의 화두에 맞으면 그것을 공유한다. 이 시는 <인문학(liberal Arts)> 그룹의 Kyeesoo Han 님이 올린 거다.
힘과 용기/데이비드 그리피스
강해지기 위해서는 힘이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힘이
방어 자세를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힘이
의문을 갖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전체의 뜻에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힘이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는 힘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학대를 위해서는 힘이
그것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서기 위해서는 힘이
누군가에게 기대기 위해서는 용기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4.
형사재판 절차상의 구속 취소와 위헌 여부를 다투는 탄핵심판은 완전 별개다. 비상계엄이 헌법상 실체적, 절차적 요건을 모두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윤10은 복귀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를 침탈하는 현장을 온 국민이 지켜봤다. 헌법재판소가 ‘윤 파면’ 이외의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역사는 때로는 옆으로 횡보하기도 하고, 때로는 뒤로 후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전진한다. 다만 직진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작용에는 반작용이라는 있는 '하늘의 도'를 믿는다. 윤10 석방으로 잠시 역사적 반동으로 후퇴하는 것 같지만 더 큰 반작용의 에너지가 다시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킬 것이다. 비상계엄의 역사적 반동도 두려움 없이 이겨낸 우리가 아닌가? 12월 3일 밤을 잊지 말자. 우리가 우리의 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자가 말하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도덕경>>, 제40장)"이 하늘의 도이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 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때는 기다리면 온다. 지금 정국이 돌아가는 것에 기다림이 필요하다. 한 번 더 이야기 한다. 반대편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운동력으로 해서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거다. 이 운동력은 바로 자연이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노자는 보는 거다. 쉽게 말해서, 만사는 그저 한 쪽으로만 무한히 뻗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쪽으로 가다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게 우주의 리듬이라는 거다. 어떤 상황이 극에 이르면 반전(反轉)하여 거꾸로 전개 된다는 이런 우주의 존재 방식이 노자가 말하는 "반(反)"이라는 거다.
5.
윤10의 형사재판 절차에 관한 구속취소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들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윤10은 곧 헌재에서 파면될 것익디 때문이니다. 그러면 전직 대통령이 되고 내란죄 이외의 죄로 또다시 구속기소가 가능하다. 현직 대통령은 내란죄로만 기소할 수 있다. 윤10은 곧 전직 대통령이자 내란 수괴 피의자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그 결정이 잘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가장 나쁜 결정은 걱정만 하고 아무 결정을 하지 않는 결정이다. 지난 12월 3일 내란의 밤 때처럼 똘똘 뭉쳐 역사의 담장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날 밤의 뜨거운 동지애로 뭉쳐야 한다. 역사는 직진하지도 않지만 후퇴하지도 않는다.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고 진실이 이긴다. 나는 우주의 원리 그리고 하늘을 믿는다.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는 "극즉반(極即反)"을 믿는다. 정점에 도달하면 내려올 일 밖에 남지 않고, 반대로 최저점으로 추락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도 있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는 거다. 난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믿는다.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정점에 달하면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 나는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는다.
몇몇 '법 꾸라지'들에게 오늘은 졌다. 그러나 내일은 이길 것이다. 하늘이 충분히 어두워야 별이 보인다. 어둠이 짙어야 별을 볼 수 있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이고, 별이 보이면 날이 곧 밝아온다. 우리는 당장 전개되는 현상에 교만 해지거나 혹은 의문을 품고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거기엔 하늘의 섭리가 있으니 겸손히 그 뜻을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개인의 인생이나 기업, 권력도 마찬가지로 흥망성쇠의 원인과 결과가 있다.
문제는 이 모두가 인간의 눈에는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하는 일은 사람이 보기에 난해하다. 그래서 신의 섭리는 없거나 침묵하고 있는 듯이 비쳐진다. 섭리는 때로 묘하게 작용한다. A 라는 죄에 대해 B 라는 죄목으로 응징하기도 한다. 작가 이병주의 깨달음이다. 필화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경험한 그는 그것이 섭리였다고 말한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한 대목이다. “섭리란 묘한 작용을 한다. 갑의 죄에 대해서 을의 죄명을 씌워 처벌하는 것이다. 꼭 벌을 받아야만 마땅한 인간인데 적용할 법조문이 없을 때 섭리는 이러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격언 그대로 섭리의 맷돌은 서서히 갈되 가늘게 간다.” 그날이 올 것이다.
6.
그렇게 믿고, 우리들의 실천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관념적 토론을 하는 것은 불필요 하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하고 실천적 행동을 해야 한다. 뭐든지 해야 한다.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니버의 기도>이다. 이걸 한문으로 하면 다음과 같이 세 자로 요약할 수 있다. 정(靜), 용(勇), 지(智). 여기서 차분함은 '조급해 하지 않음'이다.
노예였다 스토아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는 "세상에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과 조절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조절(調節)'이란 자신의 의지와 행위로,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 상황을 수정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과 조절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지혜(智慧)'이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자신의 정성을 몰입하는 것이 '현명(賢明)'이다.
▪ '지혜'는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을 수련하여 고요함과 평상심 그리고 행복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을 소유하려고 평생 수고하다가 십중팔구 씁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우리들의 삶 속에는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것들, 예를 들어 갑작스런 사고,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들이 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고 자체가 아니라, 그 사고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 중에 하나가 자기-자신을 이기심이라는 경계를 초월하여 저 높은 경지로 올라 탁월한 사유의 시선으로 '줌-아웃'하여 자기 자신을 관조하려는 시도이다. 줌-아웃은 에픽테토스가 말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부, 명에 그리고 권력의 유혹을 약화시키고, 1인칭과 2인칭(나와 너), 더 나아가 1인칭과 3인칭(나와 그 혹은 그것)의 구별을 점점 모호하게 만들어, 하나로 융합한다. 배철현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나'일 뿐만 아니라, '나는 너'이며, '나는 결국 그것'이 된다. 내가 너가 되는 과정이 연민이며, 내가 그것이 되는 깨달음이 해탈이다." 천천히 나누고 구별하며 읽어야 한다.
▪ 현명(賢明)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지혜이다. "현명은 상아탑에서 생산되는 고리타분하고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삶의 한 복판,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시기와 악의가 판을 치는 도시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 그것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수용하려는 똑똑함"(배철현)이다. 현명한 자는 매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즉흥적이며 자동적으로 행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어울리는 고유한 임무를 발견하여 오랜 기간 동안 최적의 결과를 내기 위해 인내의 수련을 거듭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자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현명한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그러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시의적절(時宜適切, 그 당시의 사정이나 요구에 아주 알맞음)'하다.
7.
그리고 에픽테토스는 남다른 고통과 고생을 통해,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 위한 세 가지 훈련을 말했다. 그것은 “너희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으며 너희들이 피하고 싶은 상황에 절대 빠지지 말라”이다. 이 조언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우리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사람에게 '일생을 통해 하고 싶은 한 가지를 말해보십시오' 묻는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말을 더듬을 것이다. 그 이유는 스스로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깊게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에게 알맞은 인생의 과업을 심사숙고하여 찾아내는 여정이다. 만일 그가 인생의 과업을 발견했다면, 자신답지 않은 것, 즉 자신이 피하고 싶은 상황을 미리 감지하고 피할 것이다. 교육이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유도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이 과정을 통해, 누구를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 자아상을 구축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지금’ 즐긴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일상의 훈련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다름 세 분야를 훈련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욕망(欲望)’ 둘째는 ‘선택(選擇)’, 그리고 셋째는 ‘승복(承服)’다.
▪ ‘욕망’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잠재된 천재성을 발휘할 수 없는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겠다는 의지다. 에틱테토스는 ‘오렉시스’라는 단어로 ‘욕망’을 표현하였다. ‘오렉시스’는 ‘뻗을 수 있는 곳까지 팔을 최대한으로 뻗다’라는 의미를 지닌 ‘오레고'와 명사형 어미 ‘시스’의 합성어다. '팔을 움츠리지 말고 최대한으로 펴는 연습을 하라는 요구'다. 세상에는 내가 팔로 획득할 수가 있는 것과 획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에 몰입하여 최고의 성과를 내려는 마음이 바로 ‘오렉시스’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이다.
▪ ‘선택’이란 나의 최선을 집약시킬 대상을 선별하는 능력이다. 그리스 단어 ‘호르메’는 원래 강물과 같이 ‘자연스럽고 강력한 흐름’이란 의미다. 이 단어는 ‘시작, 열정, 투쟁, 폭력, 식욕’과 같은 다양한 의미들을 관통하는 ‘힘’이다. 내가 오늘 훌륭하게 마칠 수 있는 임무는, 심사숙고를 통한 내 사적인 선택의 결과다. 선택은 또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단호함이다.
▪ ‘승복’이란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온전히 몰입하여 완수하려는 결심이다. 그리스 단어 ‘쉬그카타쎄시스’는 성급에서 야기되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임무의 완성을 위해 1부터 10까지, 그 순서대로 적절하게 배열하고, 그 각각에 자신의 혼신을 바치는 희생이다. 에픽테토스는 매일 아침 자기 안에서 이 세 가지 원칙을 찾으라고 말한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