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3월 4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정부의 처사들을 보면, 뉴 라이트라는 말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 오늘 아침도 어제에 이어 오늘의 시대정신을 살펴본다. 사실은 뉴 라이트 이전에 올드 라이트가 먼저 있어야 이 뉴라이트라고 하는 게 성립하지만, 올드 라이트가 부르는 말은 없다. 뉴라이트라는 말이 이제 2002년경에 처음 쓰이기 시작했는데, 그 전에 여기까지 진행된 배경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소련 등 사회주의의 몰락이었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 사회주의자였던 사람들, 특히 사회주의자 중에서도 주사파나 주사파에 가까웠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고 또 한편으로 북한의 그 당시 90년대 초반의 어려움을 직접 목도하면서 전향을 한 거다. 전향해서 과거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들의 이념을 봤더니 반공주의 밖에 없는 거였다.
공산주의가 망한 마당에 반공주의가 오래가지 못 하겠다. 이거로 지배가 불가능하겠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이념을 주입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거고. 그게 자기들이 발견했던 것이 19세기 자유주의 경제 사상이었다. 즉 시장주의이다. 그러니까 기존에 반공주의라는 기득권 이념을 우리가 올드 라이트라고 한다면, 그것과 시장주의를 결합한 것이 뉴 라이트이다. 여기서 시장주의를 간단히 얘기하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경제법칙은 도덕법칙과 무관하다.
2. 경제 주체들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면 된다.
3. 경제 주체들의 관계는 무제한의 자유 경쟁이다.
4. 국가는 이른바 경제의 관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일제강점기에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라고 하는 것이 우리 역사를 발전시킨 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더 자연스럽게, 인권 억압이라든가 인권 유린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전부 무관한 거였다. 예를 들어, 현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말한, "없는 사람들은 부정 식품 이하라도 사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최저선을 끌어내리는 이야기이다.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시장주의와 반공주의가 결합해서 뉴 라이트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사고는 당연히 자연스럽게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일종의 한국사회에 베푼 은혜로 인식하게 되는 거다. 전에 문창극 씨가 했던, 식민지 지배가 '하나님의 축복'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위안부를 매춘이라고 하는 류석준 교수도 들어갈 수 있다. <<반일 종족주의>>를 쓴 이영훈 교수도 자연히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까 독재를 했든 민족 차별을 했든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든 간에 결과적으로 경제성장이라고 하는 성적표만 냈다면 그것은 선이다. 그게 역사의 객관성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다. 그러다 보니 항상 하는 말이 감정적 반일에 치우치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자는 거다. 여기서 감정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는 거다. 그리고 독립운동 같은 거 얘기하지 말자는 거다. 그러다 보니, 이런 역사적 왜곡도 묵인된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과거에 했다는 다음 말들이 그런 차원이었던 것이다. 직접 들어 보자. "국민 주권론에서 이야기하는 그 국민이라고 하는 것은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서 있는 그 사람의 집단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에서 말하는 그 국민은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존재로써의 국민입니다." (당시 성신여대 교수 / 2019년 3월 28일, 한국자유회의 제8차 토론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주권자로서 권력을 다 행사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공화국에 살고 있는 게 아니죠? 그건 그냥 무정부 상태로 우리가 되돌아간다는 얘기죠?" "대한민국 국민이 5,000만이죠. 자, 그렇지만 대한민국 국민 5,000만이 모두 주권자로서 권력을 직접 행사한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얘기지요." (통일부 장관 / 지난 2023년 9월 5일, 국회 대정부 질문) 이 건 전체주의다. 국가유기체론이고. 국민주권론을 부정하고, 국민을 일종의 거수기로만 좀 보고 일종의 국가가 동원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으로 보는 그런 이야기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전통적인 유신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유신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특수 상황 속에서 이른바 국민의 기본권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최고 통치자의 결단 아래 종속되어야 한다라는 거였다. 여기까지는 올드 라이트의 사고이다. 그래서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 시대 유신 체제라는 게 사실 전제군주제였다. 아주 요식적인 행위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로 간접 선거로 대통령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이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그러면 국민은 거기에 대해서 어떤 반대나 저항의 의사도 표시할 수 없는 이런 체제가 유신 체제였고 그 체제를 지탱했던 것이 바로 이제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그게 올드 라이트의 사고였다.
이것과 달리, 뉴 라이트는 그것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그 올드 라이트의 사고를 토대에 두고 그 위에 시장주의를 결합했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상황은 뉴라이트와 올드 라이트가 혼재되어 있다. 국민 개개인한테는 주권이 없다. 아니, 추상적인 국민에게만 있고. 자기들이 따로 대의 한다. 귀족정같은 얘기이다. 그러니까 추상적 국민이라고 하는 말과 개, 돼지라고 하는 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거다. 이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일부 세력들이 도덕은 따지지 말고 이익이 무엇인지 보고, 그 이익이 곧 선이라고 보고 주장하는 꼴이다. 선이라는 개념도 잘 안 쓴다. 사실 시장주의 개념에서는 선악 자체가 없다. 그러니까 개념 없이 다음과 같은 말들을 쉽게 한다. 예를 들어 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3대 발언이 그거였다.
- 부정식품이라도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
- 노동자가 최저임금 이하로도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노동자가 주 120시간도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 시장이 작동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이냐 또는 인간다운 것이냐, 인간의 존엄성이라든가 인간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것은 아니냐 이걸 따질 이유가 없다는 거다.
시장은 도덕적 원칙과 무관하다. 그래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에는 국가가 개입해선 안 되고, 그리고 시장 탈락자들, 시장에서 이제 패배했거나 아니면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놓인 사람들만 제한적으로 공동체가 구제하면 된다는 거다. 이 사고가 19세기 자유주의이다. 그게 이명박 정권 때 풍미했던 이익의 사유와 손실 또는 피해의 공공화라고 하는 민영화 이데올로기였다. 시장도 일종의 사회인데, 그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손실을 보는 사람들은 공동체가 책임을 지는데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이익은 공동체와 무관하게 개인이 갖는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다.
우리가 이룬 사회적 합의는 시장 자체가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최저임금제 또는 부정식품 단속들이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런 게 거래되면 또는 이런 방식으로 거래되면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손상시킨다는 판단 때문에, 케인즈 이래 국가의 시장 개입이라고 하는 것은 시장을 공정하게 또는 정의롭게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야기 해왔는데, 뉴 라이트들은 그렇게 개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다. 그들의 눈에, 전 정권이 초창기부터 최저임금 인상이라든가 중대산업재해법이라든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거 자체를 부정한다. 그런 차원에서 현 정권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자유 시장주의일 뿐이다.
전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에 미국에서부터 나온 것이 신자유주의 비판론이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즉 1%를 위한 99%의 시대를 끝내자는 거였다. 그래 전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던 것이다.
- 시장을 공정하게
- 시장을 정의롭게,
-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
이런 식의 정책들을 취했기 때문에, 뉴 라이트들은 그게 자유 시장경제를 파괴하는 공산 전체주의라고 보는 거다. 그러니까 전 정부가 시장을 부쉈다고 생각하는 거다. 엄밀히 말하면.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이른바 탐욕을 견제하려고 들었다는 거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기득권층이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는데 그걸 억제하려고 들었다는 거다. 예컨대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려고 한다든가 중대산업재해처벌법 제정한다든가, 최저임금 인상한다든가 이런 것들은, 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이야기했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기업가는 최저임금 이하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생산자는 부정식품을 팔아도 괜찮다, 기업가는 노동자를 주 120시간씩 부릴 수 있어야 된다는 이런 걱들을 막으려고 했던 것 자체가 굉장히 못마땅한 거였다.
사실 이명박 시대부터 뉴 라이트 이데올로기가 시작되었고 그 이데올로기를 정책적으로 퍼뜨렸다. 퍼뜨리는 과정에서 이런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시장이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여기는 정글처럼 자연 법칙에 지배 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에 국가가 개입해서 팔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팔지 마라, 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사지 마라라고 하는 거 자체가 이른바 체제 파괴적이라고 이해를 하는 거다. 이런 식의 시장주의 또는 뉴라이트 이념은 기득권의 자기합리화에 좋은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그런 쪽에 있는 분들, 사회적으로 보면 예컨대 우리 사회의 엘리트층 중에 이런 뉴 라이트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진 것이다. 여기에 현 정부는 더 크게 뉴 라이트 이념으로 기울어졌다. 게다가 대통령이 실력과 개념이 없는 게 더 큰 문제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서 멈춘다.
대안은 무엇일까?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명분(義) 역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동기지만, 명분만 가지고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아이를 많이 낳는 일이 애국하는 일이라고 홍보해도 젊은 부부는 아이를 낳는 일이 이익이 되는 사회를 원한다. 선거에서 본인에게 표를 주는 일이 명분과 이념에 합당하다고 후보자가 울면서 호소해도 유권자는 그 사람이 당선됐을 때 우리 지역사회와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될 것인지를 먼저 고민한다. 명분과 실리 모두 중요하지만 실리를 제쳐두고 명분만을 강조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 동기가 이익이라고 해도 명분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동기다. 아무리 이익이 있더라도 명분이 없으면 사람의 마음을 완전하게 얻을 수 없다. 독립투사들은 비록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나라의 독립이라는 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그 명분 뒤에는 조국의 독립과 해방이라는 만인의 이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대안은 실리와 명분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 경계에서 잘 조율을 해야 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그 "경계에는 꽃이 피기" 때문이다.
꽃/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러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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