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들의 감정 중에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 '기쁨'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3. 6. 16:49

318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3월 6일)

1. 
어제는 서울 병원에 정기검진 차 다녀오면서, '봄을 피우는' 설유화라는 꽃을 사가지고 왔다. 설유화의 이름은 '雪(눈 설)', '柳(버드나무 유)', '花(꽃 화)', 한자 그대로 '버드나무에 내린 눈 같은 꽃'이라 하여 붙여졌다 한다. 눈꽃처럼 새하얀 모습이 이름과 잘 어울린다. 설유화는 눈처럼 하얀 꽃을 피우기는 하지만, 3월 초에 개화하여 봄의 시작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이다. 설유화의 또다른 이름은 ‘가는잎조팝나무’  이다. 설유화는 얼핏 보면 조팝나무로 착각할 만큼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 줄기를 자세히 보면 설유화는 조팝나무에 비해 가는 줄기를 가지고 있다. 설유화의 꽃말은 ‘애교’라 한다.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는 가느다란 줄기, 그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고 하얀 꽃들의 귀여운 모습을 떠올리면 그 의미가 이해가 된다. 올해는 24 절기 마다 일상의 이벤트를 하고, 그 때를 즐기며 기쁘게 살려고 한다. 2025년 '봄의 기지개'라 할 수 있는 경칩에는 설유화를  연구실에 모셨다.

2. 
어제 말했던 것처럼, 알맞은 시절을 산다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촘촘히 느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지금 챙겨야 할 기쁨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 보는 일이다. 비 오는 날과 눈 내리는 날 어디에 있고 싶은 지 생각하며 사는 것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거다. 잭 길버트의 시 <변론 취지서>에는 “우리는 과감히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안 된다/ 이 세상이라는 무자비한 불구덩이에서 고집스럽게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적확한 시인의 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이다. 눈이 녹으면 더러워서, 비가 내리면 단풍이 하수구를 막아서, 봄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이 모든 계절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풍경일까. 한 번뿐인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고집스레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유시화 시인이 번역한 <변론답변서> 전문을 공유한다.


변론답변서/잭 길버트(류시화 옮김)

어디에나 슬픔
어디에나 살인...
어디선가 아이들이 굶어 죽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굶어 죽는다
콧구멍에 파리가 드나드는 채로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을 향유한다
그것이 신이 원하는 것이기에
그렇지 않으면 여름 새벽 동트기 전을
그토록 아름답게 만들었을 리 없다
벵갈 호랑이의 무늬를 그토록 멋있게 빚었을 리 없다

우물가의 가난한 여인들은 
마을의 누군가가 몹시 아픈데도 웃고 미소 짓는다
그들이 겪은 고통과 미래에 겪을 두려움 사이에서 
함께 웃는다
콜카타의 비참한 거리에도 날마다 웃음이 있고 
뭄바이의 판자촌에서도 여인들은 웃는다
만약 우리가 행복을 거부하고 만족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박탈당한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우리는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즐거움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세상의 무자비한 용광로 속에서 
기쁨을 받아들이려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
부당함을 우리 관심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악마를 찬양하는 것이다
만약 신의 기관차가 우리를 들이받으면
그 장엄한 마지막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3. 
우리들의 감정 중에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 '기쁨'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차이가 있는가? 사전을 찾아 본다.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즐거운 마음이나 느낌'이라면, 즐거움은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쁜 느낌이나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비슷한 것 같은데, 즐거움은 '어떤 상태'라면, 기쁨은 '어떤 행위의 결과'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없다가 얻게 되었을 때 오는 것은 기쁨이고, 늘 있는 것은 즐거움인 것 같다. 그러니까 기쁨이 즐거움보다 더 강한 감정인 것 같다. 늘 있는 사람은, 없다가 그것을 얻게 되었 때 느끼는 감정을 모를 것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희'는 기쁨이고, '락'은 즐거움이다. 둘 다 '쾌(快)'의 감정이지만, '락(樂)'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동물도 느낀다. '희'는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그러니까 기쁨의 '희'에서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을 위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발적 불쾌'라 한다. 이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쾌'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이다.

4. 
봄이 시작되는 이 때에 다음 문장을 다시 소환한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라야 흡족해 하는 것이 만족이라면, 자족은 어떠한 형편이든지 긍정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러니까 기쁨의 비결은 자족(自足)이다. 요즈음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으로 무엇이나 남처럼 가지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흔히 말하듯 '필요'보다 '욕심'에서 생기는 가난이다. 이럴 때 분수를 알고 자족할 줄 알면 빈곤감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처럼 느끼며 살 수 있다. 

언젠가 류시화 시인의 글에서 읽은 이야기이다. "어느 영화관에서의 일이다.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국제 영화상을 수상한 단편영화를 보여 준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관객이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는 가운데 단편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스크린에 평범한 흰색 화면만 보일 뿐이었다. 1분이 지나도 흰 화면이고, 2분이 지나도 흰 화면이었다. 3분이 지나고 4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흰색 화면만 보였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것이 상을 받은 영화라고? 스크린 전체에 단지 흰색 뿐인데? 영화가 시작되기나 한 거야?’ 그렇게 8분이 지났다. 모든 관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이 영화에 상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멍청하군.' 그리고 9분 만에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이동했다. 카메라는 그때까지 천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병원이었다. 그리고 병상에는 스무 살 청년이 누워 있었다. 그는 전신이 마비된 상태였다. 손, 다리, 얼굴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유일하게 기능하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그리고 10분 후에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이 청년은 흰색 천장을 평생 바라봐야 합니다. 당신은 단지 8분 동안 보고 지쳤습니다.’" 그리고 류 시인은 다음 말을 덧붙였다. "날개 달린 기쁨이여, 어디에 내려앉을까? 나무 위에서 두리번거리는 기쁨이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감각, 모든 동작에서 기쁨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내 모든 감각, 내 모든 동작에서 다시 기쁨을 찾아야 한다. 

5. 
어제는 '재의 수요일'이기도 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약 40일간 몸과 마음을 정결하고 경건하게 하며 지내는 시기이다.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한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기> 3장 19절)라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준다. 인간의 유한함을 기억하고 회개와 성찰의 시간을 시작하는 날이다. 

우리는 흙에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에 왔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떠나야 한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미국 시카고 미술관에 걸려 있는 고갱의 그림 제목이지만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하다. 흙에 불안을 더하면 인생이고, 인생에서 불안을 빼면 흙이다. 불안은 떨쳐버릴 수 없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숙명을 안고 살면서 지향을 잃지 않을 때 삶은 의젓해 진다. 지향이 중요하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는 재의 예식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한다. "저희가 모르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며 살고자 하오니, 갑자기 죽음 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6. 
지난 2월 26일에 다 공유하지 못한 <천화 동인> 괘의 효사들을 공유한다. 내일부터 <<주역>> 함께 읽기를 다시 시작한다.


'초구'의 효사는 "初九(초구)는 同人于門(동인우문)이니 无咎(무구)리라" 이다. 번역하면, '초구는 사람과 같이 함을 문에서 하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이다. '문에서 동인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초구'는 제자리를 얻어 아무 스스럼없이 사람을 만난다. 문(門)에서 한다는 것은 집 밖을 나서서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사심(私心)이 없는 일반 백성의 만남은 아무 허물이 없다. '초구'가 변하면 내괘가 <간 ☶, 산> 이 되는데 <간 ☶>은 문(門)의 형상이다.
 
"동인우문"을 '밖으로 나가 교류를 시작하라'로 읽기도 한다. 이 괘에서 '초구'는 "동인우문", '육이'는 "동인우종(同人于宗)", '상구'는 "동인우교(同人于郊)"이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동인'을 장소와 연결하여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에서 동인하는 것을 <소상전>에서 공자는 문을 나가서 동인하는 것으로 풀이를 알기 쉽게 해주었다. 외톨이처럼 집안에 혼자 있지 않고 밖에 나가 사람들과 교류하는 첫발을 떼는 셈이다. 살다 보면,  자발적 고독, 은둔을 통해 자중하며 실력을 길러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점을 쳐서 <천화 동인> 괘의 '초구'를 얻으면 이제 세상에 나갈 때가 온 것이다. 고임에서 벗어나 외부의 군자들을 만나야 한다.

'초구'가 동하면 내괘는 <산간> 괘가 된다. <<설괘전>> 제11장에 "간위문(艮爲門), 간괘는 문이 된다"이 된다고 했다. '초구'의 효사에 "문(門)"이 나오는 까닭이다. 공자가 "출문(出門)"이라고 말한 근거이다. 그리고 '초구'가 동하면, 지괘는 제33괘인 <천산 둔(天山 遯)> 괘가 된다. 은둔과 진퇴에 대해 이야기하는 괘이다. 괘사가 "遯(둔)은 亨(형)하니 小利貞(소이정)하니라" 이다. '둔(遯)은 형통하니 소인은 바르게 하면 조금 이롭다'란 뜻이다.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군자를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가 군자라고 할지라도 처음부터 알아채기는 힘들다. 혼자 조용한 곳에 물러나 앉아 지식과 지혜를 쌓을 때의 유유자적함에 비하면 새로운 사귐은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십상이다. 명망 있는 사람이어서 만나 어울렸더니 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돌아가 홀로 지내는 것이 뱃속 편하겠다고 생각도리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은 문밖에서 도인할 때이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바르게 천천히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라는 것이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出門同人(출문동인)을 又誰咎也(우수구야)리오"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문에 나가서 사람과 같이하는 것을 또 누가 허물이라 하겠는가?' 이다. TMI: 出:날 출, 又:또 우, 誰:누구 수, 咎:허물 구.  문을 나가 동인하는데 누가 허물이라 할 것인가?
  
7. 
'육이'의 효사는 "六二(육이)는 同人于宗(동인우종)이니 吝(인)이로다" 이다. 번역하면, '육이는 사람과 같이 함을 종친에서 하니 인색 하도다'가 된다. TMI: 宗:겨레 종·마루 종·종묘(가묘) 종. 사당에서 동인하면 인색해질 것이다. 혈연, 지연, 학연을 끊어 내라는 거다.
 
'육이'는 <천화 동인> 괘에서 유일한 음(陰)으로 내괘에서 중정한 자리이다. 또한 외괘의 중정한 '구오'와 잘 응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공명정대하게 들에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천화 동인> 괘에서 중정한 '육이'는 중정한 '구오'와 응한다는 것이 오히려 인색한 '도'가 된다. 유일한 음으로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다른 다섯 양을 두루 만나야 하는데, '육이'가 '구오'와의 만남에만 치중하게 되니 사람과 같이 하는 것을 마치 종당(宗黨)에서 특정인만을 만나는 격이 되어 인색하다고 한 것이다.

내괘 <리괘>와 내호괘 <손괘>에서 "종(宗)"의 상이 나온다. "종(宗)은 '갓머리(宀, 집 변)'와 '보일 시(示)'의 합작이다. '시(시)' 자는 재물이나 향을 올리던 제단을 형상화 한 것으로, 신에게 제를 지내면 길흉이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보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사당은 성과 본이 같은 종친(宗親)들이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으로 제사를 올리기 위해 한때 모이는 장소이다. 따라서 "동인우종"은 요즘으로 보면 혈련, 학연, 지연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인연들은 강한 내부 결속력을 지니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외부에 배타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공명정대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주역>>은 이런 만남과 모임을 '인색하다'고 말했고, 공자는 <소상전>에서 "인도(吝道)"라고 하여 도리를 인색하게 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여기서 '도''란 하늘의 이치와 땅의 섭리를 본받아 행해야 마땅한 사람의 도리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주역>> "계사전" 제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러러서는 천문을 보고(仰以觀於天文, 앙이관어천문), 구부려서는 지리를 살핀다(俯以察於地理, 부이찰어지리)"는 거다. 여기서 "관어천문, 찰어지리(觀於天文, 察於地理)"가 나온 것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인 천문은 관(觀)하고, 땅의 이치인 지리(地理)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국면인 하늘의 이치는 관(觀)하고, 구체적인 땅의 이치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관'과 ''찰"이 겸해질 때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게 되는 셈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 지 막막할 때는 이 8자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말을 줄이면 '관찰(觀察)'이다. 이 말은 '천문을 보고, 지리를 살핀다'는 말이다.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일차적으로 관찰을 통해서 습득한다. 안다는 것은 이 관찰에 의해서 형성된 그 무엇이다. 관찰은 인간이 세상과 교류하는 통로이며, 세상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초석이다.

한문으로 관찰의 낱말 풀이를 해 본다. 관(觀)은 황새(雚)가 큰 눈을 뜨고 본다(見)이다. 또는 황새가 하늘에 날아 올라 세상을 크게 본다는 뜻으로 객관적인 세상을 크게 조망해 본다는 의미가 있다. 찰(察)은 집(宗)에서 제사(祭)를 올리며 신의 뜻을 알아낸다는 뜻으로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사물과 상황의 진의를 파악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관'은 하늘을 보며 세상을 크게 조망하는 것이고, '찰'은 땅을 굽어 보며 세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관찰은 큰 흐름의 줄기를 보고, 세부적인 일의 정황을 파악한다는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다. 큰 흐름만 보고 세부적인 정황에 대한 살핌이 없으면 두루뭉술한 이야기가 될 것이고, 세부적인 정황만 살피고 큰 흐름을 보지 못하면 그 정황의 정확한 주소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관찰이라는 것은 단지 객관적인 세상을 보는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던져 놓고, 던져진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것도 관찰이다. 모든 현상과 존재를 관찰하는 데, 우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그 다음 큰 흐름을 보고, 세부적인 정황을 살펴 본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한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그 무엇을 또한 관찰한다.

다시 <천화동인> 괘의 '육이'로 돌아온다. 중정한 '육이'는 본대 외괘에 있는 중정한 '구오'와 사귀어야 한다. 정응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밖에 나가는 대신 안에 있는 '초구', '구삼'과 어울리는 것에서 "동인우종"의 상이 나오게 된다. '육이'가 동하면 지괘는 제1괘인 <중천 건> 괘가 된다. 혈연, 지역, 학연의 작은 인연에 얽매이지 말고 '원형이정'의 이치에 순응해야 한다. <중천 건> 괘 '구이'의 효사가 "九二(구이)는 見龍在田(현룡재전)이니 利見大人(이견대인)이니라" 이다. '구이는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이롭다'는 거다. 좁은 사당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큰 사람을 만나야 일이 잘 풀릴 것임을 알 수 있다. "인(吝)"은 '아낀다'는 뜻으로 자기 반성에 인색하고 변화를 주저하는 태도라 했다. "인"하지 않도록 뉘우쳐(회), 사람을 거짓으로 규정하는 껍데기 관계에서 벗어나 오록이 인간 그 자체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同人于宗(동인우종)이 吝道也(인도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사람과 같이 함을 종친에서 함이 인색한 도이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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