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311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24일)
1.
어제 주일 미사의 복음이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구절이다. <루가복음> 6장 27-38절이다. 실천하기 쉽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원수와 사랑'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미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못박혀 처형되실 때에 조롱하고 욕하고 침 뱉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뺨을 맞으시고, 겉옷을 빼앗기셨으며,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셨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이 분이 원수를 사랑하신 분이다. 그가 보여주신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는 좋은 감정이 아니라 대상과 관계없이 나의 의지로 하는 결단의 모습이다.
2.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악을 악으로 맞서지 않고, 선으로 대하는 법이다. 여기서 원수 사랑은 악의 용인이나 묵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제거를 지향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람함-보복하지 않고 참아 줌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면 매우 보람 있고 기쁜 일이 된다. 그리고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라 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얻게 될 기쁨은 하느님이 주시는 상은 원수가 회개하는 것을 보는 기쁨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악인의 집에도 해를 비추시고 죄인의 들에도 비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하느님 닮아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바로 원수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3.
노자 <<도덕경>>에 "전치불인(天地不仁)"과 "성인불인(成人不仁)"이라는 말이 있다. "천지불인"을 말 그대로 읽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천지는 인하지 않다." 이보다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고 하면, 좀 알듯 모를 듯하다. 나는 "하늘과 땅은 무심하다"는 해석이 제일 마음에 든다. "천지불인"과 "성인불인"은 노자의 사유체계를 대변하는 문장으로 자주 인용된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 갈 뿐이라는 것이다. "천지불인"은 천지의 운행이나 활동,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감이나 바램과 무관하게 그 나름대로의 생성법칙과 조화에 따라 이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좀 야속하고 때로는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는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천지(天地)는 항상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자신을 맡긴다. 천지는 억지로 함이 없고 조작함이 없다. 그래서 천지가 생하는 만물도 스스로 서로의 관계 속에서 질서를 형성해 나간다 그러므로 불인(不仁)하다고 말한 것이다. 인(仁)하다고 한다면, 반드시 조작적으로 세우는 것이 있고, 베풀어 변화를 주게 된다. 그리고 은혜가 있고 만들어 줌이 있게 된다. 조작적으로 세우고 베풀어 변화를 주게 되면 사물은 진정한 본래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은혜가 있고 만들어 줌이 있으면 사물은 자력에 의하여 온전하게 존속되지 못한다. 자력에 의하여 온전하게 존속되지 못하면 천지는 구비된 조화를 이룰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천지는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아니한다는 거다. 천지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는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를 향해 나를 더 사랑해 달라고 조르거나 간구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니 도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이기적 요구 사항에 좌우되지 않으므로 오직 한결같은 '도' 근분 원리에 우리 자신을 탁 맡기고 쓸데없이 안달하지 않는 태도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인(仁)'을 '사랑'이란 말로 바꾸면, 그 '사랑'이 힘든 거다.
4.
우리 본당 신부님은 강론 시간에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인 "아제레 콘트라(agere contra)"를 말씀하셨다. 이 말은 '거슬러 행하라'는 뜻이다. 거꾸로, 하기 싫은 것을 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김임숙이라는 분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너무 좋아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그녀가 주장하는 '거꾸로 사랑'하는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 주체의 변화: 낮아져서 사랑하라.
사랑의 주체인 나 자신의 인식을 달리 할 때, ‘거꾸로 하는 사랑’은 시작된다. 우리 대부분은 사랑 받은 경험이 있다. 그 때 우리는 마치 왕자와 공주가 된 것처럼 행복함을 느낀다. 이는 상대가 나를 위해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교만하고 잘난 척 하기 바쁜 사람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자기가 낮아지는 순간이 자존심 상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다 내려놓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갑자기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상대가 너무 귀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너와 나는 평등해, 다를 바가 없어' 라는 말은 '너와 나는 별 관계가 없어' 라는 말과 마찬가지다. 무엇이라도 변화시키는 사랑은, 자신이 낮아질 때 일어난다.
- 대상의 변화: 사랑할 수 없을수록 사랑하라.
사랑하는 대상을 ‘거꾸로’ 인식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칭송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하고 물질을 투자한다. 하지만 추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위해서 진정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랑의 대상만이 아니라 그 양상도 맥락이 같다. 우리는 진정 아끼는 것을 씻길 때는 더러운 곳일수록 더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냄새 나고 불결한 곳은 피하고 싶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사랑받기 부족함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리고 그의 사랑스러운 모습만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 한다. 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에게 상처 준 사람,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을, 더구나 그런 사람의 추하고 부족한 모습까지도 받아들일 때 그 사랑은 의미를 가진다. '거꾸로 사랑하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사랑의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사랑의 의욕이 불타오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 방법의 변화: 역설적으로 사랑하라.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모든 사람과 동일한 수준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 않는다. 어쩌면 깊고 중요한 사이일수록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에게 특별한 사람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행동들로 감동을 준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순간의 기억으로부터 진정한 위로와 행복을 얻는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와 방법대로 관계를 맺으면 어떠한 특별한 관계도 형성될 수 없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면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 불가능한 사랑을 할 때, 나는 상대에게 특별한 존재로 남는다. 기존의 상식은 뒤집어져야 되고 거꾸로 되어야 한다. 회사의 회장이 청소 아주머니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정치인이 여느 국민 한 사람 앞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어날 거라고 믿지 않는 사랑이 늘비할 때 세상은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사랑은 이렇듯 늘 예상을 벗어난다. 문자 그대로 역설적이다. 하지만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도 위대한 힘을 가진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거꾸로 하는 사랑'이 이냐시오 성인이 하신 말씀일 것이다. 이제 나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남들보다 낮아져야 한다. 그리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방법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렇게 사랑의 힘을 믿고 실천할 때, 세상에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제 '거꾸로 하는 사랑"에 더 많이 투자할 것이다.
5.
이어지는 이야기, 특히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 "아제레 콘트라(거슬러 행하라)"와 노자의 "반자도지동(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도의 운동 방식)"을 연결하여 내일 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최근에 날게 된 거다. 오늘 주제와 통한다. 사는 일이 손해 보는 장사 같을 때, 왠지 모를 열패감이 들 때 이 시를 기억하자. 지는 사람은 곧 주는 사람이다. 받기만 하는 사람은 끝내 모를 주는 자의 기쁨이여! 인생에서 손익만을 따지다 추한 모습으로 늙고 싶진 않다. 오늘 사진은 동네의 한 카페에서 봄을 기다리는 꽃이다.
주는 입장/이동욱
가진 게 없어도 나는 주는 입장
입장 바꿔 생각해봐도
나는 늘 주는 입장
힘든 건 마찬가지라고 사장이 말했을 때
그도 사람인데 어련할까
매년 연봉 협상에 실패했다
밤새 일해도 남는 게 없다는 택시 기사의 하소연에
왜 길을 돌아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자네가 이번 시험에 떨어진 건 애석한 일이네
출제 교수를 찾아간 건 실수였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널 키웠다
당신이 최선을 다한 건 내가 아니지만
부모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단순 변심은 환불이 불가합니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당신은 어떻게 알았을까
사랑한 게 죄가 아니라면
이제 너를 뭐라고 부르지?
이 코트엔 주머니가 많지만
가진 게 없어도
가엽다는 생각마저 나는 늘 주는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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