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는 자신의 중심을 강철처럼 벼리고, 현명한 마음을 기르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2. 21. 16:36

311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21일)

1. 
어제 말했던, 아담 1과 아담 2는 서로 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다. 
- 창조하고, 건설하고, 발견하려는 아담 1은 간단명료한 실용주의 논리를 따른다. 경제학의 논리이다. 들어가는 게 있으면 나오는 게 있다. 실제 세상을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다. 노력을 하면 보상이 따르고, 연습을 하면 완벽해 진다고 믿는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효용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세상을 놀라게 하라고 독려한다. 
- 아담 2의 논리는 다르다. 경제학적 논리가 아니라 도덕적 논리이다. 받으려면 줘야 한다는 거다. 자기 밖의 무언가에 스스로를 내맡겨야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부터 정복해야 한다. 성공은 가장 큰 실패, 즉 자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패는 가장 큰 성공, 즉 겸손과 배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잊어야 한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 자신을 잃어야 한다. 

2. 
우리가 아담 1로만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영악한 동물이 될 것이다.게임을 하는 데 능숙하고 모든 것을 게임으로 치환하는 자기 보전적이고 교활한 생명체 말이다. 만일 그게 우리의 전부라면 다음과 같은 일들로 삶을 소진하게 된다.
▪ 많은 시간을 전문적인 기술을 연마하는 데 바치면서도, 삶의 의미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기술을 어디에 쏟아부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진로를 선택해야 최선의 길이 될지 모르게 된다. 
▪ 세월이 흘러도, 내면 깊은 곳을 탐색해 보지도 체계화하지도 못한다. 
▪ 늘 바쁘지만 삶에서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이뤄 내지 못했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 진정으로 사랑해 보지도,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도덕적 목표에 진정으로 천착해 보지도 못한 채 무의식적 권태를 안고 살아간다.
▪ 흔들리지 않고 헌신하기 위한 내적 기준도 부족하다. 내적 기준이 있어야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거나 심각한 타격을 입어도 견뎌 낼 수 있는 내적 일관성과 진실함도 성장시키지 못했다.
▪ 자신에 맞든 안 맞든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는 일만 하면 사는 것이다.
▪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그의 가치보다는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 인격을 형성할 전략이 없다. 그런 전략이 없으면 내적인 삶 뿐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도 종국에 가서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3.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중심을 강철처럼 벼리고, 현명한 마음을 기르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우리는 우리 본성이 가지고 있는 아담 2에 엄격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 한 자기 만족적이고 그저 그런 도덕적 기준에 안주해 버리기 쉽다. 다시 말하면, 아담 1(외적 모습 Big Me)의 목소리는 크지만, 아담 2(내적 모습, Little Me)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담 1의 계획은 선명하지만, 아담 2의 인생 계획은 흐릿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돈과 성공만 외치는 'Big Me’의 시대에서 ‘Little Me’의 가치를 추구하는 시대로 건너가야 할 때이다. 지금 우리는 가치관이 없고, 가치관이 매우 흔들리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 건너가기는 쉽지 않다. '리틀 미'를 유지하려면, 자존감을 잃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기 과잉의 시대에 약간은 고전적인 자기절제와 겸손의 미덕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시시할지라도 '힘'을 빼고, 내 방식대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다시 말하면,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실천을 일상에서 하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능력을 최우선시 하는 시대이다. 이른바 능력주의 시스템에서는 자신을 부풀리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치라고 말한다. 나아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자신을 광고하라고 권한다. 우리에게 점점 더 좁은 곳에 집중하라고 부추기며, 더욱 약삭빠른 동물이 되라고 독려하는 이 문화는 자기 중심주의를 극대화한다. 성취를 중시하는 이 문화에서는 타인의 인정을 받는 데만 몰두하고, 외적인 찬사를 삶의 척도로 삼게 만든다. 끊임없는 긍정적 강화 없이는 버티지 못하는 나약한 영혼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데 필요한 도덕적 능력은 위축시켜 버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빅미(Big Me)', 자기 과잉 시대를 겪고 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이 "능력주의가 만들어 낸 이기적 인간상'이다.

4. 
이게 '공정'이라는 탈을 쓰고 우리들의 가치관을 뒤 흔들고 있다. 공정(公正)은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다시 말하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중심을 올 곧게 잡아 가는 일이다. 비슷한 말로 공명정대(公明正大)가 있다. 이 말은 '하는 일이 사사로움이나 그릇됨이 없이 아주 정당하고 떳떳함'이란 뜻이다.

내가 바라는 공정한 사회는,
▪ 과정이 공정하게 물같이 흐르는 사회
▪ 기회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부여되는 사회
▪ 결과가 정의롭게 나타나는 사회이다.

공정과 공평 그리고 평등은 좀 다르다. 잘 구별해야 한다. 사람들은 잘 혼동한다.
▪ 공평은 기회의 평등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평등은 결과의 평등까지 의미한다.
▪ 공정이 과정이나 절차상의 평등이라고 한다면, 공정이 쉽지 않다. 그러나 과정이 투명하고 절차가 모두에게 평등하다면 공정한 것이다.
▪ 공평은 좀 더 어렵다. 기회의 평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특정한 기준을 통해 누굴 뽑을지 선택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경쟁할 기회를 준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은 아니다. 공정하긴 하겠지만, 그 이유는 사람마다 가진 자원과 능력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 공평은 가능성의 %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배분하는 것이고,
▪ 공정은 능력 있는 사람이 이기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고,
▪ 평등은 모두에게 결과를 동일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 사람마다 능력이 다른데 공정은 그 다른 능력의 차이를 반영해서 능력에 따라 뽑는 거고,
▪ 공평은 능력 차이를 배제하고 뽑힐 가능성을 모두에게 동일하게 배분하는 거다.
▪ 평등은 능력 차이를 배제하고 결과를 모두에게 똑같이 배분하는 거다.

우리는 지금 공정과 공평을 혼동하고 있다. 사람마다 가진 자원과 능력이 다 다른데, 그 능력의 차이를 반영하지 않고, 공정과 공평을 혼동하고, 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 이기는 시스템에 살고 있다. 그것도 '삼세판'이 없고, 한판 승부에다가, 승자가 독식하는 무한 경쟁에 많은 이들이 좌절하고 있다.

5. 
국어사전은 삼세판을 ‘더도 덜도 말고 꼭 세 판’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지만 삼세판의 심리를 오롯이 드러내지는 못한다. 우연이 작동할 가능성이 많은 단판 승부는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승자는 안도하지만 패자는 쉽게 승복하기 어렵다. 경쟁이 치열하고, 사회적 긴장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배제의 논리가 기승을 부린다. 우리 사회에 삼세판의 여백은 사라지고 사회적 낙인 찍기가 만연하고 있다. 낙인 찍기는 어떤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의 존재에 대한 단정적 평가이기에 가혹하다. 낙인 찍힌 사람들은 모든 삶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 같은 암담함을 느낀다. 그 폐쇄된 어둠은 일쑤 자기 비하 혹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배우 김새론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혹하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적 사건이다.

그 해결책은 삼세판의 여백을 회복하는 거다. '3'이 답이다. '3'자를 보면, 노자의 <<도덕경>> 제 42장이 떠오른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껴안는다. 만물은 음양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 기운을 조화롭게 여긴다.  (…) 그러므로 잃음이 얻음이 되기도 하고, 얻음이 잃음이 되기도 하므로 조화를 취한다. 사람들은 강하게 되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약하게 되라고 가르친다. 강하기만 한 사람은 옳게 죽지 못한다. 나는 조화를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다." 천천히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글이다. 요약하면, "道가 하나를 낳고"했을 때, 그 '하나'는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太極)'이고, '둘'은 음(陰)과 양(陽)이고 '셋'은 천(天)·지(地)·인(人)이다. 조화로운 삼이 낳은 만물 속에서, 잃음이 얻음이 되고, 얻음이 잃음이 된다. 그리고 강자는 자신의 명대로 옳게 죽지 못한다.

'3'이라는 숫자는 일상에서 많이 쓰이기도 하고 그 나름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삼각함수', '삼위일체', '삼권분립' 등 숫자 3이 포함된 상용어는 매우 많다. 모두 중요한 개념이고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3'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세 번은 겪어야 확신이 생기고, 공정성을 기하려면 세 번 정도의 절차'는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무한 경쟁 속에서 사람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세상에 지친 이들일수록, 사람들은 연결 혹은 소속의 열망이 강하다. 바로 그런 열망이 야말로 근본주의적 신앙과 정치적 과격주의의 온상이 된다. 그게 지금 '세이브 코리아'나 전광훈 파의 극우 세력들이다. 그들은 강렬한 소속감을 부여해주는 집단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인다. 신앙적 확신의 언어로 무장하고 있지만 사용하는 언어는 천박하고 세계관은 협소하다. 특정한 정보에 갇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 정신은 흐려진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비 진리로 규정하고 적대하는 옹호의 덫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6. 
우리에게는 인간을 '뒤틀린 목재'로 보는 전통이 있었다. 누구나 결합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란 결함 있는 내면의 자아와 끊임 없이 투쟁하여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전통에서는 겸손과 절제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외적 성공이 아니라 내적 성숙에 둔다.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고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위대한 영혼의 탄생을 만나게 된다. 물질주의의 오만이 팽배한 우리 사회도 도덕성의 회복이 중요하다. 인간의 품격을 닦는 것이야 말로 분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자기 과잉의 시대'의 빅미(Big Me)에서 겸손과 절제로 결함을 이겨낸 성숙한 인간, 리틀(Little Me)에 더 큰 가치를 둔 문화로 넘어가야 한다.

7.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는 놀라울 정도의 내적 일관성 혹은 응집력을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내가 지향할 내 삶의 방향이기도 하다.
▪ 파편화된 무작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되는 대로 막 살지 않는다.
▪ 내적으로 통합을 이룬 사람들이다. 자기 주도권이 있다.
▪ 침착하고, 안정감 있고, 뿌리를 깊숙이 내려 부유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 폭풍이 몰아친다 해도 가고자 하는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어떤 역경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 일관된 정신과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 그들의 덕목은 영리한 대학생들에게서 볼 수 있는 활짝 피어난 꽃 같은 덕목이 아니라, 삶을 경험하고 거기서 느끼는 희열과 고통을 모두 맛본 사람들 한테서만 볼 수 있는 숙성한 과일과 같은 덕목이다.
▪ 그들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양의 덕을 갖추고 있다.
▪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지만 세상에 대고 그 어떤 것도 증명해 보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 그들은 겸손, 절제, 과묵, 중용, 존중 그리고 온화한 자기 수양을 미덕으로 삼는다.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이다. 그들은 갈등이 전혀 없는 평온한 삶을 산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숱한 갈등과 분투하면서 성숙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 이들이다. 그들은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어떻게 든 나아간 사람들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는 국가나 계급, 혹은 정치적 당파를 가로질러 나 있지 않다. 바로 우리 각자의 심장을 가로지고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그들은 강인한 내적 인격을 연마하고, 심오한 깊이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남은 삶을 그들처럼 살고 싶다.

8.
살다 보면 독야청청, 변치 않고 자신의 모습을 굳게 지켜 나가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고독’과 ‘고립’을 분별해야 하듯 ‘고독’과 ‘공존’은 조화로울 때 라야 가치를 발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달려갈 때는 독야청청할 수 있어야 하고, 다소 자신의 이익에 반하더라도 공동체에 도움이 될 때는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어제 오후 산책을 하다가 찍은 사진이다. 소나무의 말씀을 들었다.


어느 소나무의 말씀/정호승

밥그릇을 먹지 말고 밥을 먹거라
돈은 평생 낙엽처럼 보거라
늘 들고 다니는
결코 내려놓지 않는
잣대는 내려놓고
가슴속에 한 가지 그리움을 품어라
마음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도 굽어보신다
봄이 오면 눈 녹은 물에 눈을 씻고
쑥과 쑥부쟁이라도 구분하고
가끔 친구들과 막걸리나 마시고
소나무 아래 잠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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