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삶'과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충분한 삶'

311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20일)
오늘은 두 개의 삶의 방식을 소개한다.
1.
가장 먼저, '위대한 삶'과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충분한 삶'이다. 누구나 좋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나날이 충만하고 순간순간 충실한 삶, 하루하루 들어가는 나이가 몰락의 과정이 아니라 완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인 삶이 야말로 우리가 이룩하고 싶은 위대한 성취일 테다. <<모든 삶은 충분해야 한다(안타레스 펴냄)>>에서 아브람 알퍼트(Avram Alpert)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위대한 삶이 아니라 충분한 삶을 추구할 때, 우리 삶은 좋아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위대한 삶'이란 더 많은 부와 명성을 누리려고 남들과 발버둥 치는 삶을 말하고, '충분한 삶'이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면서 적당한 여유와 윤택에 만족하는 삶을 뜻한다. 위대함을 바라고 완벽함을 좇기보다 적절함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비로소 행복에 이른다는 거다.
요즈음 나의 화두가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다. '충분한 삶'이 아닐까? 충분한 삶은 개인의 물질적 안온함이나 정신적 만족에서 그치지 않는다.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가 말하는 소속감, 즉 "지속적이고 긍정적이며 중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보편적 욕구"의 충족도 필요하다. 완벽함을 추구하고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기르기보다 서로 존중하고 상호 의존할 수 있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그들과 넉넉히 시간을 함께 보낼 때 삶은 충분해진다. 나아가 '충분한 삶'은 좋은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불공정과 부정의로 뒤틀린 사회, 불평등을 양산하는 승자 독식 경제, 환경 파괴로 팬데믹과 기후 재앙이 수시로 일어나는 세상에선 누구도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한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생태적인 사회를 이룰 때 삶은 충분할 수 있다. 무한 풍요가 아니라 적절함 속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아닐까?
2.
충분한 삶에 대한 나의 원칙은 '얻고자 한다면 먼저 버려라'이다. 수많은 결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철수하는 결단이다. 버리면 정말로 필요한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노'라고 말하려면, 자신감과 비전 그리고 집념이 필요하다. 내가 늘 지침으로 가지고 있는 문장이다. "빈방에 빛이 들면(虛室生白, 허실생백), 좋은 징조가 깃든다(吉祥止止, 길상지지), 마음이 그칠 곳에 그치지 못하면(不止, 부지) '앉아서 달리는(坐馳, 좌치)' 꼴이 된다."(<<장자>>, <인간세>) 빈방에 빛이 드는 것처럼, 마음을 비웠을 때 새롭게 채울 여지가 생긴다. 중요한 건 멈춤이다. 물리적인 멈춤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멈춤도 필요하다. 멈추지 않고 달리면, 앉아서 달리는 꼴이 된다. 앉아서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그냥 마음만 바쁘지 백날 가도 제자리이다.
3.
다음은 멈춤이 필요할 때 꺼내 읽는 글이다. 소설가 백영옥의 글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다. "“조금만 덜 먹을 걸”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 폭식 끝에 남는 건 소화제인 데도 멈추지 못한다. 배가 부르다는 느낌은 후행적이다. 충분하다는 느낌을 넘어 만족하는 순간 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찬다. 폭식, 폭음, 과로 역시 충분함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발생한다. 생존과 적응을 위해 ‘불안’을 느끼는 능력이 진화된 것에 비해, 만족감은 ‘안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애써 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충분함에 대한 감각을 깨우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여전히 사랑니처럼 불필요한 기관을 달고 사는 건 진화의 느린 속도 때문이다. 먹을 수 있을 때 양껏 먹어야 굶어 죽지 않는다는 원시인의 뇌가 아직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다가 맹수에게 물어 뜯길까 봐 경계하는 건 원시 시대에 어울린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안을 벗어나, 반대편에 있는 충분함을 알아차리는 기술이다."
4.
"충분함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선 나를 타인과의 비교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알아야 할 건 비교의 특징이다. 우리는 주로 직업이나 나이, 삶의 방식이 비슷한 사람을 시기한다. 작가는 작가를, 정치인은 정치인을 시기한다. 걸인 또한 부자보다는 자신보다 형편이 조금 나은 걸인을 시기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기적으로 비교 지옥의 대명사인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 불만족을 유발하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책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독서가 끝나면 우리는 책을 덮는다. 완벽히 문이 닫힌 것이다. 여러 개의 창을 열어둔 채 끊임없이 새 창을 여는 인터넷과 책의 물성은 다르다. 종일 검색해도 새로운 최저가, 초특가 티켓이 나오는 ‘검색’과 달리,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밀려오는 만족감은 닫힌 세계가 약속하는 ‘사색’의 만족감이다. 여러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큰 충분함은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다. 무엇이든 쏟아지는 시대의 처방은 닫는 것이며, 그 답은 넓이가 아닌 깊이에 있다."
5.
"삶이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이다." 데이비드 부룩스의 <<인격의 품격>> 서문의 제목이다. 그러면 오늘 아침 화두인 두개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 "이력서 덕목(resume virtues)"과 "조문 덕목(eulogy virtue)"에 들어 갈 차이를 말한다. 이력서는 일자리를 구하고,, 외적인 성공을 이루는 데 필요한 기술을 말한다. 조문 덕목은 장례식장에 찾아온 조문객들이 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오는 덕목으로, 한 존재의 가장 중심을 이루는 성격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문 덕목이 이력서 덕목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자(조문 덕목)보다 후자(이력서)에 더 치중한다. 우리들의 교육 문법도 그렇다. 조문 덕목보다 이력서 덕목 위주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 대부분은 깊이 있는 인격을 기르는 방법보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성취하는 방법에 대해 더 신경 쓴다.
6.
데이비드 부룩스는 랍비 조셉 솔로베이치크가 쓴 <<고독한 신앙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우리 본성의 두 가지 상반된 면을 소개하고 있다. 아담 1과 아담 2로 나누어 말한다. 아담 1은 커리어를 추구하고, 야망에 충실한 우리의 본성이다. 이력서에 담길 덕목을 중시하는 외적인 아담이다. 아담 1은 무언가를 건설하고 창조하고 생산하고 발견하길 원한다. 그는 드높은 위상과 승리를 원한다. 반면 아담 2는 내적인 아담이다. 아담 2는 도덕적 자질을 구현하고 싶어 한다. 그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내적 인격을 갖추길 원하며, 옳고 그름에 대한 차분하지만 굳건한 분별력을 갖고 싶어 한다. 그는 선한 행동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아담 2는 친밀한 사랑을 원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길 원하고, 초월적 진리에 순응하며 살길 원하고, 창조와 자신의 가능성을 귀하게 여기는, 내적으로 단단하게 결합된 영혼을 갖기를 열망한다.
7.
아담 1과 아담 2의 차이를 표를 그려 구별해 본다. 우리는 아래의 두 아담의 갈등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두 페르소나를 모두 충족시켜야만 하고, 따라서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성 사이에 생기는 갈등 속에서 사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아담 1: 위풍 당당한 외적 아담
아담 2: 겸손한 내적 아담
세상을 정복하고 싶어 한다.
세상을 섬기라는 소명에 순응하고 싶어 한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며 자신의 성취를 만끽한다.
거룩한 목적을 위해 세속적인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기도 한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의문을 가진다.
그것이 왜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 지를 궁금해 한다.
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가족과의 따뜻한 한 끼 식사를 감사해 한다.
좌우명이 '성공'이다.
삶을 하나의 도덕적 드라마로 경험하며, 좌우명은 '박애, 사랑, 구원'이다.
8.
아담 1과 아담 2는 서로 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다.
- 창조하고, 건설하고, 발견하려는 아담 1은 간단명료한 실용주의 논리를 따른다. 경제학의 논리이다. 들어가는 게 있으면 나오는 게 있다. 실제 세상을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다. 노력을 하면 보상이 따르고, 연습을 하면 완벽해 진다고 믿는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효용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세상을 놀라게 하라고 독려한다.
- 아담 2의 논리는 다르다. 경제학적 논리가 아니라 도덕적 논리이다. 받으려면 줘야 한다는 거다. 자기 밖의 무언 가에 스스로를 내맡겨야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부터 정복해야 한다. 성공은 가장 큰 실패, 즉 자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패는 가장 큰 성공, 즉 겸손과 배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잊어야 한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 자신을 잃어야 한다.
아담 1의 커리어를 키우고 싶다면 힘을 길러야 하고, 아담 2의 도덕적 내면을 성장시키고 싶다면 자신과 대면하여야 한다. 특히 자신의 결함과 직면해야 한다.
9.
우리는 외적인 아담 1을 크게 키우면서 내적인 아담 2에는 관심을 쏟지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래 지금 우리 사회가 크게 흔들리는 것이다. 특히 소위 '엘리트'들이 문제이다. 1990년대에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당신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가 당신을 말하는' 시대이다. 우리나라 소위 '엘리트'들은1987년 체제를 쟁취한 후, '민주화 이후의 민주 주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기에 민주화 운동으로 얻은 상징 자본을 밑천으로 곧장 '엘리트 코스'로 진입했다. 그리고 각자 조직 내 경쟁에서 이기고 대한민국 1%가 된 '엘리트'들은 이때부터 조직 밖으로 눈을 돌리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동맹을 강화한다. 사회 각 분야의 '엘리트'가 촘촘하게 끈끈하게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이익 동맹'을 구축한다. 그후 10년이 다시 흘러 50대 중후반이 되자 마침내 대한민국 0,1%의 최후 승자가 되었다. 실망스럽게도 그들은 20년 동안 지적으로는 게을러졌고 도덕적으로는 해이해졌다. 기득권 '꼰대'가 되었다. 세상의 변화를 읽는 통찰이 20년 전보다 못하다. 공적 마인드는 약해지고 사적 욕망은 커졌다. 사적 네트워크로 얽히고설키다 보니 '아는 사람'의 부패와 비리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인데 부끄러움도 없다. 이미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는데도 개혁의 주체인 양 착각하고 있다. 자신을 향한 성찰도 20년 전보다 못하다. 통찰은 부족하고 성찰도 없으니 현찰만 좇는 게 '엘리트'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 한다. 지금 이념이 아니라 대한민국 0,1%의 엘리트가 사는 방식이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 사회는 잘나가는 커리어를 쌓는 방법에 골몰하도록 장려하는 반면, 내적인 삶을 일구는 방법에 대해서는 변변한 말 한마디 할 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다. 성공을 거두고 세상의 감탄을 함 몸에 받으려는 치열한 경쟁만으로도 온 힘을 소진하고 만다. 안타깝다. 소비 시장은 우리를 실용적인 계산에 따라 살고, 욕망을 만족시키고, 날마다 내려야 하는 결정에 배어 있는 도덕적 이해관계를 망각하게끔 부추긴다. 빠르고 얄팍한 의사소통이 만들어 내는 소음은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다 고요한 소리에 귀 기울이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화에서는 자신을 내 세우고, 광고하며, 성공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라고 가르친다. 인격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겸양과 공감 그리고 정직한 자기 직시의가 중요하다는 담론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인문 운동가로서 당분간 내적 삶을 회복하는 길에 대한 성찰을 계속할 생각이다.
10
고대 하와이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집단으로 기억을 정화하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이들이 전통적 문제 해결 과정에서 의지한 것은 말이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고통스러운 생각에 뿌리내린 나쁜 에너지를 솎아내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정화하는 방법으로 화해와 치유를 가져오는 말의 힘에 주목했던 것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하와이 원주민의 오래된 지혜에서 차용한 작품이다. 다툼과 이별이 일상화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환경에선 어느 하나 쉽게 나오기 힘든 표현이다. 그래도 시는 넌지시 충고를 한다. 힘든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내 상처와 상실감만 들여다보지 말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없는지 곰곰이 돌아보라고. 바로 그게 내면의 평화로 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들에게 하와이 식 정화 의식이 필요하다.
고마워, 미안해, 용서해 줘, 사랑해/신현림
다툼과 이별을 슬퍼 말고 자신을 비워 봐요
이메일 주소를 지우면 그 사람 존재가 지워지나요
핸드폰 번호를 지우면 돌풍같이 사라지나요
저마다의 가슴은 스크린 같아서
사람들은 이모티콘처럼 아이콘처럼 살다 가지요
수신거부, 스팸처리 그것도 놓아 버려요
모두 내 탓이라 여기면
빈 마음에 붉고 넉넉한 바람이 붑니다
상처 받지 않으려고 서로 상처를 주고
거친 말이 오가면 그 인연 잠시 끊어 줘야 합니다
사람 사이 푹 빠졌다 시들해지고, 멀어졌다 이어지고
또 다른 스크린으로 오가는 되풀이가 삶이라도
대나무 속같이 자신을 비워 봐요
“고마워, 미안해, 용서해 줘, 사랑해”라고 되뇌어 봐요
신의 숨결이 담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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