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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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16일)
나는 소설가 백영옥의 연재물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 다음 두 개는 좋은 삶의 지혜를 준다. 사진은 모처럼 동네 수통골에 갔다가 찍은 것이다.
1.
성공한 삶은 러닝 머신 위를 달리는 것과 비슷하다. 성취의 속도에 중독되면 삶에 멈춤 버튼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쓰러질 때까지 달린다. 그렇게 자기 착취를 내면 화 하면 자기 파멸은 자동 모드로 진행된다. 속도가 강조되면 풍경을 잃고 밀도는 낮아진다. 마라톤 레이스에서도 완주하는 사람은 자기 속도로 뛰는 사람이다. 삶에도 과속과 감속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열심히' 에 대한 새 기준이 필요하다. 오래 일하는 것과 일 잘하는 것, 일중독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쉬고 자는 것을 낭비가 아닌 돌봄과 회복 관점으로 봐야 한다. 채우는 대신 비우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이때 필요한 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적 노력이 아니라 ‘이래도 괜찮아’라는 자기 수용이다.
2.
좋은 사과는 큰일을 작은 일로 만들지만 나쁜 사과는 작은 일도 크게 만든다. 좋은 사과의 예로 보통 3A를 강조한다. 우선 상대의 감정에 동의(Agree)하고, 진심 어린 사과(Apologize) 후 해결책을 제시하는 행동(Action)을 뜻한다. 심리학자 게리 채프먼은 사과에 대해 “우선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미안하다는 말 뒤에 ‘하지만’ 같은 단어를 절대 붙이지 말라”고 충고한다.
3.
사과 다음에 놓여야 할 말은 용서다. 용서는 진심 어린 사과를 전제하지만, 꼭 사과를 받아야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용서는 상대보다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한 것이다. 설혹 상처가 잊히더라도 흉터는 남기 때문이다. 다음은 용서에 관한 12가지 아포리즘 이다. 언젠가 내 노트에 적어 두었던 것을 공유한다.
▪ 화는 불이다. 화가 나는 것은 불이 나는 것이고, 화를 내는 것은 불을 내는 것이다. 불은 내면 안 된다. 불이 나는 건 끄면 되지만, 불을 낸다는 것은 의지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시제에는 단순 미래와 의지 미래가 있다. 단순 미래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의지 미래는 내가 바꿀 수 있는 미래이다. 나의 의지로 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적어도 화낸 일에서 그렇다. 건강한 분노 처리는 인품을 만드는 과정이다. 아무 데 서나 분노를 표시하는 건 공공장소에서 분뇨를 투척 하는 것과 같다.
▪ 화를 낸다고 화가 풀리지는 않는다. 화를 안 내는 방법은 내가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빙의(憑依)라고 한다.
▪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야단을 칠 필요는 없다. 반성할 것인가? 반발할 것인가? 아니면 분발할 것인가?
▪ 사과한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지만, 사과를 받아주지 않은 그에게는 천국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변명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 열 내지 말고, 빛을 내라. 열은 이내 식지만 빛은 어두움을 가셔 준다.
▪ '시비지심(是非之心)에 시간을 많이 할당하지 말라. 옳고 그른 것은 우리가 쉽게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툼은 시비를 가리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최대화함으로써 평화를 얻는다. 그때 필요한 것이 스티브 잡스가 말한 "think different(다르게 생각하라!)"이다. 사람들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급급한 탓이다.
▪ 영어에서 제일 아름다운 말이 'If I were you(내가 너였다면)' 이다. '내가 너라면' 하고 생각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는다.
▪ -개가 짓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나는 개소리로 흘려버린다. 그런 사람이 질문하면, 제일 좋은 답이 '일리가 있네 요'이다.
▪ 누군가 나를 서운하게 했다면, 그건 내가 뭔가 잘못 뿌렸기 때문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 세상은 불공평해도 세월은 공평하다. 세상이 안 풀리는 게 아니라, 내가 안 푸는 것이다. 못 푸는 게 아니라, 안 푸는 것이다. 풀지도 않으면서 저절로 풀리기를 바란 거다. 인생 수능의 채점자는 세월이다. 세월은 세상보다 힘이 세다. 세상은 나를 차갑게 대해도 세월은 결국 나를 알아 줄 것이다. 세상이 주는 조건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세월이 주는 가능성과 한계는 누구에게나 똑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세월은 세상보다 힘이 세다.
▪ - 세상과 세월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세상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세월이 이긴다. 세상은 나를 차갑게 대해도 세월은 결국 나를 알아준다.
▪ "젊음이 알 수 있다면, 늙음이 할 수 있다." 앙리 에스티엔의 말은 깨달음은 언제나 늦다는 것을 알려 준다.
4.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은 남에게 잘 속는다. 하여 자주 눈물 흘리고, 상처를 많이 받는다. 스스로 “어리숙한 사람” 이라는 시인은 이제 누군가에게 기대 살고 싶은 심경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찾아오면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 끌어” 집에 들이려 한다. 왠지 낯선 사람이 아니라 부평초처럼 떠돌다 돌아온 사람 같다. 용서하려는 마음도 엿보인다. 모든 걸 잊고 “이별 없는” 사랑을 하다가 백열전구처럼 사라지고 싶은 소망을 내비친다.
늦게 오는 사람/이잠(1969~)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 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시인은 “오 촉짜리 전구”를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밝기라 한다. 와트(W)보다 더 친숙하게 사용한 ‘촉’은 촛불 하나의 밝기를 표시하는 단위로, 5촉이면 촛불 다섯 개를 켜 놓은 밝기다. 가정에서 주로 사용한 30촉 백열전구에 비하면 상당히 어두운 편이다. 한데 50대인 시인에게 중요한 건 밝고 어두움이 아니라 ‘늦게 오는’이라는 시간성이다. “뜨거워서 데일” 것 같은 청춘의 사랑보다 늦게 온 “순한 사람”과 소소한 집안 일을 함께하면서 늙어가고 싶은 바람이다.
5.
경계를 넘어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 그게 진정한 평화의 세상이다. 평화는 차별 없는 세상이다. 최근에 일어난 '친위 쿠데타'와 그 이후의 여러 사건들로 주변 사람들의 상심한 마음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 멍들고 찢겨 상처 난 마음이 내지르는 절규가 아프다. 아비규환의 지옥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공간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슬프다. 그러나 이런 상실의 시대를 마냥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힌 윤과 그의 추종자들이 후퇴 시킨 민주주의 회복이 시급하다. 비 온 뒤에는 땅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야 하고, 소를 잃고 나서는 외양간을 다시 튼튼하게 지어야 한다. 땅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 터이고 소는 후대까지 계속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국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도 부족해, 시민이 피 흘려 만들고 지켜온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윤과 그 수하들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작금의 사회 경제적 위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왕(王) 자 새긴 또 다른 윤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도널드 트럼프가 왜 미국인의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는 지를 숙고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응원 봉'을 든 우리 시민들은 이제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논쟁해야 한다. 다시는 윤을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수고를 보고 싶지 않다
6.
대한민국 헌법 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다. 이는 주권을 잘못 행사해 자격 미달의 정치인에게 부당한 권력을 쥐여준 국민에게도 권력 남용과 오용의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투표 행위로 권력을 선출하는 시민 주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뼈아픈 자성이 필요한 시간이다. 기계적인 중립에 갇혀 촛불광장과 태극기광장의 모든 시민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과연 옳은가? 사건과 맥락을 통찰하지 못한 양비론은 부당한 권력자에게 호시탐탐 반전의 기회를 줄 뿐이다. 비상계엄이 반헌법적 불법임이 너무 나도 명백한데 이를 부정하면서 윤 탄핵을 반대하는 그 많은 사람에게 주권 자로 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들은 어째서 말도 안 되는 비상식의 사고를 하고 극악 스러운 욕설과 폭력을 행사할까. 그 연유를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은 망상에 기반한 행위라고 한다. 망상이란 자기의 신념과 가치, 자기 합리화의 방어기제, 결핍과 분노 등 여러 요인이 결합해 자가 생산하고 발전하는 허구적 의식세계이다. 망상이 무섭다. 망상은 본인을 파멸로 이끈다. 그런데 리더가 망상을 가지면, 그 조직도 망한다. 망상의 반대가 상상이다. 그것은 지성의 힘으로 나온다. 상상하는 능력, 상상력이 지성이기 때문이다. '망상'은 비현실적인 것을 생각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것을 마치 사실인 양 믿거나, 이치에 맞지 않게 망령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근거가 없는 주관적 신념,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에 의하여 정정되지 아니한 믿음으로, 병적으로 생긴 잘못된 판단이나 확신을 나타내는 질환을 말한다. 현실 판단력에 장애가 생기는 정신적 질환을 의미한다.
7.
우리는 동일한 시공간에 비슷한 모습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저마다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 심리학에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물을 다르게 본다'는 뜻이다. 인간은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로 보고, 천상의 신들은 맑은 수정으로 본다. 어류들은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집으로 보고, 굶주림에 시달린 아귀들은 피고름으로 본다. 왜 아귀들은 물을 피고름으로 볼까? '아귀다툼'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귀는 그칠 줄 모르는 탐욕, 그 탐욕이 채워지지 않아서 생기는 증오심, 탐욕과 증오심에 가려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왜곡된 견해를 가진 어리석은 존재를 가리킨다. '탐진치'가 문제이다. 그들은 증오와 자기 집착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만드는 망상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는다. 작금의 상황이 바로 '환술'로 만들어낸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형국이다. 신라의 원효 스님이 <금강삼매경론>을 해석할 때 이런 비유를 들었다. 어느 날 환술사가 뛰어난 '환술'로 호랑이 한 마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환술'로 만든 호랑이가 너무나도 생생해 그는 환술 호랑이를 실물이라고 믿게 되었고, 마침내 그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다. 인간의 망상을 경계하는 이 비유는 지금 우리 시대의 교묘한 거짓 선동과 그에 사로잡힌 극단적 확증편향을 떠올리게 한다.
8.
날이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까 우리 현대인들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너나없이 살아남기 위해 늘 아귀다툼하게 되는 것 같다. ‘아귀다툼’ 이라는 말은 ‘각자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자 서로 헐뜯고 기를 쓰며 다투는 일’ 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귀’라고 하면 못생긴 생선의 이름을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전우용 교수는 "이젠 '사람 답게 살지는 못할 망정 짐승이 되지 맙시다'라는 호소도 때늦은 듯하고", "짐승처럼 살지 언정 악귀가 되지 말자고" 했다. 언젠가 그가 말한 "악귀(아귀) 이야기"를 다시 소환한다. 물고기 중에 아귀라는 게 있는데, 본래 '굶어 죽은 귀신 또는 굶주린 귀신'이란 뜻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냐 하면, 생선은 대가리라 하고, 입이라고 안 하고 아가리라고 한다. 대가리의 대부분은 아가리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고 기능은 없고 탐욕 기능만 있는 거다. 이런 물고기처럼 이익만 된다면 어떤 사고 기능이 마비된 채 자기가 과거에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잊어버리는 또는 자기가 어떤 주장을 지지했는지 조차 잊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아귀’는 그것이 아니고 불교에서 사천왕에 딸린 여덟 귀신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아귀’는 몸이 앙상하게 마르고 배가 엄청나게 큰데, 목구멍이 바늘구멍 같아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늘 굶주림으로 괴로워하는 귀신이다. 그래서 이 아귀들은 만나기만 하면 음식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기만 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지옥도를 방불케 한다는 거다. 따라서 아귀는 '성질이 사납고 지독히 탐욕스러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아귀 다툼’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말다툼을 일컫는 속어로만 쓰였지만, 요즘은 먹을 것이나 그 밖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전혀 양보하지 않고 죽을 듯이 싸우는 일을 일컫는 말로 확대되었다. 사찰에서 승려가 '발우 공양'을 한 다음 발우를 씻고 버린 물을 '청수(淸水)'라고 하는데 이 '청수'에는 고춧가루 등 음식물의 찌꺼기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귀가 바로 이 청수를 먹는데 목구멍이 너무 좁아서 음식물의 찌꺼기가 아귀의 목에 걸리면 고통스러워 날뛰기 때문이다.
9.
'아수라장'이라는 말도 있다. 그것은 싸움 등으로 시끄럽고 매우 혼란한 곳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아수라(阿修羅)는 산스크리트어 '아수르(asur)'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고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선신(善神)이었는데 후에 제석천과 싸우면서 악신이 되었다고 한다. '아수라'는 증오심이 가득하여 싸우기를 좋아하여 그가 제석천과 싸울 때 제석천이 이기면 풍요와 평화가 오고, 아수라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한다. 인도 신화에서 '아수라'는 몸은 하나인데 얼굴이 세 개이고 팔이 여섯 개로 흉측 하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마하바라타>>에는 비슈누신의 원반에 맞아 피를 흘린 아수라들이 공격을 당하여 시체가 산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아수라장'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국어사전에는 '전쟁이나 싸움 등으로 혼잡하고 어지러운 상태에 빠진 곳'을 '아수라장'이라고 해석하였다. 아귀다툼과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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