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놀라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

310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15일)
1.
밤이 있어 우리는 쉴 수 있고, 밤이 있어 쉰 다음에 낮에 일할 수 있다. 우리에게 밤이 중요하다. 내가 소진되었을 때, 아니 하루를 충만하게 보냈기에 몸과 마음이 가난해졌을 때 밤이 온다. 아침이 온다는 사실보다 때로 밤이 온다는 사실에 더 큰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 밤은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고, 밤은 잉여이고 선물이다. 아침보다 저녁이 오는 것을 반기라는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이 소환된다. 나는 늘 왜 그의 호가 '많은 저녁, 다석(多夕)'일까 궁금했다. 하필이면 왜 저녁? 류 선생님에 의하면, 저녁에 어머니가 "애들아, 집에 오렴, 저녁 먹을 시간이야" 라고 부르는 이 소리는 신이 인간을 부르는 '저녁 콜'이라는 것이다. 이 '콜'은 신의 아이들인 인간을 부르는 따뜻한 소리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에게 저녁은 마음의 허기 뿐만 아니라, 몸의 피곤을 달래며 고요히 어둠으로 드는 시간이다. 따뜻하고 편안한 신이 호명하는 목소리의 시간이다. 그런 저녁이 많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저녁을 찬양하는 그의 어둠론은, 이 세상 밝음이 본질이 아니라, 어둠 이야말로 우주를 아우르는 거대한 품이라는 인식의 산물이다. 그래 그는 "세종석신(世終夕新)"이란 말을 했다. 목숨이 끝나면 저녁을 믿는 법, 저녁은 거룩의 냄새를 맡고 거룩과 가까이 하며 거룩을 닮아가는 시간이다. 그리고 "다석요식 영석불식(多夕要息, 永夕不息)"이란 말을 했다. 생애의 많은 저녁엔 쉼(휴식)이 필요하지만, 영원한 저녁에는 숨(호흡)을 쉬지 않는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풀면, 살아있을 때의 저녁은 휴식을 주지만, 영원한 저녁은 숨쉬기 자체가 필요 없어진다." 여기서 '다석(多夕)'이란 말이 나온다. 저녁은 어둠, 밤이 찾아오는 문턱이다.
2.
세상에 놀라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 세상에 이름을 새기는 "빅 스토리"에 목을 매지 말자.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 인간은 돈이든 명예든 타인의 인정이라는 의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많은 저녁(다석, 多夕) 류영모 선생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빛 빛 하지만 빛보다 어둠이 더 크다. 깬다 깬다 하지만 깸 보다는 잠이 먼저이다. 삶도 죽음이 먼저이고, 많음 보다 하나가 먼저이다." 이 말이 다음과 같이 한자로 전해진다.
▪ 적여시광(寂餘始光)
▪ 수여시각(睡餘始覺)
▪ 사여시생(死餘始生)
▪ 일여시다(一餘始多)
이 네 구절은 우리가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라고 여기는 "빛, 깸, 삶, 많음"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위대한 것, "어둠, 잠, 죽음, 하나"임을 밝혀 놓은 역설의 문장이다.
▪ 나는 빛이 어둠을 이긴다고 배워 왔다. 그래 한참 생각한 후 깨달았다. 도시 문명 속에서는 확실히 빛이 강해 보인다. 그러나 우주의 어둠 속에서는 빛은 미약하며 순간적이다. 소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소리가 적막을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침묵과 고요한 적막뿐인 절대 공간에서 소리는 맥을 못 춘다.
▪ 깨어 있는 것도 잠들어 있는 것에 비하면 일부분일 뿐이며, 잠깐일 뿐이다.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지 않은 깸은 깸이 아니다.
▪ 살아 있는 것 또한 죽음의 상태에서 생겨나 잠깐 뒤엔 다시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 세상에 나와 있는 만물은 번성하여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신의 '하나'가 이뤄낸 많은 것일 뿐이며 죽으면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많음이 하나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심오하다. 내 이름이 '한표'인데, 사람들은 '만표' 또는 '천표'로 바꾸라 한다. 그러니 '만표'도 다 '한표'에서 나온다. 억지인가?
3.
최선을 다해보고 결정해야 결정을 후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결정은 결단의 순간이 엄중해야 한다. 결단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다. 우리가 말하는 기도는 흔히 절대 자인 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요구하는 행위로 알려져 있다. 기도를 기복(祈福)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의 기도는 자신의 욕망을 강화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이용하는 자기 만족일 뿐이다. 기도의 '기(祈)'자를 풀이하면, '빌 기'자이지만, 날카로운 도끼(斤)를 자기 앞에 겨누는(示) 수련을 뜻한다. 도(禱)는 목숨(壽)을 자기 앞에 내놓고 구(求)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굳은 결심이다. 기도는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내는 결단의 순간이다. 그렇게 해서 기도는 자신만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쌓여 있는 적폐(積弊)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건 '영적 성숙, 영혼을 살찌우자'는 거다. 그 '살 찌움'으로 '허심(虛心)'의 세계를 구축하는 거다.
4.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8)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신약 성경>>의 한 구절이다. 우리는 이 구절은 하느님에게 은혜를 간구하는 마법의 기도문으로 여긴다. 그러나 하느님은 소망을 그냥 쉽게 들어주는 신이 아니다. 그리스도도 사막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을 떄도 아버지 하느님에게 섣불리 은총을 구하지 않았다. 사실 하느님에게 물리적 법칙을 깨뜨리고 우리를 도와 달라고 간구하는 것 자체가 부당한 일이다. 말 앞에 수레를 매달 수 없듯이, 문제를 마법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강한 의지와 올바른 성품, 지치지 않는 힘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편이 낫다. 아니면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하는 게 더 낫다.
5.
좋은 삶은 인내하는 것이다. 인내는 포기나 체념과 다르다. 칸트는 '습관적 견딤'이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악에 압도되는 건 인간에게 짓밟히는 벌레나 침 없는 벌 같은 무기력한 신세로 전락시킬 뿐이다. 인내란 반드시 불의와 폭력에 저항해서 힘을 모으는 굳센 마음이어야 한다. 지혜가 없는 기다림은 어리 석음이고, 정의가 없는 견딤은 나약함이다. 쓰디쓴 인내의 열매를 달콤하게 만들려면 무엇을 위해 견디는 가를 놓치면 안 된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귀향 과정을 그려낸다. 고난과 위험으로 얼룩진 귀향길은 인생 여로를 상징한다. 우리 역시 날마다 위기를 이기고 무사히 귀가하기를 바라지 않던가? 오디세우스는 인생에서 행복과 평화를 손에 쥐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가를 알려준다. 흔히 사람들이 떠올리는 오디세우스의 자질은 '트로이의 목마'로 상징되는 기지와 계략이다. 위기를 맞아 눈앞이 캄캄할 때마다 과연 그는 책략과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이겨낸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진짜 미덕은 인내이다.
"참아라, 마음이여!" 그는 개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도, 기발한 계략이 떠올랐을 때도, 상황이 무르익어 열매가 떨어질 때까지 참을 줄 안다. 감정에 빠져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함부로 행동해 자신을 파멸로 몰지 않는다. 그는 뒷일을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키클롭스가 동료를 살해했을 때 격분한 오디세우스는 칼을 빼 드는 대신 훗날을 기약한다. 자기 힘으론 동굴을 막은 바위를 치울 수 없기 때문이다. 때를 무시한 행동은 만용에 불과하다. 성급함은 인간을 미망에 빠뜨리고 참을성 부족은 판단 착오를 일으킨다. 울분을 참고 견디면서 그는 "고귀한 새벽의 여신이 오기"를 기다린다. 술을 건네 키클롭스를 재우고 말뚝을 깎아 그를 눈멀게 한 후 키클롭스의 힘을 역이용해 동굴에서 탈출한다. 좋은 삶은 인내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6,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소환된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중용>> 제2장의 "군자가 중용을 이룸은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는 문장에서 비롯된다. 그냥 '때에 맞게 행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공자의 '중용'은 산술 평균이 아닌 시중(時中)이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중용은 책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주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 삶의 방식이다. "중용적으로 산다"는 것은 한 인간이 우주가 부여한 자율 조절 장치를 통해 자신의 삶에 중심을 잡고 균형을 맞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매 순간 벌어지는 일상사에 자신의 감정을 조화롭게 표출하는 '중화(中和)의 중용',
▪ 그 때 그 때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며 사는 '시중(時中)의 중용',
▪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영혼에 충실한 '신독(愼獨)의 중용' 등등은
인간의 삶에 벌어지는 많은 상황 속에서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 답은 쉽지 않다.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정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용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꿰뚫는 원리이다.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은 자기 중심과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중용의 인생은 우주적 존재방식을 그대로 삶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용은 중간이 아닌 역동적인 평형'이다. "중(中)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 있지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것의 이름이다."(주자) 여기서 용(庸)은 '평상시, '언제나'란 뜻이다. 중용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 '관계의 중용', '행동의 중용', '판단의 중용' 등 인간은 중용을 통해 완벽한 삶을 구현할 수 있다. 사람은 다 때가 있다는 것은 그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거다. 이 말을 하려 다가 길게 이어졌다.
7.
최근에 읽고 있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자극적인 문장을 만났지만, 많은 사유 거리를 주었다. "저항하는 불편함을 외면하면 당해도 싼 만만한 사람이 된다." 자극적인 말이 것은 "당해도 싼"이란 말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 가가 나를 함부로 대하면 기분이 나쁘다.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무엇인 가를 결정하고, 아랫사람처럼 부리려고 하고, 그에 따른 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참기 어렵다. 그런데 그렇게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을(乙)이라고 여긴다면, 어쩔 수 없이 인내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을'이 무작정 무시 당하지는 않는다. 무시 당하는 이유는 '을'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레 겁먹고 먼저 포기하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는 거다. 이를 극복하려면, '지는 싸움이라도 저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지는 싸움'이 주는 결과는 있다. 그 패배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쉽게 꺾이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갖출 수 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소환된다. <<한시외전>>에 나오는 제나라의 장공과 사마귀에 관한 이야기이다. 장공이 어느 날 사냥을 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사마귀 한 마리가 나타나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이에 장공이 마부에게 "이것은 어떤 벌레인가""라고 물었다. 마부는 "이것은 사마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벌레는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 모르고, 제 힘도 모르고 가볍게 적에게 덥벼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공은 이렇게 말했다. "이 벌레가 만약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천하의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달랑거철'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하나는 어리석은 사마귀의 무모함, 다른 하나는 죽음을 무릅쓰는 사마귀의 용감함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장공처럼, 사마귀의 '저항 정신'을 읽었다. 어쨌든 사마귀야 살짝 비켜 수레바퀴 저 멀리 가버리면 그만 이었지만, 저항하는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고, '지는 싸움을 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8.
늘 이기는 싸움만 했을 때 한 가지 편향에 빠지게 된다. 이를 "생존 편향(survivorship bias)"이라 부른다. 이 말은 조던 엘렌버그의 <<틀리지 않는 법: 수학적 사고의 힘>>에 나오는 거다. 데이터를 분석할 때 눈 앞에 있는 데이터에만 몰입할 경우 치명적인 오류에 갇힐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다. '생존 편향'은 선택 과정을 거쳐 살아 남은 개체에만 주목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간과하는 논리적 오류이다. 불완전한 데이터로 인해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쉽게 말해, 성공한 경험만 가지고 상황을 분석할 때 생기는 오류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에서는 독일 폭격기와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폭격기를 분석하면서 더 효율적인 전투를 위한 대책을 연구했다. 그러나 총탄을 가장 많이 맞은 곳이 동체였고, 총탄을 가장 적게 맞은 곳이 엔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군대의 지휘부에서는 동체가 가장 많은 총탄을 맞았으니 동체를 보강하는 것이 전투에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연구를 함께했던 아브라함 왈드(Abraham Wald)라는 수학자는 정반대로 엔진을 보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분석이 '살아 돌아온 폭격기'에 한정해서 연구했다는 점이다. 현장에서 추적한 폭격기는 아예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하려면 살아 돌아온 폭격기와 추락한 폭격기를 동시에 놓고 분석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군 지휘부는 이미 추락한 폭격기를 까맣고 잊고 눈앞에 보이는 살아 돌아온 폭격기만 대상으로 연구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폭격기가 더 오래 생존해서 적에게 더 많은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엔진이 보강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동체에 총탄이 많은 것은 당연히 면적이 넓으니 그럴 뿐이었다.
이러한 편향은 우리의 삶에서도 벌어진다. 최근의 내란 사태도 보면, 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성공한 경험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거짓'으로 쌓아 온 성공이지만 말이다. 늘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게 되면 상대의 약점에 비해 자신의 강점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상대의 강점에 대한 자신의 약점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약점이 무엇 인지조차 알 수 없다. 당연히 그것을 보강할 방법도 모른다. 마지막에 지게 되면 치명적인 상처가 남는다.
9.
살면서 지는 싸움도 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 과정에서 쉽게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주게 되며, 마음대로 하려는 생각을 줄이거나 포기하게 된다. '견인불발(堅忍不拔)'이라는 말이 있다. '굳게 잡고 견디어서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큰 일을 해낸 사람들에게는 재주뿐만 아니라 이 '견인분발' 정신도 있어야 한다. 거세게 저항하면 비록 지는 싸움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공부하거나 빼앗기지 않는다. 저항을 멈추면 가치도, 의미도 없는 그저 단순한 패배만 남길 뿐이다. 무시 당하지 않는 을(乙)이 되기 위해서는 저항하는 불편함을 외면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해도 싼 만만한 사람이 된다.
생각하고 저항해야 인간이다. 생각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삶은 주인의 삶이 아니다. 존재를 남에게 맡긴 노예의 삶이다. 알베르 까뮈는 "나는 저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저항은 창조이다. 창조는 저항에서 나오고, 그 뿌리는 분노에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이 아니다. <<분노하라>>는 책을 쓴 스테판 에셀이 한 말이다. 불의, 불평등, 전체주의, 비 인간화 등에 대한 분노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분노해야 할 일에 의연히 분노해야 한다. 어리석음을 걷어내고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게 인문 정신이다.
10.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를 반항하는 인간의 표본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서 저항과 반항을 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이 시지프스의 행위가 '무의미에게 의미 주기'란 것이다. 이것은 무의미한 삶에 스스로 '저항'이라는 의미를 줌으로써 그 형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비록 끝없는 좌절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이상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데서 그 가치와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가치는 완벽한 성취가 아니라, 성취를 향한 노력, 성실한 자세, 좌절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내다보는 희망의 태도라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는 우리에게 '사막에서 버티기'를 제안하였다. 우리들이 겪는 삶의 고단함과 무의미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버티기'라 했다. '버틴다는 것'은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꿋꿋이 견딘다'는 것을 뜻한다. 언뜻 툭툭 털고 다시 내려와 다시 바위를 올리는 시지프스의 모습을 실존주의로 해석하는 까뮈에게 나는 대학 절에 열광했었다. 까뮈는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저항과 반항이다"면서 실존주의 철학을 대변했었다. 그는 삶의 부조리성, 무의미성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는 인물로 시지프스를 꼽았다. 알베르 까뮈는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그 어떤 희망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언제나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부조리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반항하는 인간'의 당당한 자세를 보았다.
이 현실 세계에서 '진실'은 '거짓'과 '가식' 그리고 다수의 '용기 없음' 의해 가려진다. 따라서 "진실의 빛"은 '가식과 욕망의 어두움'을 떨쳐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변혁에의 열정'이, 인류가 그나마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의, 평등, 포용의 원을 조금씩 이라도 확장하게 한다. 진실은 거짓을 이기지 못할 수 있으며, 빛은 어두움을 이기지 못할 수 있다는 '깊은 절망'을 품고서, 또다시 떨어질 바위를 힘겹게 밀어 올리는 한 걸음을 떼는 시지프스의 몸짓을 소환한다. '이긴다'는 승리의 보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이기에 이 세계에 개입하고 변화를 위한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시지프스의 기도/이문연
神(신)이시여, 죽을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로 밀어 올리건만.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이 어리석은 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단지 괘씸하다는 이유로
영겁의 형벌을 내리고
신들의 눈에 들지 않는다 해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그들을 벌해 주소서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끝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비생산적인 곳에
시간을 소모케 하지 마시고
누구나 그들을 믿고 따라갈 수 있도록
인간과 신들이 얼굴을 마주하는
화합의 장을 펼쳐 주시고
잡신들에게는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여
다시는 이런 변태적 군림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일러 주소서
부정을 밥 먹듯 하는 제우스신은
중벌을 내려 주시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신은 족쇄를 채워
명계(冥界)의 왕 하데스와
무한지옥의 고통을 알게 해 주소서
인간도 물욕에 눈이 어두워
영혼을 팔아 성채를 쌓아가는 어리석은 짓들을
더는 못하도록 혼내 주시고
이번 계기로 조율 한번 확실하게 해 주시어
누구나 공정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기름지고 맑은 세상 만들어 주시 옵소서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