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념하는 날로 ‘밸런타인 데이’이다.

310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14일)
1.
오늘은 2월 14일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념하는 날로 ‘밸런타인 데이’이다. 사실 영어로는 'Valentine’s Day'라고 소유격을 나타내는 ‘s'가 반드시 들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발렌타인 데이’라고 부른다. 서양에서는 남녀 무관하게 연인들이 선물을 나누는 기념일이지만, 우리는 조금 다르게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다. 현대에는 그냥 초콜릿 업체들의 상술(商術)화된 날이며 '데이 마케팅'의 원조 격인 날이다. 유래는 성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축일(祝日)에서 왔다. 구전으로는, 3세기 로마 시대 인물인 발렌티누스는 로마군의 결혼 미사를 집전한 것이 적발돼 처형됐던 성인이다. 당시 로마 황제는 당시 로마군의 결혼을 법적으로 금지했었다. 결혼이 군사력을 악화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어느 종교 든 군인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은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행위였다. 황제의 '금혼령' 탓에 무수한 로마 젊은이들이 고통을 겪었다. 그러자 발렌티누스는 이들의 고충을 헤아려 비밀리에 결혼 미사를 집전하다가 체포됐다. 당시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발렌티누스에게 그리스도교의 허구와 오류를 지적했다. 발렌티누스는 재판관의 지적을 일일이 반박하며 맞섰다. 그러자 재판관은 앞을 보지 못하는 딸의 시력을 회복시켜보라고 했다. '그리스도 기적을 보여주라'는 말이었다. 발렌티누스가 딸의 눈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자 눈을 떴다고 한다. 여기에 감복한 재판관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이미 체포된 그리스도교를 모두 석방했다. 황제는 이 소식을 접하고 대로하고 발렌티누스를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순교했다.
2.
진위와 관계없이, 발렌티누스 성인은, 결혼을 축하하다가 순교한 전설이 전해지면서, 연인들에게는 사랑의 결실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그의 축일을 기념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풍습은 14세기 무렵부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는 연인끼리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하는 게 밸렌타인데이의 시초였다. 지금에 이르러 밸렌타인데이는 초콜릿을 주고받는 것이 정석으로 굳어졌다. 주로 남성이 여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로 인식된다. 2월14일 연인끼리 초콜릿을 주고받는 게 발렌티누스의 축일을 기념하는 것과 무슨 상관일까? ‘일부 상인들의 상업적 마케팅 때문에 생긴 현상이지 성 발렌티누스 성인의 삶이나 신앙을 기리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게 천주교 공식 입장이다.
3.
서양에선 이 날이 성별 구분 없이 연인들이 서로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날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일본 등에선 주로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 등을 선물하는 것이 관습으로 자리잡았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보다 먼저 서양의 발렌타인 데이 풍습을 받아들였던 일본의 제과점들이 '선물은 남성이 여성에게만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을 깨고 여성이 남성에게 주체적으로 선물할 것을 권장하는 마케팅 방식을 썼는데 그것이 인기를 끌어서 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일본 방식이 그대로 들어오면서 애초 풍습이 시작된 서양과는 달리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자리잡은 것이다. '화이트 데이'로 알려진 3월 14일 역시 서양엔 존재하지 않는 날로 발렌타인 데이 마케팅에 성공한 일본의 제과업계가 '남성이 여성에게 답례로 사탕 등을 선물하는 날'로 만들어내 한국까지 전파됐다고 한다. 어제 서울을 다녀올 때마다, 고속버스 터미널 지하 백화점 식료품 코너를 즐겨 찾는데, 온통 초콜릿뿐이었다.
4.
그러나 이 날(1910년 2월 14)은 바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아픈 기록으로 남아 있는 안중근(사진·1879~1910) 의사의 사형 선고일이기도 하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한국 식민지화를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돼 중국 뤼순 감옥에 수감됐다. 이듬해인 1910년 단 7일만(2월7~14일)에 6회에 걸쳐 공판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은 일본인들이 형식적으로 진행했고, 14일 열린 마지막 공판에서 일제의 각본대로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선고됐다.
5.
지금 우리 사회는 심한 갈등 속을 지나고 있다. 남북 분단에 이어 짧은 기간에 민주화와 압축적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 지나친 경쟁과 승자 독식 문화, 성과지상주의에 물질만능 등의 풍조가 갈등의 골을 깊이 파 놓고 있다. 게다가 보수와 진보의 이념, 동서 또는 중앙과 지방의 지역, 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빈부, 청장년과 노년 세대의 가치관 대립과 복지정책, 양성문제, 대-중소기업, 노사,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은 물론 심지어 장애인,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갈등이 다양하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갈등 해결을 통한 사회통합이다. 우선 정치권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주문한다. 타협 없는 자기확신, 선거의 유불리에 따른 정파 이익 우선, 편가르기, 증오와 복수를 멀리하고 양보와 타협을 통한 통합, 연대와 포용, 국익 아니 공익 우선과 미래 지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6.
법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공평하지 않다. 인간은 선하지 않고, 인간의 내부에는 근원적인 악마성이 있다. 그러므로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법만으로 사람을 다스릴 수 없기에 법 없이도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성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법의 중요한 기능은 질서 유지보다는 약자 보호였다. 국회는 법을 통해 사회의 질서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토론과 논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 세력과 법률 제정이 긴밀하게 이어지고,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기득권 집단의 로비가 큰 영향을 마치기 시작하면서, 국회 제정 입법의 상당수가 '기득권 보호'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의회에서 다르는 많은 법의 초안이 관련 이익단체에서 만든 것이다. 법치 사회와 운명처럼 맞닿아 있는 법과 기득권 유지의 사슬을 끊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 필요한 것이 사회 정의이다. "나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고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말하였다. 나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면서 그 사회로부터 이 같은 의식을 배웠다. 프랑스에서는 좌파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폭넓게 동의를 얻고 있다. 이 말은 이렇게 다시 고쳐 말할 수 있다. "사회 정의가 질서보다 더 중요한 가치이다." 우리 사회는 '사회 질서'가 '사회 정의'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고 있다.
7.
'기초 질서를 지키자'는 구호를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우리는 '안보 이념'을 정의나 자유, 평등의 가치보다 더 강조 받고 있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 질서와 안보 이데올로기를 계속해서 주입 받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분단 상황을 이용한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어,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사회정의의 요구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받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정의보다 질서를 강조하는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사회변화를 두려워하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가 수구보수세력들에 투표하는 것도 이 두려움의 표시이다.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사회 정의가 사회 질서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말이다. '질서에 대한 무의식의 복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안정을 추구하는 본능적 경향이 있다. 우리 인간은 무질서와 혼란은 불안과 긴장을 불러오기 때문에 은연중에 안정 상태, 아니 중지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거다. 지배세력이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법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의와 차별, 배제가 이루어지고, 억울함과 굴종을 강요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회 정의를 계속 요구하여야 한다. 그러면서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8.
오랫동안 교육을 통해 인간의 악마성을 순화하고 예의와 질서를 지키고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법치라는 이름의 관료주의가 미치는 해악은 인간의 악마성 못지않은 구조적 악이 되고 있다. <천수 송> 괘가 이 점을 말하고 있다. 법을 이용하여 민중의 고통을 구원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 에든 있다. 그러나 사회가 그냥 두지 않는다. 권력자를 심판한 재판관은 어떤 형태로든 보복을 받는다. 아침이 되기도 전에 그들은 세 번이나 위기 의식을 느껴야 한다. 법대로 사는 정의로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거다. 우리는 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를 찾아야 한다. 급하다. 지금 우리 사회가 잘 보여주지 않는가?
9.
이럴 때, 나는 다음 시를 읽고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는다.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의 덧붙임도 아주 좋다. 짐승들도 이렇게 사는 데, 우리는?
산다는 것의 의미/이시영
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 밖에 안 된 집을 부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 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 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 날라다주었기 때문이다.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은 더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1976년의 일이다. 충청도 산골에서 어떤 소년이 다람쥐 한 마리를 사로잡아 체 속에 가두었다. 장차 쳇바퀴 돌리는 서커스 기예를 펼치게 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체가 바람에 뒤집힐까 봐 주먹만 한 돌 몇 개를 얹어 놓았다. 소년이 마당에서 노는 동안 다람쥐 여러 마리가 체 감옥에 면회를 온 듯 북적거렸다. 별 일 있으랴 싶었다. 시간이 지나서 가보니 체 감옥이 뒤집혀 있었다. 다람쥐 동료들이 와서 돌들을 밀어내고 탈옥을 시킨 것이었다."
10.
그것은 우분투(Ubuntu,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정신으로,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갈등을 풀겠다는 마음먹기가 중요하다. 오늘 아침 사진의 손에 놓인 것을 다 비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세상이 보이고, 비우고 나면 다시 무언가 채워진다. 마음과 물질이 아닌 영혼 깊이 모두를 비워내다 못해 긍휼과 사랑으로 가난하게 되어야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재물이 부자인 사람은 근심이 한 짐이고,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행복이 한 짐이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레오나르도 다빈치)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 잘나거나 멋진 사람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좋다. 예쁘거나 근사한 사람보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 좋다. 부족한 게 하나 없는 사람보다 마음이 다정한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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