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주역>> 독법에 중요한 개념인 '응(應)'과 '비(比)' 이야기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2. 13. 09:12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13일)

<<주역>>을  읽으면서, 괜스레 희망을 보았다고 어제 <인문 일지>에 썼다. 그러나 “변화는 절망에 지쳐 더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타난다.”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말이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용기는 터널 끝에 보이는 빛이 어쩌면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기차의 헤드라이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아무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희미한 불빛을 찾는 식의 ‘거짓 희망’을 단호히 뿌리치라는 주문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안일함이 정확한 현실 인식을 방해하고 변화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지금 벼랑 끝에 있다는 끔찍한 절망을 받아들일 때 돌아설 용기가 생긴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연후 기간 내내, <<주역>> 공부를 하고 있다. <<주역>>은 음양의 변화를 통한 변화 철학을 말한다. 그 책을 보면, '물극즉반(物極卽反)'이란 말이 핵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되 돌아간다. 그러니까 정점에 도달하면 내려올 일밖에 남지 않고, 반대로 최대점으로 추락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된다. 자연의 춘하추동 순환도 그렇다. 이런 운동의 에너지는 모두 다 온도, 즉 따뜻함의 정도라고 나는 본다. 따뜻하면 꽃이 저절로 피듯이, 내가 따뜻하면 내 주변에도 따뜻한 사람이 모여든다. 이제 봄 기운이 도니 내 마음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야 겠다. 실질적으로 오늘부터는 밖으로 나가 2024년도의 일을 시작할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부 시인의 <신년 기원>을 공유한다. 오늘 아침 사진은 대전 시립미술관에서 찍은 거다.

신년 기원/이성부

시인들이 노래했던
그 어느 아름다운 새해보다도
올해는
움츠린 사람들의 한해가
더욱 아름답게 하소서
차지한 자와 영화와
그 모든 빛나는 사람들의 메시지보다도
올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소망이
더욱 열매 맺도록 하소서
세계의 모든 강력한 사람들보다도
쇠붙이보다도
올해는
바위틈에 솟는 풀 한포기,
나목을 흔드는 바람 한 점,
새 한 마리,
억울하게 사라져가는 한사람,
또 한사람,
이런 하잘것없는 얼굴들에게
터져 넘치는 힘을 갖추도록 하소서
죽음을 태어남으로,
속박을 해방으로,
단절을 가슴 뜨거운 만남으로
고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모든 우리들의 한해가 되도록 하소서
역사 속에 그리움 속에
한점 진하디진한 언어를 찍는
한해가 되도록 하소서

어제에 이어, 오늘은  <<주역>> 독법에 중요한 개념인 '응(應)'과 '비(比)' 이야기를 한다. 우선 '응(應)'이란 무엇인가? '위(位)'란 것이 효와 그 자리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반하여, '응(應)'은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효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보는 것이다. 여섯 개의 효 중에서 1효와 4효, 2효와 5효, 3효와 6효의 '음양상응(陰陽相應)' 관계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괘의 1, 2, 3효와 상괘의 1, 2, 3효가 서로 '음과 양 상응관계' 즉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응(應)'이다.  

그러나 함부로 월권하여 감응하는 것은 아니고, 그 감응의 자리가 결정되어 있다. 初는 四와, 二는 五와, 三은 上과 감응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조건이 있는 거다. 성별이 달라야 한다는 거다. 음효와 음효, 양효와 양효는 감응하지 않는다. 전효가 감응하는 괘는 다음 두 개이다. 63번 <수화(水火) 기제(旣濟) 괘>와 마지막 64번 <화수(火水) 미제(未濟) 괘>이다. 감응하면 '유응(有應)', 감응이 없으면 '무응(無應)'이라 말한다.


주역 사상에서는 '위(位)'보다 '응(應)'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친다. 이를테면 '위(位)'의 개념이 개체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應)'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 내는 관계론이다. 이를테면 개체 간의 관계론이다. 그런 점에서 '위(位)'가 개인적 차원의 관점이라면, '응(應)'은 사회적 차원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실위(失位)도 구(咎.허물)요 불응(不應)도 구(咎)이다. 그러나 실위(失位)이더라도 응(應)이면 무구(無咎)이다”고 한다.  '실위(失位)'도 허물이고, '불응(不應)'도 허물이어서 좋을 것이 없지만 설령 어느 효가 '득위(得位)'를 못하였더라도 '응(應)'을 이루고 있다면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나쁜 효가 아니라는 뜻이다.  '위(位)'보다 '응(應)'을 더 상위(上位)의 개념으로 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직면하는 것이다.  예컨대,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한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應)'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직장의 개념도 바뀌어서 최근에는 직장동료들이 좋은 곳을 좋은 직장으로 친다.  

그리고 '위(位)'가 소유(所有)의 개념이라면, '응(應)'은 접속(接續)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접속 이야기를 하다보니 제레미 리프킨이 소환된다. 그는 2001년 한국에 소개된 <<소유의 종말>>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런 예측을 했었다. 2020년 무렵의 세계 경제는 '소유'가 '접속'으로 대체되고, 시장은 네트워크에 자리를 내어주며, 판매자-구매자가 아닌 공급자-사용자가 시장의 주역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시장이란 판매자-구매자로 구성되고, 재화의 소유권을 교환하는 거래가 시장 경제의 기본 질서였다. 그런데, 그의 예측이 맞게 돌아간다. 그의 책이 우리에게는 <소유의 종말>로 번역되었지만, 원제는 <접속의 시대(The Age of Acess)>였다. 접속의 시대, 우리는 이것을 '초연결의 시대'라고 말한다. 여기서 새로운 경제 개념이 나온다. '공유경제'.

초연결, 아니 접속이란 공유경제 질서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 개념이다. 접속이란 개념은 단순히 '물질적 재화를 빌려 쓴다'는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접속의 시대 또는 공유의 시대(The Age of Sharing)'가 도래한다는 것은 가족관계의 범주를 벗어난 대부분의 인간 활동에서 사람들 간 '공감과 연대의 감정에 기반을 둔 전통적 관계'가 '정기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계약 관계'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공유주택에 살기를 원하는 소비자는 단순히 안락한 거주 공간을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국면이 전환되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공유 주택에서 처럼 이웃과의 관계를 맺는 데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을 비인간적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놀이터(키즈 카페)를 사용하고, 반려동물과 놀며(팻 카페),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을 사귀는 것(각종 캠프)에 아무런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나 주택을 소유하기보다는 임대하여 사용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나 자신도 자동차를 장기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다. <<소유의 종말>>에서 전망하는 접속형태의 소비란 ‘소유의 종말’이 아니라 ‘소유의 분할’이라 말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 분할된 소유이며 동시에 공간적으로 분할된 소유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에 조응한 ‘다품종 소량소비’라고 할 수 있다. 소비단위를 더욱 작은 단위로 분할함으로써 소비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유의 변화라기보다는 소비패턴의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접속형태에서는 지속적으로 소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쌍방이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즉 빌려주고 빌리는 관계가 지속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위(位)'를 소유에 비유하고, '응(應)'을 접속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유가 완전히 종말을 고하는 단계, 즉 임대자의 소유권마저 종말을 고하고 모든 소유가 접속으로 전환된 상태로 발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소유보다는 접속에 더 익숙하다.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소유가 아닌 접속이다. 독선생(獨先生)을 두지 않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나,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감상을 하는 것도 소유가 아닌 접속이다.  우리의 삶은 접속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다.

아무튼 '응(應)'의 개념은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원천적 패러다임이다. '응(應)'은 소유의 개념과는 구별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응(應)'의 개념은 자본주의사회, 개인주의사회, 그리고 경쟁사회의 보편적 덕목은 아니다. 그러나 동양문화의 패러다임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단연 이 '응(應)'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응(應)' 이외에도 효와 효의 상응관계를 보는 개념으로 '비(比)'가 있다. 이 '비(比)'는 인접한 상하(上下) 2효의 상응관계를 보는 것이다.  '응(應)'이 하괘와 상괘 간의 상응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이 '비(比)'는 인접한 두 효의 음양상응을 본다는 점에서 응(應)에 비하여 다소 그 관계의 범위가 협소히다. 그러나 그 기본적 성격은 관계 론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다음은 '효'의 명칭(名稱)에 관한 것이다. '효'가 처하는 위치, 즉 아래위에 있는 '효'와의 관계에 따라서 그 명칭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마저 달라지는 것이다.  당연히 그 성격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음효' 위에 있는 '양효', 즉 양재음상(陽在陰上)인 경우를 '거(據)라'고 하고 그 의미는 공제(控制), 즉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음효가 양효 아래에 있는 경우 승(承)'이라 한다. 즉 음재양하(陰在陽下)인 경우를 승(承)이라 하고 순종(從順)의 의미이다.  그리고 같은 음효라 하더라도 그것이 양효 위에 있을 때 즉 음재양상(陰在陽上)일 때 '승(乘)'이라 호칭하고 그 의미를 반상(反常) 즉 역(逆)으로 읽는다.  

<<주역>>의 독법은 철저하리만큼 관계론적이니다. 개별적 의미는 매우 협소하다. 그것이 갖는 의미와 역할은 그 개별적 존재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사후적으로 규정되고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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