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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짓말이 밝혀졌는데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 사람은 파렴치한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2. 10. 17:04

310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2월 10일)

1. 
입춘 추위가 계속된다. 그래 어제는 최소한의 외출을 하고, 집에서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으며, 조용한 시간들을 보냈다. "올바른 경청은 마치 술에 취한 듯 허정하게 듣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나는 이 말에 눈이 꽂혔다. '허정하게'라는 말을 쓰는구나!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노자)에서 따온 말이 '허정'인데. "허함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히 한다." 아니면 "비움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도답케 하라!" 이렇게 해석한다. 비움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면 고요함이 도타워지며, 고요함 지키기를 도탑게 하면 비움이 지극해진다는 상보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술에 취했을 때가 '허정'이 된다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걱정이 없어지고, 간이 부어 용감해 진다. 그래서 술에 취한다는 것은 비우는 것일 수 있다. 그냥 쉽게 비워지지 않으니까, 술을 마시고 비우는 것이다.

비움은 집중이다. 생각을 비우면 현재에 더욱더 집중하게 된다.
비움은 자유이다. 생각을 비우면 어떤 사람의 말, 표현, 사상에도 걸림 없는 자유로운 삶이 가능해진다.
비움은 평화이다. 생각을 비우면 다툼과 괴로움이 없어져 고요함 즉 평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비움은 자비이다. 나의 생각을 비우니 나와 너가 사라진 전체 즉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니 만물을 아끼고 사랑한다. 

걱정하지 말고, 비우자.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고,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 충만하게 오늘도 즐겁게 보내자고 마음 먹지만, 아직도 사회는 갈등이 충만하다. 지난 주말 대구가 걱정이었다..

2. 
우리 현대사에서 보수를 참칭했던 정권 가운데 파쇼적이지 않았던 정권이 과연 있었나 싶다. 빨갱이 사냥과 노조 탄압은 물론이고,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지역(차별)주의 역시 파시즘적 분열 정책의 산물이다. 파시즘의 정치적 후계자인 국민의힘은 계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법원 폭동을 옹호하더니, 헌법재판소 결정마저 불복할 것처럼 을러대고 있다.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민의 절반 가량을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한 윤이라는 돈키호테로 인해 새삼 재인식하게 된 사실이 있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현대사는 ‘파시즘으로부터의 도피’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민주화 운동의 다른 이름은 반파시즘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민주화가 완성됐다고 쉽게 생각했지만, 완벽한 착각이었다. 민주주의 시제에 완료형이란 없다. 오직 현재 진행형만 있을 뿐이다. 

4. 
욕설과 저주와 폭력의 언어가 난무하는 ‘윤 탄핵 반대 집회’는 섬뜩하고 괴이하지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12·3 계엄에 명확히 반대했던 바이든 행정부는 물론이고, 자국 이익 앞에서는 동맹도 필요 없다는 (오랜 동맹국 덴마크로부터 그린란드를 빼앗겠다는) 트럼프가 집권했는데도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청맹과니(靑盲과니)들인 데다, 뜬금없이 시진핑을 탄핵하자는 초국적 정치 구호로 큰 웃음을 준다. 혐중 프레임에 갇혀 자기들끼리 ‘화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최근엔 집회 중단을 선언하고 잠적한 배인규 <신남성연대> 대표를 향해 ‘배인규는 사실 화교’라며 공격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화교는 대부분 청나라 때 건너온 조상의 자손이거나 중국과 대립하는 ‘자유’ 대만 출신 아닌가? 이런 명백한 모순도 알아채지 못하는 무지와 맹신이 ‘선거연수원 체포 중국인 99명 주일 미군기지 압송’ 같은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토양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5. 
극단적 성향의 ‘집단 무지성’은 선동에 취약해서 폭력과 결합해 광기로 변하기 쉽다. 1·19 법원 폭동만이 아니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테러 역시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악마 화하는 선동이 물리적 위력으로 전화한 결과다. 극우의 백색테러는 계엄 사태 이후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계엄 사태를 포함하여 지금 우리 공동체가 처한 위기는 윤 정부 내내 계속된 정치적 기획으로 ‘만들어진 위기’라겨 별 수 있다. ‘강남-영남-교회’라는 기득권 삼위일체에 대통령실이 체계적으로 관리한 극우 유튜버들이 가세하여 레드 콤플렉스에 찌든 60~70대와 반페미니즘으로 의식화한 일부 2030 남성을 흥분시키고 있다. 눈에 띄는 건 무지해 보이는 군중이지만, 이들에게 ‘슈퍼챗’과 후원금을 쏘며 전투에 나서라고 독려하는 건 기득권 세력이다. 윤 친구이자 변호인 석은 자신이 대신 벌금을 내주겠다며 폭동을 사주하기도 했다. 전광훈이나 유튜버들은 진정한 배후가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앞에 나선 행동대장일 뿐이라고 나는 본다.

또 우리들을 괴롭히는 '파렴치한(破廉恥漢)'들을 어찌하여야 할까? '파혐치한'은 '염치를 모르는 뻔뻔스러운 사람, 아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파렴치한'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비도덕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파렴치"라는 말은 한자어로, ‘파(破)’는 ‘깨뜨리다’, ‘렴(廉)’은 ‘청렴하다’, 그리고 ‘치(恥)’는 ‘부끄러움’을 의미합니다. 이를 합쳐보면 "부끄러움을 깨뜨렸다 "라는 뜻이 된다. 즉,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파렴치한"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비도덕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6. 
'파렴치한'이라는 단어는 보통 아래와 같은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 이기적인 행동을 할 때
다른 사람의 권리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이 단어가 쓰입니다. 예를 들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거나,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시: "그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동료들을 밟고 올라서는 파렴치한이다."
▪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할 때
사회적 규범을 어기거나 비도덕적인 행동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파렴치한"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입니다. 예를 들어, 공금을 횡령한 후에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는 사람, 사기를 치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예시: "회사의 자금을 횡령하고도 오히려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그 사람은 정말 파렴치한이다."
▪ 거짓말을 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때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피해를 입히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파렴치한"이라는 말이 적합합니다. 특히 이 경우는 공공연하게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왜곡하면서도 그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상황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예시: 자신의 거짓말이 밝혀졌는데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 사람은 파렴치한이다.

파렴치한의 예는 실제 사회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는 매우 다양한데, 그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 부동산 투기, 횡령, 사기 등으로 부를 쌓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
▪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 힘없는 사람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는 이들.
▪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거나, 문제를 덮으려는 이기적인 사람.

7. 
'파렴치한'은 사회적, 도덕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사람을 묘사할 때 쓰이는 강력한 비난의 표현이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는 부정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의 인격과 양심에 대한 깊은 회의를 드러낼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지식과 경륜이 늘고 인격이 높아질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무식이 늘고, 절제하지 않으면 탐욕이 늘며, 성찰하지 않으면 파렴치만 늡니다. 나이는 그냥 먹지만,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습니다."(전우용) 나이를 먹을 수록 공부를 하며 배워야 한다. 그래야 노인이 아니라, 어른이 될 수 있다.

8. 
“네 젊음이 네 노력의 보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과오에 의한 것이 아니다.” (박범신, <<은교>>)  “나이 든 사람의 비극은 그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전히 젊다는 데 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가 했던 다음 말이 즉각 소환되었다. "파렴치(破廉恥)함이란 모든 것의 가격만 알고, 가치는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모두들 '돈 돈' 하며, 자신의 가치를 판다. 몇 가지 질문들을 해본다.
▪ “몇 살이세요(How old are you)”라고 묻지 말고 “몇 살로 느끼세요(How old do you feel)”라고 물으면 웃기는 걸까? 
▪ 얼마나 늙어야 진짜로 늙은 걸까? 
▪ 내 나이는 진정한 나를 반영하는 것일까? 
▪ 나는 몇 살로 살아야 하는 걸까? 
▪ 이름과 성별도 바꿀 수 있는 시대인데 스스로 나이를 결정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9. 
삶을 만끽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다. 세상은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만큼만 보여준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재미 투성이'인 것이다. 오래 살았다고 나이가 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꿈을 저버릴 때 나이가 드는 것이다. 다시 열정을 불태우리라.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만들지만, 열정을 포기하는 것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그러니까 열정을 잃고 사는 사람이 최고로 늙은 사람이다. 삶의 열정에는 마침표가 없다. 


늙어가는 길/윤석구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었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못지않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아름답게 걸어가고 쉽습니다. 

10.
우리는, 정신차리지 않고 방심하면, 자신의 과거에 축적된 세계관이란 렌즈로 주위를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가치를 나름대로 측정한다. 자신의 시선을 객관적이며 온전한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의 인식체계의 노예가 되어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특히 우리는 세상을 쉽게 둘로 나눈다. 왜냐하면, 그런 구분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늘 변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투스가 한 말이 지금도 혜안을 준다. 그가 한 말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잘 알려진 라틴어 문장이다. Panta chorei ouden menei. 모든 것은 변하고 그대로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어로 말하면 이렇다. Everything changs, and nothing remains still. 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한다. 생로병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며 변한다. 서양 철학과 종교는 이상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였다. 그러한 구분은 우리가 사유하는데 편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생각을 혼탁하게 만들어왔다. 나는 이 두 세계를 품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 한문 명(明)자를 가지고 늘 깨어 있으려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밝을 ‘명(明)'자이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자를 풀이하면, 해(日)와 달(月)이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안다고 하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안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외치다 죽은 이유를 난 알겠다. '명'자는 그런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 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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