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구성하는 4 가지 기둥이 있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8일)
<<역경>>을 구성하는 4 가지 기둥이 있다. 제일 먼저, 괘상(卦象)이다. 64개의 괘의 모양이다. 이 괘상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하괘와 상괘에 부여된 상징체계의 의미, 하괘와 상괘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많은 명제를 지어낼 수 있다. 그 다음은 괘명(卦名)이다. 그 전체를 지시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괘상 전체에 주어지는 판단의 언어를 괘사(卦辭) 혹은 단전(彖傳)이라 한다. 여기서 '단(彖)'은 판단(jugement)의 의미라 한다. 그런데 한 괘는 반드시 6효로 구성되어 있다. 6효는 반드시 아래에서 위로 진행된다. 양효는 9라는 숫자로 표기되고, 음효는 6이라는 숫자로 표기된다. 처음 아랫자리는 '초(初)'라 하고, 마지막 윗자리는 '상(상)'이라 한다. 그 방식은 그림과 같다.
이런 식으로, 64개의 괘상(卦象)이 있고, 그 괘상을 지칭하는 괘명(卦名)이 있다. 그리고 64개의 각 괘마다 괘상 전체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괘사(卦辭=단사, 彖辭)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64괘를 구성하는 384(64*64)개의 효에 따린 효사(爻辭)라는 것이 있다.
<<주역>>의 각 괘는 아주 짧고 상징적인 한 편의 이야기이다. 20번 째인 <관(觀)괘>의 경우를 가지고 읽어 본다. 이상수의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에서 알게 된 것이다.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하괘는 땅이고, 상괘는 바람이다. 딸이 아래에 있고, 바람이 위에 있다. 그래 '풍지관(風地觀)'이라 한다. 괘상은 '땅 위를 쓰고 가는 바람'이다. 괘명은 '관(觀, 바라봄)'이다. 그리고 이 괘의 큰 줄거리 괘사(卦辭)는 "관(觀)은 관이불천(盥而不薦)이면 유부(有孚)하여 옹약(顒若)하리라"이다. 현대적 우리 말로 옮기면, '제사를 드릴 때 손을 씻고 난 직후, 아직 제물을 바치기 전, 처음 시작할 때의 경건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미더움이 있어서 바라보는 이들이 마음을 다해 우러러볼 것이다.'
이 괘의 상세한 줄거리를 효사(爻辭)라 한다.
- 初六·초육: 동관(童觀)이니 소인(小人)은 무구(无咎)요, 군자는 인(吝)이리라. '어린 아이처럼 바라보니, 소인이라면 허물이 없을 것이나, 군자라면 어려워 질 것이다.
- 六二·육이: 규관(闚觀)이니 이여정(利女貞)하니라. '문틈으로 엿보듯 바라보니, 여인의 몸 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에는 이로울 것이다.'
- 六三·육삼: 관아생(觀我生)하여 진퇴로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거나 물러난다.'
- 六四·육사: 관국지광(觀國之光)이니 이용빈우왕(利用賓于王)하니라. 나라의 빛을 바라볼 수 잇는 사람이니, 임금이 손님의 예우로 대하는 신하로 쓰이면 이로울 것이다.
- 九五·구오: 관아생(觀我生)하되 군자면 무구(无咎)리라.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니, 군자라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 上九·상구: 관기생(觀其生)하되 군자(君子)면 무구(无咎)리라. 그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니, 군자라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이 <관괘>는 세상과 운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주제이다. 왜 바람이 바라봄과 연결될까? 경치를 볼 때 낮은 곳보다는 높은 곳에서 보아야 시야가 트이고,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바람은 노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또한 바람은 세상 구석구석 어디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온 세상을 구석구석 두루 훑고 지나가는 바람의 눈으로 세상을 가장 잘 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바람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땅 위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바라봄'을 상징하는 상이 되었다.
<관괘>에는 내가 세상을 보는 문제도 나오지만, 거꾸로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문제도 나온다. <관괘>의 괘사는 "제사를 드릴 때 손을 씻고 난 직후, 아직 제물을 바치기 전, 처음 시작할 때의 경건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미더움이 있어서 바라보는 이들이 마음을 다해 우러러볼 것"이라고 했다. 옛날 사람들에게 제사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괘사의 메시지는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대한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제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손을 씻는 의식을 한다. 이때는 누구나 매우 진지하게 제사에 임한다. 손 씻는 의식은 초심의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제사인지 잊어 먹고 잡념과 잡담에 빠진다. 만약 내가 지금 하는 일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게 초심을 잃지 않고 실천한다면, 세상도 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을 리 없는 거다.
그리고 효사의 각 괘를 읽는 방법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관괘>의 경우 밑에서 네 번째까지는 음효이고, 다섯 째와 맨 위는 양효이다. <관괘>의 괘사는 내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인데 반해, 효사는 모두 내가 세상을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1) 초육(初六)의 '어린 아이처럼 바라본다("童觀, 동관").' 여기서 어린 아이의 눈은 천진함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성숙하지 않은 눈이다. 어린 아이는 세상과 운명을 아직 잘 모른다. 책임과 의무도 잘 모른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는 세상을 정확하고 용기 있게 바라보기가 어렵다. "동관", 어린 아이처럼 바라 본다'고 할 때 어린 아이의 눈이란 나이가 어린 사람의 눈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원숙하게 볼 수 없는 눈을 말한다. 이런 눈은 늘 보아야 할 핵심을 놓친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볼 경우, "소인(小人)은 무구(无咎)요, 군자는 인(吝)이리라" 했다. 다른 사람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칠 일이 없는 소인이라면, 크게 허물이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리더 노릇을 해야 하는 군자가 이렇게 성숙하지 않은 눈으로 본다면 그건 곤란하다. 자신과 공동체가 함께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요즈음의 누구 생각이 난다.
참고로,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정신'과는 좀 다른 관점이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사자의 정신에서 아이의 정신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니체의 유명한 ‘인간 정신 발달의 3단계’이다.
① 낙타의 정신: 낙타는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아무런 불만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 나아가는 동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낙타는 인내와 순종의 대명사이다. 그러니까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은 사회적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에 대한 고뇌도 하지 않은 채 기존의 사회가 정해준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삶을 ‘세상 사람의 삶(자기를 상실하고 세간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 빠져 있는 삶’)이라고 하며, 니체는 ‘말세인의 삶(밑바닥까지 전락한 인간의 삶)’이라고 한다.
② 사자의 정신: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③ 아이의 정신: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산다.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삶을 유희(놀이)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는 놀이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다. 삶의 의미를 물을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그런 물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2) 육이(六二)의 '엿보는 눈("규관, 闚觀")이다. <<주역>>이 만들어지던 시절의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여성은 대문을 활짝 열고 세상을 볼 수 없었고, 반쯤 열린 규방의 문 뒤에 숨어서 세상을 보아야 하는 존재였다. 문 뒤에 숨는다면 세상의 구설수로부터 안전할지는 모르지만 실상을 제대로 볼 수는 없다. 엿보듯 바라보는 사람들은 비평만 하는 사람들과 닮았다. 힐끔 본, 정확하지 않은 판단이 비극을 부르는 경우는 적지 않다.
(3) 육삼(六三)의 반성적으로 보는 눈("관아생, 觀我生")이다. 우리의 안목이 좀 더 온전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반성이다. 어린 아이처럼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엿보는 것처럼 불충분하게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 반성은 스스로를 솔직하게 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거나 물러날 것'이라 한 것은 바로 이런 말이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란 나의 행위이다. 나에게 그보다 더 솔직하고 명확한 것은 없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나 고통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자기 욕망을 솔직히 바라보고 자기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과 운명을 지혜롭게 볼 수 있다는 거다.
어쨌든 눈이 어두워도 보이지 않지만 마음이 어두워도 보지 못한다. 성숙하게 세상과 운명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을 다 보지 못한다. 어떤 이의 운명에 불고 잇는 역풍은 항해에 어려움이 따를 것에 대비하라는 뜻이다. 항해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아니고 항해를 포기하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가 <<주역을 읽는 이유는 인생의 여행길에 불어올 순풍과 역풍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대담한 눈으로 폭풍우 휘몰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항햬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겨 원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주여>>에서 잘 될 거라고 해도 그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순풍일 뿐이다. 순풍이 불어도 내가 닻을 끌어올리고 돛을 활짝 펴 항해를 시작하지 않으면 어떤 좋은 일도 저절로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아런 식으로 <<주역>>을 읽으면 된다.
오늘 산책 길에서 만난 사진이다. 바람은 찬데, 봄이 가까이 왔음을 느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세상이 수상(殊常)하다. "봄이여 빨리 오라", 오늘 공유하는 시구처럼. 총선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역경>>의 기본 개념들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간다.
봄을 위하여/천상병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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