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모든 아름다움과 의미는 '디테일(detail)'에 숨어 있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8일)
어제 우리는 성인, 자유인은 "무위(無爲)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고, 만물이 잘 자라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자신이 시작하도록 했다고 하지 않고(또는 참견하지 하지 않고), 만물을 낳아 잘 살게 해 주고도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으며, 무엇을 하되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룬 공에 머물면서 자기가 이룬 거라고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그 공 위에 자리 잡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노자적의 삶의 지혜이다. 여기서 질문을 해야 한다. 누군가 우리에게 "왜 이런 '무위'를 행하여야 하는 가" 라고 묻는다면, "바로 자연이 그러하니까", 또는 "자연의 원칙을 모방하여"라고 대답하면 된다. 그래 제3장으로 넘어가려고 하다가, 오늘 아침 제2장에 더 머무른다.
노자가 보는 세상의 모습을 <<도덕경>> 제2장 앞 부분에서 엿볼 수 있다.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것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려운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서양의 언어로 세례를 받은 나에게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씩 궁금한 것을 풀어 본다.
① "천하(天下)"는 말 그대로 하면 '하늘아래'인데, 천지(天地, 시, 공간의 우주)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우주를 가리키지 않고 인간이 사는 세상(the society)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통 '천하'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 즉 "보통 사람들"을 가리키다고 도올은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상식을 실체화 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그런 차원에서, "천하개지미위미"를 해석하면,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만 알고 있다"가 된다. 그런데 노자는 "그것이 바로 추함일 뿐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정의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똑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흥이 다르다. 아름다움을 100만큼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50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마음의 그릇이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름다움의 아름다움됨만을 인정한다. 이것은 아름다움이 실체화되는 경향을 내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곧바로 세상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아름다움이라고 여기는 것이 곧바로 추함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아름다움, 미(美)의 반대 개념을 '추함'이라 말한다. 그런데 노자는 '추함'을 나타내는 '추(醜)'로 되어있지 않고, 현대어로 보면 윤리적 개념에서 쓰이는 "악(惡)으로 되어 있다는 게 인상적이다. 도올은 이 '악'을 '미워할 오", '부끄러워할 오'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어로 말하면, the Beautiful과 대립되는 것으로 the Ugly라고 한다. 우리는 'ugly'를 "꼴불견"이라 말한다. '꼴이 너무 사나워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부끄럽거나 창피한 줄 모르는 경우이다. 마음의 문제이다. 한자 사전에서는 '오'를 '욕설할 오'라고 말한다. 욕하고 싶은 마음이다.
도올도 '오(惡)'자에 마음 심(심)이 들어가 있으니, 그것은 악이라는 실체를 지칭하는 의미보다, 미움이나 증오나 기피를 나타내는 마음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일상에서 우리가 말하는 혐오(嫌惡), 증오(憎惡), 수오(羞惡), 오조(惡阻, 입덧), 오심(惡心, 욕지기) 등에서 알아 볼 수 있다.
동아시아의 사유 체계 속에는 선(善)과 악(惡)의 대자적 개념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한다. 도올은 말한다. "지금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싸울 때에 "착한 아이"에 대하여 "착하지 못한 아이"라는 대립 개념은 있을 수 있으나, 곧바로 "악한 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곧바로 "배드 씨드(bad seed)"니 하여 악을 실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장자가 말하는 진인(眞人), 참된 인간은 무엇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대립, 상극, 이원론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이것도 저것도' 하는 하나 됨의 경지, 막히고 걸리는 것 없는 통전적(統全的)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한마디로 유연하고 탄력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누가 무엇을 주장한다는 것은 수많은 의견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여긴다. 그러므로 진인의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 처럼, 선오(善惡, 좋고 나쁨)도 구분이 아니라, 양의 정도로 보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누가 어떤 일을 실수하여도 그의 존재 전체의 실수가 아니다. 그저 수많은 존재의 정체성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사유를 할 때, 우리는 오히려 내적 평화를 회복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한다. 그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개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런 구분은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중요한 가치와 해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해서, 그것은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만일 A라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그는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서 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은 것이다. 단지 51% 대 49%일 수도 있다. 또는 B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길 힘쓰고, 선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두개의 대립되는 가치의 정도와 경중을 깊이 관찰하고 측정하는 과정을 '쎄오리아(theoria)'라고 했다. 이를 우리 말로 하면 '관조(觀照)'이다. 이것은 사물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어제의 관습대로 보지 않고, 그 대상 자체로 보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 그리스어는 영어의 '씨오리(thory)'가 된다. 한국 말로는 '이론(理論)'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론은 '한참보기'란 인내를 통해, 그 대상 그 자체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섬광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항상 제 3자가 되어 관찰하는 행위를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생의 모든 아름다움과 의미는 '디테일(detail)'에 숨어 있다. 그런 디테일을 보려면 여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눈 안에 들어온 사물과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된다.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사진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지난 연말 제주에서 보낸 그 때가 그립다. 거기서 본 윤슬이 생각나, 맹문재 시인의 시를 오늘 아침 공유한다.
아름다운 얼굴/맹문재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 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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