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 31. 16:37

309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31일)

오늘은 금요일로, 긴 연휴 후에 일상으로 복귀하는 날이다. 긴 연휴 기간에 마가 스님의 <<알고 보면 괜찮아>>이라는 책을 꼼꼼하게 읽었다. '괜찮아'는 말이 좋다. 프랑스어로는 '싸바'이다. 가까운 사이끼리 하는 말이고, 처음보는 사람 끼리는 '브 잘레 비엥(Vous allez bien?)''이라고 인사하며 묻는다. 여기서 'aller'라는 동사가 영어로는 'go'이고, 한국어로 '가다'라는 말이다. 쉽게 '걸어 가다'이다. 사는 것은 그냥 걸어가는 거다. 어떤 사람은 프랑스어 'aller(=go)'를 '작동하다'로 읽는다. 그러니 친한 사람끼리 하는 인사인 'ça va?'는 '일이나 기계 따위가 잘 작동되는가'란 뜻이라는 거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에 적용하면, 사는 게 순탄하게 잘 나아가느냐'로 읽을 수 있다. 그냥 쉽게 말해 '괞찬아?' 아닐까? 그런 차원에서 마가 스님의 책 제목 <<알고 보면 괜찮아>>가 다시 읽힌다. 우선 '괜찮다'는 말에 대해 좀 길게 생각해 본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일상을 걸어가는 거다. 올해도 나는 새롭게 주어진 365개의 하얀 도화지에 부지런히 점을 찍으며 어떤 상황에 서든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러면서, 나는 또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존재적 경험과 배움의 기회를 갖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고, 다시 말하면 노골적으로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일상을 지배하면서 장기적으로 '좋은 삶'을 살아가면 된다. 삶은 걸음이다.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괜찮다. 산다는 것은 어떤 약속을 지키는 것의 연속이다. 그렇게 살다가 그날 주어진 일을 하다가 죽는 거다. 특별한 삶, 특별한 죽음은 없다.


그냥 걷기만 하세요/법정

한 걸음,
한걸음 삶을 내딛습니다
발걸음을 떼어 놓고 또 걷고 걷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짊어지고 온 발자국은 없습니다

그냥
가버리면 그만인 것이
우리 삶이고 세월입니다

한 발자국 걷고 걸어온 그 발자국
짊어지고 가지 않듯
우리 삶도 내딛고 나면 뒷발자국
가져오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냥 그냥 살아갈 뿐
짊어지고 가지는
말았으면 하고 말입니다

다 짊어지고
그 복잡한 짐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냥 놓고 가는 것이
백번 천 번 편한 일입니다

밀물이 들어오고
다시 밀려 나가고 나면
자취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애써 잡으려 하지 마세요

없어져도
지금 가고 있는 순간의 발자국은
여전히 그대로일 겁니다

앞으로 새겨질 발자국
삶의 자취도
마음 쓰지 말고 가세요

발길 닿는 대로 그냥 가는 겁니다 
우린 지금 이 순간
그냥 걷기만 하면 됩니다


1. 
'괜찮다' 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과히 나쁘지 않고 무난하다", "문제나 말썽, 또는 탈이 될 것이 없다" 이다. 일상에서는 '괜찮다'라는 말은 ‘무방하다’, 또는 ‘별로 나쁘지 않다’와 같은 말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전자의 예로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후자의 예로는 “모양이 괜찮다” 정도가 있다. ‘괜찮다'는 언뜻 봐도 ‘괜’과 ‘찮다’가 결합된 말 같다. 이중 뒤 ‘찮다’는 우리말 형용사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귀찮다’, ‘당찮다’, ‘점잖다’ 등에서 비슷한 예를 만날 수 있다.‘귀찮다’는 ‘귀치 않다’가 본래 말로 ‘귀하지 않고 성가시기만 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당찮다'는 ‘당치 않다’가 줄어든 말로 ‘합당하지 아니 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밖에 ‘점잖다’는 ‘젊지 아니 하다’가 줄어든 말이다. 이것이 변해 지금은 ‘언행이 야하지 아니하고 묵중 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면  ‘괜찮다’도  ‘關係치 아니 하다’가 줄어든 말이 아닐까? 따라서 ‘괜찮다’ 할 때의 ‘괜’은 한자 ‘關(관)’이 어원임을 알 수 있다. '관계치 않는다는 것'은 '나는 그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 '음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즉 '괜찮냐'고 묻는 것은 '그 일에 마음이 쓰이냐'는 것이고, '괜찮다'는 답은 '마음 쓰지 않는다' 정도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설은 '괜치 않다'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인데, '괜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아무 이유나 실속이 없다'이다. 그러니 '괜치 않다'는 '뭔가 이유나 실속이 있다'는 뜻이 된다. 넘어진 사람에게 '괜찬냐'고 묻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어'라고 넘어진 이유를 묻는 표현이 된다. 어쨌든 '나와 이해 관계가 없다는 것은 무방한 것이나 별로 나쁘지 않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괜찮다’라는 형용사가 파생된 것이 아닐까? 이처럼 말을 에둘러서 표현하는 것을 우리 문법에서는 ‘완곡법’ 또는 ‘우언법’(迂言法)이라고 한다. 이는 긍정적인 사실을 부정어를 동반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비난하다’ 대신 ‘칭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이런 예에 해당한다. ‘같잖다'라는 말도 ‘같지 않다'가 줄어든 말로, ‘그럴 싸 하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2. 
한발짝 더 나아간다. 요약하면, '괜찮다'는 '나쁘지 않다', '좋다', '보통이다', '정상이다', '바람직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일에 뭔가 이유나 실속이 있는 상태' 또는 '마음 쓸 일이 없는 상태'를 '좋음', '정상', '보통', '바람직함'의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다. '괜찮다'는 말로.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보다도 나 자신의 판단을 더 우선한다. 내가 경험한 어떤 일이라도 내가 마음을 쓰지 않으면(관계치 않으면) 별 일이 아닌 게 되고, 내가 마음을 쓰면 중요한 일이 되는 거다. 우리에게 '괜찮다'는 말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어떤 일이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관계 없이 '내가 마음 쓰지 않으면' 그 상태는 괜찮은 것이다.

3. 
북한에서는 '괜찮아요' 대신 '일 없시요'라는 말을 쓴다. '네 일 아니니 상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별 일 아니라'는 뜻이다. 보=ㅓㄹ어진 일이 중요하지 않거나 마음 쓸 필요가 없는 경우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영어로는 'Are you OK?'이다. OK'의 유래는 기자들이 쓰던 은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1830년대 기자들은 장난스러운 이니셜로 기사를 쓰는 유행이 있었다고 한다. All Correct(모두 옳다)를 oll Korrect로 바꿔서 약자로 OK를 쓰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 외도 여러 설이 있다. 어쨌든 미국인들은 모든 것이 올바른(All Correct) 상태가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프랑스어는 'ça va?'이다. '잘 작동하나(움직이나/먹히냐)?'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소 기능적이다. 뭔 가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느냐가 괜찮은 상태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4. 
나는 늘 '그만하면 괞찮다'는 마음을 지니고 살려고 한다. 이건 '평범하고자 한다.',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이다. 그러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황금 중용(The golden/happy mean)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란 헛된 야망의 실현이나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타인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다. 떠들썩한 성공 뒤에 숨어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려는 의지이다.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의 아름다움은 판단을 유보하고 삶이 흘러가는 것을 관찰하며, 결과보다는 과정에 관심을 두며 사는 거다.

5.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대신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극단을 멀리하는 거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지 말고, 중용을 추구하는 거다. 소박하게 지낸다. 드높은 소나무는 바람에 자주 흔들리고, 가장 높은 탑은 더욱 육중하게 무너져 내리며, 산꼭대기는 번개를 맞게 되는 법이다. 순풍이 불어 돛이 부풀어 오를 때 돛을 다시 접을 수 있어야 한다. 평안한 삶은 무기력한 삶이 아니다. 본능적 과시욕을 자제하려면 용기와 명철한 정신이 필요하다.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이다.

6. 
마가 스님의 <<알고 보면 괜찮은>> 이야기를 하려 다가 여기까지 왔다. <여근 글>에서, "어떻게 하면 삶이 편해질까?"라고 물으면, 스님은 "지혜와 자비를 기르면 됩니다"고 말한다 했다. 여기서 지혜는 "'지금-이 순간, 자신이 하는 것을 알아 차리'는 것이라 했다. 자주 말하지만, 붓다 가르침의 핵심은 지혜와 자비, 다르게 말하면, 깨달음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엇을 깨달어야 하는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집착이 일으키는 고통("일체개고, 一切皆苦")을 벗어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른다는 진리, 사성제(四聖諦)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자비, 즉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를 크게 요약하면, 깨달음과 사랑, 다르게 말하면, 깨달어 지혜를 얻고(사실 가치), 자비를 베푸는(판단 가치) 것이다. '깨닫는다'는 지혜는 나 자신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거다. 우리는 생로병사, 몸이 병들거나 늙거나 죽음에 이르게 되면 모두가 무용지물이다. 결국 생로병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해탈, 열반적정이다. 우리는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러니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해 건강을 회복하고, 나이 먹어 불편해지면 감수하며 적응해 살아간다.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면 전혀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으니 새로운 몸을 구하고자 한다. 이것이 윤회, 환생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구할 필요 없어야 열반에 이르고, 다시 원하지 않으니 '생사해탈'이 되는 것이다.

7. 
우리 자신을 잘 보면,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은 다르지만 그 느낌을 아는 주인인 나는 동일하다. 그러니 마음의 주인인 나의 입장에서 보면, 굳이 싫어함과 좋아함을 구별해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게 깨달음이고, 우리가 말하는 부처님의 지혜이다. 사실판단이다. 이런 식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떤 조건이든지 변하지 않는 나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는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고, 그 방법은 공덕(功德, 사랑과 나눔)과 지혜(깨달음)를 통해 본래 누구나 가장 완전하고 영원한 즐거움인 해탈 열반을 갖추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8.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관계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깨우친다면, '너는 또 다른 나'라는 생각이 절로 싹트게 된다. 여기서 지혜가 출발하는 거다. 그러면 타자에게 지극한 연만을 당연하게 느낀다. 여기서부터 '사무량심', '자비희사'가 시작되는 거다. 연민(compassion)을 말하다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사무량심(捨無量心)이 소환된다. 붓다는 인간 마음의 가장 숭고한 상태를 산스크리트어로 "브라흐마비하라"라 했다. 숭고함이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의 선과 악을 넘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한없는 경외심이 넘치는 단계다. 숭고함의 의미는 '셀 수 없는/경계가 없는'이다. 이것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셀 수 없는 마음'이 된다. 나는 이것을 '사랑의 4단계 태도: 자비희사'라고 한다. 계단을 오를수록 더 어렵다.
 
(1) 자(慈)=마이트리(maitri, 산스크리트어)=헤세드(hesed, 히브리어)=아가페(agape)=참된 사랑.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을 해야 한다.
▪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사랑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이 사랑의 초점은 상대방에게 있다. 만일 그 초점이 자신에게 있고 상대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 '자'는 상대방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깊이 살펴야 상대방에게 행복을 주려는 마음이다. 한자 '자(慈)'를 해석하면, 나와 상대방의 마음이 가물가물(玄)해져, 하나가 된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의 상태를 의미한다. 마이트리, ‘자’는 소극적으로 내가 타인을 내 자신처럼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 환경을 조성하는 작업까지 포함하는 큰마음이다.
▪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기꺼이 주는 마음이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숨은 노력이자 배려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를 향한 마음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한없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 인류는 그 순수한 마음을 어머니로부터 부여 받아 각자의 심연에 간직하고 있다. 교육이란 이 심성을 체계적으로 일깨우는 자극이다.
 
(2) 비(悲)=카루나(karuna)=compassion(연민).
▪ ‘비’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태도이다.
▪ 더 나아가 상대방이 당한 상처나 고통을 함께 슬퍼할 뿐만 아니라, 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거나 제거하려는 마음과 행동이다.
▪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비참한 상황에 처한 낯선 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비'는 그런 감정 이상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동일하게 느껴, 그 상대방을 그 고통으로부터 탈출 시키고 싶은 마음과 행동이다. 영어로 ‘컴페션(compassion)'이다. 이 말은 상대방의 고통(passion)을 기꺼이 함께(com) 나누려는 마음이다.
▪ ‘카루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걱정, 근심, 슬픔,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느낄 수 있도록 상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관세음보살의 마음은 대자심이 아니라, 대비심이다.
▪ 상대방의 슬픔에 동참한다.
▪ 상대방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하고 조치를 취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 옆에 앉아 말없이 그의 슬픈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3) 희(喜)=무디타(mudita)
▪ '희'는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행복처럼 느끼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행복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줄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이다.
▪ 그리고 상대방이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노력이다. 실제는 카루나보다 더 힘들 수 있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겠는가? 상대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다.
▪ 그런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 아상(我相, 나가 있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까운 친구, 동료 혹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의 성공을 시기나 질투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면, 무디타란 숭고한 감정을 소유한 자이다.
 
(4) 사(捨)=우펙샤(upeksha)
▪ ‘사’는 버린다는 것으로, 마음에 집착이 없고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수련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주위에 일어난 유혹에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정진하는 의연함과 자신감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아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갈 뿐이다. 고생 끝에 산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볼 때 느끼는 그 감정이다. 눈앞에 탁 트인 광경이 펼쳐지는 이유는 정상에 올라온 사람의 시선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마음의 태도이다.
▪ 그리고 사람의 배경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 특권 의식이나 선민 의식을 없애는 것이다. 그냥 무덤덤하게 대하는 마음은 아니다. '자비희(慈悲喜)'를 모든 존재들에게 평등하게 내는 마음의 태도이다.
 
이 '사무량심'으로 무장한 사람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속에 쾌적을 유지하는 자이다. "요가 수련자의 마음은 자, 비, 희, 사의 실천을 통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쾌적하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사실 어떤 사건이 기쁘고, 슬프고, 혹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없다. 이런 감정들은 그 사건에 대해 나의 반응일 뿐이다.
이런 태도를 유지하면, "알고 보면, 괜찮아'가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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