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절벽 끝으로 오라." 그래서 나는 갔고, 신은 나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나는 날아올랐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 30. 10:15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27일)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라 한다. 어느 날 그녀는 누에고치에서 번데기가 나방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바늘구멍만한 틈새에서 몸 전체가 비집고 나오려고 한나절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안쓰러운 생각에 가위로 구멍을 넓혀 주었다. 커진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온 나방은 공중으로 솟아오르려고 몇 번을 시도하더니 결국 날지 못하고 땅바닥을 맴돌았다. 그녀는 나방이 작은 틈새로 나오려고 애쓰는 시련을 거치면서 날개의 힘이 길러지고 물기가 알맞게 말라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고통을 싫어하고, 기쁨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고통이 없고 기쁨만 있다면 인간의 내면은 절대 여물 수 없다. 나방처럼 난관을 헤쳐가는 과정에서 생존의 힘을 기를 수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법이다.

다음은 류시화 시인의 책,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서 읽은 거다. 신이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나는 말했다. "할 수 없어요. 두려워요." 신이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할 수 없어요, 추락할 거예요!" 신이 다시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그래서 나는 갔고, 신은 나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나는 날아올랐다.

다음은 13세기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신비주의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가 썼다는 이 시이다.

이 문제 많은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걸으라.
중요한 보물을 발견하게 되리니.
그대의 집이 작아도, 그 안을 들여다보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밀을 찾게 되리니
나는 물었다.
"왜 나에게 이 것 밖에 주지 않은 거죠?"
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 것 만이 너를 저 것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길 끝에 있는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모든 작가들이 진정한 작가가 되기 전에 미완의 작품을 수없이 완성해야 하고, 모든 새가 우아하게 날 수 있기 전에 어설픈 날개를 파닥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정을 거치려 하지 않고, 우리는 삶에게 묻는다. "왜 나에게는 이것 밖에 주어지지 않은 거야"하고.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답한다. "이 것만이 너를 네가 원하는 것에게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삭임을 듣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과의 내적인 논쟁에 시간을 허비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신이 결코 팔을 갖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새의 몸에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지금 '절벽 끝"에 몰려 있다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갑자기 절실하게 만든다. 그 중요한 순간에 생명력이 솟고 우리는 신이 토해 내는 숨결이 된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칠 곳은 없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하늘을 만들고 자신도 몰랐던 날개가 돋는다. 무엇인가 절실하게 갈구한 모든 순간이 날개였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새는 죽은 새다. 모든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개에 메단 돌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의 여행을 방해한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 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가는 실이라도 묶인 새는 날지 못한다. 새는 자유를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 자체가 자유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데려간다. (류시화 산문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새만 되돌아보지 않는다. '쟁기를 잡았으면 되돌아보지 말라'는 금언도 있다. 운전대 잡은 사람은 뒤를 보면서 앞으로 갈 수는 없을 터이다. 이처럼, 멋진 삶은 뒤돌아보자 말고, 더 나아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무겁다. 버겁고, 굼뜨며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다. 빙하기가 닥쳐왔을 때 그 거대한 지배자 공룡은 자신의 크기 때문에 멸종했다는 설도 있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고 소수였던 포유류들은 그 작은 몸집 때문에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거라 한다. 실제 내 주변을 보면, 많이 가지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혼자 생각에 저 정도 가졌으면 기쁘고 행복하기만 한 삶을 살며, 남과 나누며 살아도 될 법한 데 신기하게 그러지 못하다. 어쨌든 가지고 가지지 않고 그러니까 마음이 가난한 것은 소유한 재화의 양의 문제가 아니다. 그 집착의 정도가 문제일 뿐이다.

나는, 류시화 시인처럼, 가벼움을 경박함으로 여기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진지하지 못하고, 가벼운 모습은 속물근성으로 치부하곤 했다. 류 시인도 "가벼움은 곧 의미와 깊이의 부족"으로 보고, "가벼운 상승 기류를 타고 날아가지 않도록 밤마다 묵직한 번민의 돌로 늘러 놓았다"고 한다. 그래 시인은 "삶이란 진지하고 숙연한 과제인데, 세상은 경박한 소란으로 가득하고 꾸며낸 깊이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시인의 앞에 오면 심각해지고 무거워졌으며, 시인도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만 주위에 모이게 되었다 한다. 나도 다소 그런 면이 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처럼 가벼울 수 있어야 한다." (폴 발레리) 그러니까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이 필요하다. 그래야 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새는 뼛속에 공기가 통하는 공간이 있어서 비행할 수 있듯이 존재 안에 자유의 공간이 숨쉬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박한 가벼움이 아니라 자유를 품은 가슴의 가벼움이다. 그래야 우리는 날 수 있다. 날 수 없다면 정신적 자유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온갖 생각들로 정신을 무겁게 만든다. 그래야 깊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다. 양쪽 어깨에 날개를 달고 있다 해도 마음의 유연함이 부족하면 기쁨이 사라진 삶을 살 뿐이다. 오늘 아침 사진 무거운 마음으로 낯선 거리를 산책하다 만난 조형물이다. 나에게 필요한 날개를 그에게도 달아주고 싶었다.

날개/반칠환

저 아름다운 깃털은
오솔오솔 돋던 소름이었다지
창공을 열어 준 것은
가족이 아니라 무서운 야수였다지
천적이 없는 새는 다시
날개가 사라진다지
닭이 되고, 키위가 된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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