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자기 멋대로 살 수 없다.

308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27일)
1.
긴 설 연휴 기간 동안, 동양 고전을 읽으면서 존재와 세계를 탐구하는 시간을 갖고, 내면의 힘을 더욱 키울 생각이다. 동아시아의 고전 중 <<주역>>의 핵심은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하는 것이 진리'라는 거다. 모든 게 움직인다. 예를 들어, 모든 현상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 이 리듬을 밟는 것이 법칙이다. 어쨌든 인간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통과 해야지, 봄, 여름, 여름, 여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공자의 주장은 "인(仁)"이다. "인"은 '어질고, 착하고', 이런 인간적 범위에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천지만물을 살리는 힘이다. 봄에 만물을 살리는 힘이다. 불교는 '이 무상한 세계 안에서 자아는 없다'고 말한다. '나'라고 해서 붙들 수 있는 실체, 고정된 어떤 욕망 그리고 '이걸 꼭 이루어야 된다', 이런 것은 없다는 거다. 그야말로 자아를 해체하는 지혜이다. 이렇게 해체하지 않으면 인간은 전쟁과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한다. 그 핵심이 자연의 리듬을 터득해서 변화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인", 불교의 "무상"과 "무아", 노자의 "무위자연", 이것이 공교롭게도 BC 5세기 경에 동시에 출현한 사상들이다. 이런 고전들과 접속해야 지혜를 얻어, 지식과 지성과 순환시킬 수 있다. 순환이 중요하다. 봄, 여름에는 무얼 갖고 싶어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열정을 가지고 무얼 하는 거다. 그러다가 가을과 겨울이 되면 이것들을 하나씩 덜어 내는 거다. 그래서 완전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은 삶에 대한 회한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상태, 그냥 죽음 자체로 충분한 거다. 이 것을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지혜의 인드라망'이라 표현했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지혜의 인드라망'과 접속해야 한다. 지혜의 파동에 접속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전을 읽는 것이 그중 하나의 방법이다. 이 '지혜의 인드라망', 다르게 말하면 '지혜의 앎'은 영성 세계이다. 그런데 그 세계는 지평선이다. 지평선은 달려갈 수는 있지만 도달하지는 못한다. 도달할 필요도 없다. 그냥 끝없이 묻고 또 물으면서 우리는 한걸음씩 가는 그 길이 앎의 지평선이다. 그 지평선에 접속할 때 지혜라고 하는 우주의 파동과 마주치게 된다.
2.
사실 우리는 자기 멋대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삶이 관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타인은 기쁨의 샘일 때도 있지만 우리 삶을 제한하는 질곡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을 조종하려는 충동이 우리 자신 속에서 스멀스멀 자리 잡을 때가 있다. 자기 의사를 타인에게 부과해 그가 내 뜻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는 '권력에의 의지'라 한다. 그 '권력에의 의지'는 분수를 모르기에 언제나 한계를 넘는다. <<성경>>은 이러한 과도함 혹은 오만함이 죄라 말한다. 죄는 남을 해칠 뿐 아니라 자기도 파괴한다. 여기서 서슴없음과 당당함은 자신을 강자로 여기는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이다. 이기심과 결합되면 몰염치함으로 변질된다. 몰염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3.
세상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인드라망'이라 할 수 있다. '인드라망'은 불교의 연기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로써 불교에서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드라(Indra)'는 본래 인도의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한역하여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한다. 신력(神力)이 특히 뛰어나 부처님 전생 때부터 그 수행의 장에 출현하여 수행을 외호(外護)하는 신으로 표현되고 있다. 바로 이 제석천의 궁전에는 무구한 구슬로 만들어진 그물(='인드라망')이 있다. 그물은 한없이 넓고 그물의 이음새마다 구슬이 있는데, 그 구슬은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 주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또 그 구슬들은 서로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물로서 서로 연결되어져 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스스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연결되어져 있으며 서로 비추고 비추는 밀접한 관계속에 있다. 또 이것은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간과의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다.
4.
인드라의 구슬/박노해
인드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술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
- 화엄경
작은 연어 한 마리도 한 생을 돌아오면서 안답니다
작은 철새 한 마리도 창공을 넘어오면서 안답니다
지구가 끝도 없이 크고 무한정한 게 아니라는 것을
한 바퀴 크게 돌고 보면 이리도 작고 여린
푸른 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구 마을 저편에서 그대가 울면 내가 웁니다
누군가 등불 하나 켜면 내 앞길도 환해집니다
내가 많이 갖고 쓰면 저리 굶주려 쓰러지고
나 하나 바로 살면 시든 희망이 살아납니다
인생이 참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참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한때는 씩씩했는데, 자신만만했는데,
내가 이리 작아져 보잘것없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작아진 게 아니라 큰 세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관계 그물이 이다지도 복잡미묘하고
광대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도 인생도 나도 생동하는 우주 그물에 이어진 작으나 큰 존재입니다
지금은 ‘개인의 시대’라고 합니다
우주 기운으로 태어나 우주만큼 소중한 한 생명,
한 인간이 먼저, 내가 먼저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 한 몸 바치는 것을 미덕으로 교육받아온
‘개인 없는 우리’에서
자유롭게 독립하여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
‘개인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세계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가
구슬처럼 빛나는 개개인을 하나로 엮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다라의 구슬처럼
지구 마을의 큰 울림을 만들어가는 주체입니다
새벽 찬물로 얼굴을 씻고
서툰 붓글씨로 내 마음에 씁니다
오늘부터 내가 먼저!
내가 먼저 달라지기
내가 먼저 인사하기
내가 먼저 정직하기
내가 먼저 실행하기
내가 먼저 손 내밀기
내가 먼저 돕고 살기
무조건 내가 먼저
속아도 내가 먼저
말없이 내가 먼저
끝까지 내가 먼저
5.
불교를 크게 요약하면, 깨달음과 사랑, 다르게 말하면, 깨달어 지혜를 얻고(사실 가치), 자비를 베푸는(판단 가치) 것이다. '깨닫는다'는 지혜는 나 자신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거다. 우리는 생로병사(生老病死), 몸이 병들거나 늙거나 죽음에 이르게 되면 모두가 무용지물이다. 결국 생로병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해탈, 열반적정이다. 우리는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러니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해 건강을 회복하고, 나이 먹어 불편해지면 감수하며 적응해 살아간다.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면 전혀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으니 새로운 몸을 구하고자 한다. 이것이 윤회(輪廻), 환생(還生)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구할 필요 없어야 열반에 이르고, 다시 원하지 않으니 '생사해탈'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잘 보면,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은 다르지만 그 느낌을 아는 주인인 나는 동일하다. 그러니 마음의 주인인 나의 입장에서 보면, 굳이 싫어함과 좋아함을 구별해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게 깨달음이고, 우리가 말하는 부처님의 지혜이다. 사실판단이다. 이런 식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떤 조건이든지 변하지 않는 나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는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고, 그 방법은 공덕(功德, 사랑과 나눔)과 지혜(깨달음)를 통해 본래 누구나 가장 완전하고 영원한 즐거움인 해탈 열반을 갖추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본다. 내 마음과 내 몸을 나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6.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이다. 그래 절 근처는 모두 등을 단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란 뜻이다. 원래는 등(燈)이 아니라 섬(島)이었다고 한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였는데, 한역하면서 섬이 등불로 바뀐 것이라 한다. 이것이 불교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다른 종교와의 차이이다. '나는 세상을 구제하는 자이므로 나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라. 그렇지 않다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불교는 우리 안에 있는 '불성(佛性)을 깨우치라' 말한다. 여기서 '불성'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마음'이다. 또는 '성품, 심성, 자성, 정신세계'라 할 수 있다. "법등명"보다 "자등명"을 먼저 말씀하신 것은 내가 아닌 바깥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에 의지하는 게 부처님 말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인간 존재의 무한한 능력을 그 분은 간파하신 것이다. 예수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리가 무엇이냐? 묻지 말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셨다. 비슷한 말이 아닌가? 반면 붓다는 어떤 말이 진리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승되어 온 것이라고 해서, 어느 권위자가 말했다고 해서, 세간에 널리 인식되어 있다고 해서 진리로 승인하지 마십시오. 깊이 사유하고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여 자유롭고 평온한 삶을 성취하면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십시오, 나의 말도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예수의 "진리가 너희를 편안하게 할 것"이라는 말도 이치에 맞게 살면, 편안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부처(붓다)는 영적 삶의 원형이고, 담마(진리)와 립바다(열반)의 화신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연등행사를 한다. 연등을 닮은 꽃인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진흙) 속에서 물들지 않는 깨달음의 연꽃을 피우라는 것이다. 연등을 밝히고, 내 안의 등불과 진리의 등불을 밝히고, 붓다 가르침의 핵심인 지혜와 자비, 깨달음과 사랑의 실천을 다짐한다.
7.
"차라리 혼자서 가라/ 어리석은 자와의 동행을 꿈꾸지 말라. 죄업을 벗고 집착을 떠나 숲 속의 코끼리처럼 혼자서 가라."<<법구경>>) 오늘 아침도 시 대신 <<숫타니파타>> 구절 일부를 공유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과 집착, 번민과 애착
그 모든 것을 집어 던지고
해탈의 진리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매 임을 버리고
매듭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는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려 가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되라'고 읽는다.
8.
'근기(根機)'라는 불교 용어가 있다. '근기'라는 말은 '무엇인 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끈기’라는 말도 바로 이 '근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 '근기'에는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氣)' 그리고 '하근기(下根機)'가 있다. '상근기'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면, '하근기'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근기', '상근기'로 올라갈 수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기'의 고비이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기'로 못 가고 심지어 '하근기'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기' 사람들을 우리는 일종의 '병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주변에서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기'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중근기' 일수록 더 하지 못한다. 이들은 관련된 서적을 잠깐동안 관심을 갖는 척하는 사람일 뿐이다.
9.
절에서 가끔씩 듣는 “성불(成佛)하세요"라는 말은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서 가장 이롭게 된 상태는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즉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다 성불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별도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려는 소망을 현실화하려고 끈덕지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기'가 탁월한 '상근기(上根機)'이다.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용기가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험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주인공이 되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 이야말로 정말 '상근기' 정도가 아니라 '최상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거사(居士)'라고 한다. 비록 스님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스님보다 치열하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근기(根氣)는 '근본이 되는 힘'이다. 이 근기가 두텁지 못한 사람, '중근기' 사람들은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과실 수확에만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다. 끝내 그런 이들은 결과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하며, 도량이 넓은 척할 뿐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중근기의 병자를 대량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살았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 정보 기술의 극대화로 '하근기'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 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자기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10.
그리고 성불하려면, 임제 선사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 되다”는 뜻이다. 진정한 주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곳이 주인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든지 자신이 주인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절에 들어가지 않아도 일상의 삶 속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생각을 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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