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정의로운 사회는 각 계급이 자기 본분의 역할을 담당하며 남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을 때 이루어진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 27. 10:10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사진: 구글에서 캡처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22일)

지난 1월 18일 이야기를 오늘 더 이어간다. 김기현 교수의 <<인간 다움>>에서 기원전 6세기경 헤라클리토스가 로고스를 철학적 주제로 등장시켰다 한다. 그는 로고스를 세계의 보편적 원리이자 인간의 지적 능력을 지배하는 원리로 이해했다는 거다. 우리가 말하는 '도(道)'와 매우 유사한 용도라고 할 수 있다는 거다. 그후 로고스라는 말은 때론 보편적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성찰하며 따지는 논증을, 때론 인간의 언어를 의미하기도 하며 점차 그 쓰임새를 넓힌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로고스는 '이성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어떤 믿음에 대해 또는 어떤 행위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유와 원리에 의해 그 믿음과 행위를 정당화할 것을 요청하고, 그에 답하는 능력으로 발전되었다는 거다. 그리스어로 '로고스(logos)'라는 말은 어원상 신들의 이야기인 미토스(mythos)와 대비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의미하게 된다.

로고스의 등장은 지적인 측면과 실천적 측면에서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자연계의 실제 모습과 관련된 진리를 파악하는 인식 능력, 다른 하나는 좋은 삶이란 무엇이며, 이러한 삶을 운영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규범을 알려주는 능력이다. 로고스, 즉 이성의 출현은 일반적 원리에 의해 현상과 행위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지적인 측면이 성장한 것 이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갖는다도 말했다.
-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원리를 파악하게 되었다.
- 동시에 자신의 능력으로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다.
- 신화에서 신이 말하는 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신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수동적이고 운명론적인 태도에서 벗어났다.
- 이성을 통해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적극적 관전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생각을 가장 강력한 형태로 제시한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어떤 저술도 남기지 않았으며 그의 철학은 플라톤의 저술 속에 인용으로 남겨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성찰 없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고 했다. 그 후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좋은 삶은 성찰을 통해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는 그의 생각의 계승한다.

플라톤은 영혼에는 서로 다른 세 영역이 있어 이들이 각기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본능의 부분으로 '욕망'의 영역 ; 쾌락적 본능; 배
- 명예를 사랑하는 부분으로 '기개(氣槪,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의 영역 ; 경쟁심 ; 가슴
-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으로 '이성'의 영역 ; 호기심 ; 머리

플라톤은 이론적, 실천적 영역 모두에 있어 지적인 탐구를 하는 것을 이성의 영역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할 때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가를 궁리한다는 거다. 그리고 위의 세 영역을 신체의 배, 가슴, 머리에 대응시킨다. 실제로 우리는 배고플 때 배를 만지고, 분통 터질 때 가슴을 친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할 때는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플라톤은 개인적 영혼에서 서로 다른 세 부분을 이야기하듯이, 사회적 차원에서도 세 계급을 이야기 한다.
- 식량과 생활용품이 공급되어야 한다. 이를 담당하는 것이 생산자 계급으로 욕망 충족을 위한 역할을 담당한다.
-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외부의 위협에서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군사 계급이 필요하다. 기개가 뛰어나 사람들이 이 역할을 담당한다.
- 생산과 안보를 조율하며 올바른 사회에 대한 지혜를 토대로 전체 사회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지도자 계급이 필요하다.

플라톤은 영혼 차원의 좋은 삶은 충돌할 수 있는 세 영역 사이의 질서와 조화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위의 세 영역이 서로 주도권을 가지려고 충돌하는 영혼은 지리멸렬한 상태에 머물러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이성이 질서를 잡을 필요가 있다. 우선 욕망은 자신에게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득을 좇지만 결국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르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기개는 명예로워 보이는 것을 따라가지만 맹목적으로 분노를 따르면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 수 잇다. 그래서 욕망과 기개는 냉정히 사색하는 이성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거다. 이성의 지휘 아래 욕망과 기개를 자신의 본분에 맞게 절제하며 사는 것, 이것이 평화와 질서를 겸비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곰곰이 새겨 들만한 가치가 있다.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사회는 각 계급이 자기 본분의 역할을 담당하며 남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을 때 이루어진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이성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지배자 계급의 지휘 아래 생산자 계급은 공동체에 필요 물품을 생산해 공급하고, 군사 계급은 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들의 본분을 지키며 수행하는 사회가 플라톤이 그리는 이성적이고 정의로운 사회이다. 그의 주장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아주 유효하다.

오늘 아침에는 조화를 깊게 생각하다가, 흥미로운 시를 소환하게 되었다. 마경덕 시인의 <어처구니>이다. "어처구니"는 맷돌의 나무 손잡이다, 저 둔중한 돌덩어리를 돌리며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그 순기능은 어처구니의 동력전달에서부터 온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관계론 적으로 역할이 분담되어 메타포를 형성하는 그 기능은 조화의 시작인 것이다.

어처구니/마경덕

나무와 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
근본이 다르고
핏줄도 다른데 눈 맞추고
살을 섞는다는 것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는 일
한곳에 붙어살며 귀가 트였는지,
벽창호 같은 맷돌
어처구니 따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순하게 돌아간다
한 줌 저 나무
고집 센 맷돌을 한 손으로 부리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다. 그 역시 삶의 운영에 있어 이성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목적에 의해 움직인다고 이해했다. 예를 들어,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 사물이 의자인 이유는 사람을 앉히는 목적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물건은 모두 목적과 기능이 핵심을 이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만든 물건 뿐 아니라 생명체들도 기능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이를 우리는 '목적론적 세계관'이라 불렀다. 이 세계관은 근세에 들어와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해 도전을 받을 때까지 거의 2000년에 걸쳐 서양 지성사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이란 모든 현상의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여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세상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까지 분석할 수 있다면, 세상의 움직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이 세계관은 자연을 하나의 기계처럼 움직이는 물질로 보는 패러다임이다. 사람도 여러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기계장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좀 더 하기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사물은 자신이 갖고 있는 기능을 수행할 때 가장 그것 답다는 거다. 인간도 인간으로 서의 기능을 다할 때 인간 답다는 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발휘하여 인간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생명의 세계는 식물, 동물, 인간으로 이어지는 데, 식물은 환경에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동물은 여기에 더해 주변을 지각하고 몸을 움직여 활동하며 활발히 번식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인간은 식물과 동물에 필요한 기능에 더해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거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감각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보편적 진리와 아름다움을 관조해야 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행동은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등 이성의 능력이 인간 답게 한다는 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개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런 구분은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중요한 가치와 해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해서, 그것은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만일 A라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그는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서 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은 것이다. 단지 51% 대 49%일 수도 있다. 또는 B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길 힘쓰고, 선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두개의 대립되는 가치의 정도와 경중을 깊이 관찰하고 측정하는 과정을 '쎄오리아(theoria)'라고 했다. 이를 우리 말로 하면 '관조(觀照)'이다. 이것은 사물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어제의 관습대로 보지 않고, 그 대상 자체로 보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 그리스어는 영어의 '씨오리(thory)'가 된다. 한국 말로는 '이론(理論)'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론은 '한참 보기'란 인내를 통해, 그 대상 그 자체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섬광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항상 제 3자가 되어 관찰하는 행위를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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