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기억될 날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 15. 15:45

307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15일)

1.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기억될 날이다. '염치'를 모르고, '정해진 마음', 즉 '성심(成心)'으로 뭉쳐진 사람들 때문에 새벽부터 혼을 빼앗겼다. 특히 체포 후에 미리 찍은 영상을 보면서, 정말 세상을 제 방식대로 보는 것에 경악했다. 젊은 친구들이 추운 시멘트 바닥에서 외친 것도 다 자기를 응원한다고 믿는다. 12월 3일 밤 젊은 국회 앞에서의 젊은 군인들과 시민들, 한남동 키세스 공주들, 오늘 젊은 경호처 직원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2. 
우리가 사는 삶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정치행위이다. 말 한마디도 모두 정치행위이다. 상황을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 가려는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한, 이 정치행위를 벗어날 수 없다. 강약, 크기 차이만 있을 뿐, 자신만의 신념이나 판단을 기준으로 각자 '정해진 마음(成心)'을 가지고 산다. 여기서 말하는 '정해진 마음'은 '굳어진 마음, 시비를 따지는 마음, 편견, 선입견 등 '꼴'을 이룬 마음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진 마음'을 스승처럼 모시고 산다. 현자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 똑같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정해진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시비판단을 한다. '성심', 아니 분별심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비를 따지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정해진 마음-정치행위-삶'이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런 삶의 형태에선 어떤 합의도 도출되지 못한다. 각자의 기준은 각자에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마음'에 갇혀 사는 것이 세상 속 인간이다. 그리고 이 '정해진 마음'을 강화하고 장식하는 데에 거의 대부분을 쓰는 존재가 인간이다. 문제는 그런 인간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 결박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 하는 일은 대부분 과거를 지키는 일이다. 결박을 풀어야 한다. 새로운 영토로 자신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하려면 자신의 '정해진 마음'에서 이탈하여 탈주해야 한다.

3. 
두 개의 고사성어를 소개한다. 하나는 '수주대토(守株待兔)' 이다. 중국 송(宋)나라의 한 농부는 토끼가 나무 그루에 부딪쳐 죽은 것을 잡은 후, 농사는 팽개치고 나무 그루만 지키고 토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한 가지 일에만 얽매여 발전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주수(株守)'라고도 한다. 변통할 줄 모르고 어리석게 지키기만 하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이다. 배에서 칼을 물속에 떨어뜨리고 뱃전에 빠뜨린 자리를 표시해 두었다가 배가 정박한 뒤에 칼을 찾으려 했다는 고사(故事)에서, 미련하고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 이 두 고사의 주인공은 비웃음의 대상이다. 어리석은 상황에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어떤 고정된 행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비웃음을 사는 것이다. 달라진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계속 같은 반응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다른 시대에 다른 비전을 생산하지 못하고, 고정되고 철 지난 틀로 새 시대를 맞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4.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번 토끼를 얻은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박혀서 계속 토끼만 기다리게 된다. 토끼를 기다리는 동안 이 농부는 어떤 생산 활동도 하지 못한다. 막연한 심리적 기대가 객관적 사실로 착각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토끼를 주워서 먹을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이 너무 커서 지금의 배고픔을 불평할 틈도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 가는 굶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말이 귀에 들오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사악한 부류로 몰아붙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정해진 마음'의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의 온 마음과 행동이 이 '정해진 마음'의 변주에 불과해진다. 한 사람이 하는 모든 심리적 활동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는 '심리적 기대'와 '심리적 확신'인데,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다. 여기서 근본주의자들이 나온다. 근본주의자들의 '정해진 마음'은 한 사람을 과거에 묶어두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있는 길을 가는 것과 없는 길을 열면서 가는 길은 차원이 다르다. 뱃전에 긁어 놓은 표식만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 가는 자신이 배를 타고 얼마나 흘러왔는지를 망각한다. 이 망각은 사람을 맹목적인 상황에서 헤매게 만든다.

5. 
또 '정해진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진실, 아니 '자기 진리'를 지키는 일로 바뀐다.
▪ 아무리 크고 중요한 일이라도 그것이 '정해진 마음'을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면 바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럴 때, 사용하는 비굴한 논리들은 모든 상황을 상대적인 묘사 속으로 끌고 간다.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덜 하다"고 하거나 "나만 그런 것이냐"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 한다.
▪ '남보다 더 낫기만 하면 된다'는 종속적 사고에 빠지게 된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남보다 더 나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다를 뿐만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것이 있어야만 만족할 것이다. 종속적인 사람은 남보다 더 낫기만 하면 될 뿐이다.
▪ '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염치가 없어진다. 자신이 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말한 원칙을 스스로 깨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소위 '정치'를 버리고 '정치 공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 '정해진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객관적 비판 능력보다는 감정적 동질감에만 의존하면서, 갑자기 호위무사로 등장한다. 자존감이나 품격이나 진실성은 사라진다. 오직 '정해진 마음'들의 연대만 남는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고정된 틀에 갇혀 염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6. 
'정해진 마음'을 극복하려면, 철저한 인문 정신이 요구된다. '정해진 마음'에 좌우되는 감정을 극복하고,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일이다.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아라(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통일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그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道)'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 하는 것이 곧 '심재(心齋)'니라. 이어서 '심재'를 실천하여 생기는 결과에 대해 말한다. '심재'를 하면,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귀로 듣는 일, 마음으로 듣는 일 등에는 아직 제한적인 자기 관점이 강하게 적용되는 단계이다. '기'의 단계는 아직 이념이나 가치가 개입되기 이전으로서 세계의 원초적 상태이다. 어떤 가치나 관념이 자리 잡기 이전 혹은 자기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은 단계이다. 그리고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를 장례 지내라." "오상아(吾喪我)". 장자의 '자기 살해'는 기존의 가치관에 결탁되어 있는 나를 죽임으로써,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충만해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虛心(허심, 빈 마음)'의 상태를 갖는 것이다. 

7. 
허심(虛心)의 지혜 없이 지식과 지성만으로 살면 자아가 아주 비대해 진다. 고미숙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준다. "'내가 원하는 노동으로 당당하게 살겠어요'가 아니라. '엄청난 거액의 돈을 주무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거다. 고미숙은 이걸 '자의식의 비만'이란 표현을 썼다. 이런 궤도를 타게 되면 이건 절대로 멈출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러고 나서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누린 다음에 오는 건 반드시 허무이다. 누구도 멈출 수 없고, 더 목마르고, 마지막에는 허무에 몸부림친다. 이걸 고미숙은 '자기와의 완벽한 소외'라고 말했다. 이 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지식과 지성을 누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삶을 질식 시키게 된다. 이게 '자기와의 소외 현상'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와 소통하지 못하면 당연히 타인과 공감하기도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이 오늘 체포되었다.

8. 
그런 사람은 '염치(廉恥)'를 모른다. '염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책,  <<담론>>에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뜨리고 일을 그르친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 ‘70%의 자리’를 권하였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그릇 론'이라 한다. “30 정도의 여유, 30 정도의 여백이 창조의 공간이 된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가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 난다.” 또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자리와 관련해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주역>>은 효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경우를 ‘득위’라 하고, 잘못된 자리에 가 있는 경우를 ‘실위’라고 한다. '득위'는 아름답지만 '실위'는 위태롭다. <<주역>>의 핵심은 관계론이다. '길흉화복'의 근원은 잘못된 자리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내가 있는 '자리', 즉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묵상하며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직위(職位)'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서 나의 위치까지 확장되는 용어이다. 한문으로 하면 '위(位)'이다. <<주역>>에 따르면, 제자리를 찾는 것을 '득위(得位)', 그렇지 못한 것을 '실위(失位)'라 했다. '득위'는 만사형통이지만, '실위'는 만사 불행의 근원이다. 잘못된 자리는 본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한다. 

9. 
그리고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말했다.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한 마디로 올바름에서 벗어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무엇이 바르고 의로운 것인지 분별하고, 의롭지 않은 것을 경계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이것 이야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덕목이 아닐까? 사람을 사람 답게 하는 것은 염치다. 

10.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지도자가 되면 나라는 불행해진다. 무지, 오만, 비굴, 탐욕의 인간 군상들을 매일 TV로 접한다. 참으로 뻔뻔하다. 갑남을녀 대부분은 술값 몇 푼으로 조바심 친다. 조무래기라 그런 걸까? 염치는 헌신짝처럼 차버려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가 보다. 차라리 위선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우리들의 염치를 회복해야 한다. 염치(廉恥)라는 단어는 '청렴할 염(廉)'과 '부끄러울 치(恥)'라는 한자가 모여 만들어졌다. ‘염조(廉操)와 지치(知恥)’의 줄임 말로,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청렴하여 지조를 지키고(廉操), 수치심을 아는 것(知恥)'인데, 흔히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한국 사회가 갈수록 염치가 없어진다. 개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인처럼,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매우 필요하다.


술값/신현수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잘난 척한 날이고
말도 안하고 술값도 안낸 날은
비참한 날이고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그중 견딜만한 날이지만
오늘, 말을 많이 하고 술값 안낸 날은
엘리베이터 거울을
그만 깨뜨려버리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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