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14일)
오늘 아침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화두를 잡고 싶다. (1) 큰 질문을 경계하라. 사실 우리는 너무 큰 질문을 하고 헤맨다. (2) 글을 쓰면 벼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래 나도 아침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나를 벼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하면, 인간은 다음 같이 세 부류가 있다.
•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 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사는 부류: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다.
• 꿀벌처럼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드는 부류: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같은 사람들이다.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fer 한다. 그게 창조이다.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스승은 큰 질문을 경계하라고 했다. 인터뷰어가 되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운 질문에도 거침없이 대답하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말을 잘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개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계속 질문을 던져온 사람들이었다. 더 시간이 흘러 인생의 빅데이터가 쌓이자 ‘위기를 기회로 인식’하는 사람보다 한 단계 고수들을 알게 됐다. 그들은 가장 잘나갈 때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끼며 최악을 대비한 질문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질문하는 연구소’의 설립자 마릴리 애덤스는 <<질문의 기술>>에서 질문을 ‘심판자의 질문’과 ‘학습자의 질문’으로 나누었다. “누구 탓이지?” “어쩌다 패배했지?” 라는 ‘심판자의 질문’은 사람을 불안과 패배감에 젖어 들게 하는 반면, “이 상황에서 배울 점은 뭘까?” “지금 당장 가능한 일은?” 같은 ‘학습자의 질문’은 긍정적으로 심리적 안정감과 새로운 도전 의식을 준다는 게 책의 논지였다.
소설가 백영옥은 공원을 걷다가 "나이 들어 좋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선배가 “이젠 내 한계를 알아!”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 "이제 못하는 걸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잘하는 걸 더 잘하려고 노력하겠다는 게 요지"로 해석하고, 이 질문과 대답이 그녀에게 이후 일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바꿨다. 이때의 질문은 또 다른 이름의 ‘지혜’가 된다.
인문 운동가가 추구하는 인문정신을 갖는다는 것, 인문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완성된 이론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그곳에서 자기 눈으로 발견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인문적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대답하는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론을 숙지하는 삶에서 문제에 빠져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
스승은 글을 쓰면 벼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래 나도 아침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나를 벼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 스승에 의하면,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다. 죽음에 대해 쓰는 거다.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는 거다. 스승은 '사람이 어떻게 끝나는 가를'를 보고 기록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마지막 갈증을 채우는 일이라 했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경구로만 여겨질 때가 태반이다. 실제 삶에서는 문이 닫힐 때면 안타깝고 불안해 한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위로를 빨리 찾아야 한다. 어떻게? 다음과 같은 기억에서 위로를 빨리 소환하는 것이다.
(1) 시인의 노래처럼 절망 앞에서 정직할 때 희망의 문이 열렸던 기억
(2) 현명한 이들의 충고
(3) 시와 영화 같은 예술의 일깨움이 주는 위로이다. 특히 예술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려고 하는 메타언어이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들은 뻔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잊곤 했던 위로를 나누는 힘이 된다. 함께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시인의 노래처럼 그 "끝이 참된 시작"이 될 것이다.
길이 끝나면/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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