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예수의 생활에는 다음 4가지가 늘 함께 한다. 기운과 숨 그리고 의지와 섭리.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 13. 17:28

307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13일)

1. 
어제는 <주님 세례 축일>이었다. 다음 주부터는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연중 시기는 예수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시고 가르치시며 보내신 3년의 공 생활을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의 생활에는 다음 4가지가 늘 함께 한다. 기운과 숨 그리고 의지와 섭리. 기운과 숨은 다르다. 기운은 우리 몸이 정, 기, 신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에서, 기에 해당한다. 이 기운이 성령이라고 생각한다. 숨은 사람이 호흡하는 거고, 성령은 하느님이 내려주는 기운이다. 그 기운은 어떻게 나오는가? 예수의 삶에서 배운 것처럼, 나를 비우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과 함께 가려는 연민과 긍휼(compassion)의 마음으로 살려는 삶의 방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동아시적 사유를 빌리면, <<도덕경>> 제48장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이 아닐까?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비워가는 것. 비우고 또 비워 함이 없는 지경[無爲]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원문은 이렇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2. 
여기서 내가 또 좋아하는 것이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말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위'가 아니라 '무불위(되지 않는 일)'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거였다. 어쨌든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롭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맑은 물이 샘솟지 않게 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자꾸 비워야 영혼이 맑아진다.

3. 
어제 미사에서, 주님의 세례(洗禮)가 성사(聖事)적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성스럽고 거룩하다. 여기서 성사적이라는 말은 삼위가 일체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성자는 흐르고 씻겨지는 물을 느끼고, 성령은 비둘기 형체로 보여지고, 성부께서는 귀에 들려지게 '아들~ 아들~'하고 말씀하신다.  촉각, 시각, 감각에 거룩한 향까지 느껴지지만 삼위이신 하느님의 모습은 안 보이지만 느낄 뿐이다. 그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당신이 나에게 준 사랑과 관심, 보살핌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을 알고 보고 먹고 맡고 느끼게 체험했다." 특히 '낯선 자'에서 우리가 사랑을 보일 때, 그 '낯선 자'가 곧 예수라는 말도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여기서 의지는 내 삶의 방향성이다. 이때 우리는 '성사적 인간'이 된다.

4. 
자비, 아니 연민은 예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walk to Emmaus)>(누가복음 제24장 13-35절)에 나온다. 엠마오 출신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를 보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가에서 ‘낯선 자’를 만나,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 낯선 자가 예수였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 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예수가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가 된 것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원칙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과 주변, 특히 옆에 있는 나그네의 처치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낯선 자'를 인식하고 그에게 비정상적인 만큼의 호의를 베푼 것이다. '낯선 자'에게 행동으로 긍휼을 보여줄 때, 신의 신비가 우리 눈 앞에 등장한다. 그러면 '낯선 자'가 예수이다.

5. 
'성사적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나를 통해서 보여지고 느껴지게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성사적 삶'을 통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찬미하는 일이다.  오늘 주보에서 노승준 세례자 요한 신부님이 하신 말씀처럼, "예수께서 세례로 공생함을 시작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아픈 이들에게 다가가고 다독이고 치유하고 매만져 주셨던 것처럼, 연중 시기를 시작하는 우리도 성서적 인간이 되어 주심 사랑과 은총을 느끼게 해주는 주님의 거룩한 일(聖事)을 성사(成事)시킬 것"을 다짐해 본다.

여기서 '성사(聖事)'가 '무위'로 읽히고, 이 '성사(成事)'는 '무불위로' 읽힌다. '성사'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 제3장  마지막 문장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 즉무불치)" 라는 말이 소환된다. 노자의 "무위"라는 말은 제2장에서 부터 나온다. 노자는 "無爲之事(무위지사)" 속에서 살라는 가르침을 <<도덕경>> 처음부터 말한다. 성인(자유인)은 "무위의 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거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무(無)'자를 우리는 잘 이해하여야 한다. 노자에게 있어서 '무'는 부정사(부정사)로 쓰이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는 품사로서 기능한다. '무'는 '무명(無名, 이름이 없음)', '무형(無形, 형태가 없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가 '없음'이라기 보다는 '빔(虛)'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무'가 부정부사로 쓰일 때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무분별의 세계를 지향하는 심오하고도 긍정적인 의미가 동시에 곁들어진다. 예컨대, '무지(無知)'도 '앎이 없음(ignorance)'이 아니라, 무분별의 차원 높은 앎의 경지를 의미하게 된다.  그래 나는 '무'를 '없음'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지운다', '버린다'라는 동사로 본다. 그냥 없애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비우거나 버리는 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도 새롭게 해석이 된다. '무소유'란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기 위해 버린다는 적극적인 실천적 의미를 갖는 거고, 또한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물건의 물성(物性)을 유지시키는 적극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6. 
그러니까 '무위'에서 '무(爲)'가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은 누가 무어라 해도 살아있다는 거다. 그리고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서 '위(爲)'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서 죽을 때까지 위(爲), 즉 함(doing)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위'는 '함이 없음'이 아니라, '무(無)적인 함'을 하는 것이다. 도올의 멋진 설명이다. "생명을 거스르는 '함'이 아닌, '우주생명과 합치되는 창조적인 '함'이며,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에 어긋나는 '망위(忘爲)가 없는 함'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에게 '유명(有名)'에서 '무명'으로. 유형(無形)'에서 '무형'으로 '건너가기'를 권하는 것 같다 (제3장). 왜냐하면,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무명의 위'이며, '무형의 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무위에서 대비되는 개념이 '유위'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유위'는 무엇인가를 자꾸 하면 할수록 사태가 엉크러져 가는 상황을 일으킨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 그걸 자주 만난다. 그러니 꼬인 상황을 풀려고 애쓰지 말고 내버려두면 저절로 풀려나가게 하는 게 '무위'라 보는 것 같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무위'라는 단어는 '무(無)적인 무', '무명의 무', '무형의 무'로 읽을 수 있다. '위무위'에서 '무위'가 '함(爲)의 목적어로 보고, '함이 없을 함'으로 읽어야 한다. '무위'는 '위'의 부정태가 아니라, 위의 소이연(所以然, 그리 된 까닭)이다. 그러니까 '무위'는 우리의 삶이 살천해야 할 '위'인 것이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은 '함'이다. 그러나 함은 '함이 없음'의 실천이다. 왜 노자는 이런 말을 했을 까? 무위하면 다스려지지 아니함이 없을 거라는 것을 말하고 자 함 같다. 도올의 생각은 그래야 평화로운 세상이 온다는 거다.
 
7.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라는 말을 잘 못 이해하면, 삶이 무겁다. '무위' 이야기는 <<도덕경>> 여러 곳에 나온다. <<도덕경>> 제7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만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자신이 앞서게 된다. 자신을 소홀히 하지만, 오히려 보존된다"고 했다. 노자는 앞서고 보존되기 위해서, 내세우지 않고, 소홀히 할 뿐이다. 그리고 <<도덕경>> 제22장에서, 노자는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런 사유를 하다 보나, 안도현 시인의 <겨울 강가에서>가 생각난다.

겨울 강가에서/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 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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