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1. 12. 14:56

307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12일)

우리 동네에는 헌책방이 하나 있는데, 골라 잡어 무조건 2000원이다. 나는 마음이 허하면 그곳에 가서 10,000원치 책을 골라 온다. 비교적 두꺼운 것으로, 인문 정신을 키울 수 있는 책으로 선택한다. 지난 주에 구입한 것 중에는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가 끼어 있었다. 책 뒷면 표지의 다음 말이 마음에 들었다.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멘붕 사회에 해독제로 쓰일 책!"

1. 
나는 <인문 일지>를 쓰면서, '힐링'보다는 '필링'하겠다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표현을 배웠다. "스탠딩". <<데미안>>에서 화자는 데미안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한다. "가장 나 다운 개인적인 삶과 생각이 얼마나 깊이 거대한 사유의 영원한 흐름에 관여되어 있는 가를 보고 갑자기 느끼게 되자 두려움과 경외심이 나를 압도했다." 일상에서 방심(放心)하면, 우리는 생각을 당한다. 그리고 '가장 나 다운 삶'을 생각하면 두렵다. 의존에서 독립으로 건너가려면, 두려워도 의존을 걷어차야 한다.  그리고 화자는 "그 통찰은 즐겁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통찰은 즐겁지 않았다. 확인해 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는데도 왠지 즐겁질 않았다. 그 통찰은 가혹했다. 맛이 떫었다. 그 안에는 일말의 책임의식이, 이제는 어린애일 수 없다는, 홀로 서 있다는 울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존을 걷어차고, 홀로 서 있어야, '진짜' 사는 것이 아닐까?

2.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을 당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자각하려 하지 않는다. 의존에서 독립으로 건너가기는 늘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권력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 당한다'고 말하는 것이 '필링 인문학'의 시작이다. '필링 인문학'은 생각을 지배하는 모든 권력, 구조, 자본주의의 관계를 문제 삼아 내가 진짜 생각하는 지를 성찰하는 것이다. '필링 인문학'은 '실존적 나'가 '생각 당하는 나'인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성찰하는 나'가 '필링 하는 나'라고 주장한다. '필링 인문학'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생각하는 나인가, 생각 당하는 나인가, 이 질문을 하면서 내 생각의 제작자를 찾아내 맞서자는 것이다. 그 다음은 나는 행복한가라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그대로의 실존적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불안한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은 나와 공동체를 만나 그 원인을 파헤치자는 것이다. 그냥 멘붕 상태로 있지 말자는 거다. 사실 '생각 당하는 나'는 어두운 세상의 뒤안길에서 행복하지 못하다. '실존적인 나'가 생각 당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필링 인문학'은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는 가라는 질문을 하며, 상상과 함께, 근거는 없지만, 희망 찾기를 시도한다. 그 희망은 우리 각자가 있는 처지에서 '마중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침마다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지>란 제목으로 글을 쓰며 생각한다. 그리고 공유한다. 생각을 당하지 말자는 의미이다.

3. 
인문 운동가는 '생각 당하는 나'에서 '생각하는 나'로, '순응하는 나'에서 '비판하는 나', '정책의 대상인 나'에서 '정책의 주체인 나'로, 내 자신과 공동체의 주체가 되려는 실천을 행동하는 자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필링 인문학'이다. 이때 그 인문학은 나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실천이 된다. 이 실천은 개인의 이해와 힐링을 넘어 공동체의 갈등과 구조를 필링(peeling, 껍질을 벗김)하는 것이다. 이때 인문운동가는 모든 현실에 대해 등에(쇠파리)가 되어 새로운 상상의 산파(産婆)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유시민 책을 읽기로 했다. 어제 <인문 일지>에 썼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멘붕 사회' 속에 살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에서 윤의 계엄 선포 당시 ‘이것은 국헌문란이며 내란이다’라고 외친 자들이 정부나 여권 내부에서 거의  없었다는 사실과 국가 안위를 다루는 국무 위원과 국방을 책임진 최고위 장성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 평범한 시민들을 멘붕에 빠지게 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명문대와 사관학교 출신 또는 외국 유학을 경험했거나 학생을 가르친 엘리트들이며, 국민 선택을 받은 국회의원을 지냈거나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러나 마비된 판단력으로 전 국민 경전인 헌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국민의 공복을 자처한 자들이 주인을 배반했다. 더 속상한 것은 우리가 그 후에도 이같이 '전도된 현실'을 한 달 넘게 지금도 목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법 파괴자가 오히려 철옹성을 쌓고 법 운운하고 있다. 하수인들은 국격 추락의 원인으로 윤의 체포는 제쳐놓고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한 온갖 구실을 찾고 있다. 거짓말, 은폐와 왜곡, 위선과 허위, 기회주의, 적반하장, 참으로 추하고 비열하다.

4. 
흥분하지 말자. 이번에는 확실하게 그들을 처단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불의와 부조리에 타협한 자들을 심판하지 못한 역사의 후과가 바로 윤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다. 우리는 먼저 역사를 왜곡 하는 이들을 과감하게 그리고 철저히 처단 했어야 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를 관철하지 못한 게 이승만의 독재를 야기하게 했고, 그 이승만 독재를 야멸차게 청산하지 못하다 보니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또 만들었다. 이게 이 나라 악의 상징 전두환의 등장으로 옳은 심판을 또 못하다 보니 친일 부역 세력, 적폐들이 내내 기회를 엿보며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저 윤에게까지 옮아왔던 것이다. 전두환을 자연사(自然死) 하도록 처딘 하지 못한 것 역사의 커다란 오점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5. 
이런 '멘붕' 사회에 '해독제'가 필요하다. 그 해독제가 '인문 정신'이 아닐까? 우선 인문학자와 인문 운동가를 구분해야 한다. 인문학자와 인문 운동가는 다르다. 인문학자가 과학자라면, 인문 운동가는 공학이고 기술이다. 인문학이 이론이라면, '인문 정신'은 일상에서 구현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면 인문학자 이고, 사랑이라는 말이 생활에서 구현되어 친절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문 운동가 이다. 난 인문 운동가이다. 이제는 '무엇'을 전하는 일보다 전할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해야 한다. 인문 운동가는 지식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인문 정신'을 생산하여 이 사회를 인문적 높이로 올리고자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인문 정신'을 갖는다는 것, 인문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완성된 이론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그곳에서 자기 눈으로 발견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인문적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답하는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론을 숙지하는 삶에서 문제에 빠져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

6.
우리는 '12.3 내란' 사태로 큰 상처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생각이 '해독제'이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 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디."(유시민)

7.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 이것은 '인문 정신'에서 나온다. 인문 정신은 '아파도 당당하다.' 문제가 있다면, 대충 관념적으로 장난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의 길은 아프다. 아파야 살아있는 것이다. 안 아프면 죽은 것이다. 삶은 원래 아픈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힘든 데도 버티며 사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아픈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방향을 선택하면 강물에 휩쓸려 내려간다. 그것은 살아도 죽은 것이다.  왜? 죽은 물고기만 내려가니까. 우리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있다.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그런데 순응해야 하는 현실은 죽은 것이다. 

8
많은 사람들은 인문 정신을 키우는 인문학을 단순한 문화활동의 영역으로만 이해한다. 그래 어느 <인문학 포럼>이라는 밴드에서 내 글이 삭제되더니, 이제는 아예 강제 탈퇴 시켰다. 인문학이 단순한 문화 활동으로 될 때, 그 인문학은 탈 정치화되고 탈 역사화 된다. 그러한 인문학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사회나 세계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게 하고, 구체적인 변화가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실천적 삶에 무관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문학을 탈 정치 화하면 인문학이 지닌 중요한 비판적 성찰과 세계에 대한 개입의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 나는 인문학자보다 인문 운동가가 되기로 택하였던 것이다. 인문 운동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하고 있다.
▪ 비판적 성찰, 
▪ 해답 찾기가 아닌 새로운 물음 묻기를 통한 세계 개입으로 대안 찾기
▪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서의 정의, 평화, 평등, 연대의 가치를 더 확장하고 실천하기 위한 비판적 저항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간에 고정하려 하는 것과 제한하려 하는 것, 절대적인 것의 위험성과 불확실성을 성찰해야 한다. 이런 비판적 저항은 다음과 같은 인문학의 기초에서 이루어진다.
▪ 세상의 모든 권위와 권력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는 비판적 사유는 나 자신과의 대화이고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독'이라고 말했다.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보다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이성적으로 사유하기: 이를 위해  자신을 말과 글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 물음 묻기, 즉 질문하기: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이 있다. 좋은 질문은 질문 받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고 내 안에 또 다른 세계를 찾게 만든다. 나쁜 질문은 "예 혹은 아니오"로 단정 짓게 만드는, 생각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이다. 답을 내릴 때 기억해야 할 다음 세 가지가 중요하다. (1) 모든 답은 잠정성을 갖는다. (2) 모든 답은 부분성을 갖는다. (3) 모든 답은 특정한 정황 속에 매여 있다.
이를 통해 키워진 인문 정신은 확실성을 내려놓고 불확실성에서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끊임 없는 불안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하는 수고가 있다 할지라도, 고정된 정답보다 새로운 질문 묻기를 하는 것이다. 상투성에 저항하고 자명성에 물음표를 붙이는 일이다. 

9. 
그리고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 답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답지 않은 사람들이 열심히 배워야 하는 학문이다. 글이나 말로는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다. 예컨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이라는 책 안에는 "자신의 삶을 주도 하라"는 제목이 첫 번 째로 걸쳐 있다. 이 내용을 읽었다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또 그런 사람이 생겨날까?  공자는 인격을 완성하는 최고의 방법을 말해준다.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 문제는 이 말을 듣고 실생활에서 정말로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게 되는 가'의 여부인데, 대개는 시험지 답안에만 쓰고 끝난다.  그것을 구체적인 생활로 까지 끌고 나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포용을 이야기 하면서 포용의 혜택을 입으려고만 하지, 자신을 양보하여 포용의 주도자가 되려 하지는 못한다. 포용에 대해서 아무리 토론하고 가르쳐도 포용이라는 가치 있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10.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졌다. 상대적으로 한가한 겨울 방학에 읽어 가며, 그의 사유를 함께 공유할 생각이다. 어제는 <페북>에서 다음 글과 함께 흥미로운 그림을 만났다. 허락 없이 가져다 공유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만 하기 보다는 실제 세상이 작동되면서 진행되는 방식에 나의 몸과 마음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미로 거든."


하는 일이, 세상 일이 뜻대로 안된다고, 초조해 할 필요 없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고병권 작가의 다음 말을 소환한다. “나는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또한 철학이라고, 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 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 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인문 정신이 아닐까? 삶을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라 보는 거다. 내란 수괴가 빨리 체포도지 않는다고 초조해 할 필요 없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하며 살아 가는 거다. 다 시간의 문제이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일 앞에서 초조해 하고 조급해 한다. 그래 나는 "구부러진 길을 좋아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말이다.


구부러진 길/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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